해운대 여래사 주지 도원 스님

▲ 도원 스님은 1951년에 태어나 보광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2013년 위덕대 불교문화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위덕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2014년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받고 복지를 위해 더욱 노력하고 있다. 1997년 조계종 포교원장 포교상, 2010년 4월 20일 부산시장 표창상, 2010년 10월 5일 장애인 총연합회 회장상을 수상했다. 현재 부산 해운대에서 여래사 포교원을 주지를 맡고 있으며 매달 청각 장애인을 위한 법회를 봉행 중이다.사진은 부처님을 의미하는 수화를 보여주는 도원 스님


청각장애인에게 법문 통역 22년
법회ㆍ수련대회 등 포교 진행
장애인복지기관 건립의 서원 세워
100만배 및 다라니 천일기도 회향

법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던 한 노 보살이 눈에 들어왔다. “법회가 곧 시작하니 들어가시면 됩니다”고 고 안내하는 한 스님을 노 보살은 쳐다보지 않았다. 스님은 재차 불렀지만 이 보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스님이 왜 반응이 없을까 싶어 어깨를 살짝 건드리자 노 보살은 작은 수첩을 꺼내 들며 적어 내려갔다.
 “저는 청각장애인입니다. 법문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스님은 순간 멍해졌다. 평소 청각장애인과 잦은 만남이 있었던 스님이지만 사찰에서 청각 장애인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스님의 생각은 왜 그동안 사찰에서 청각장애인들을 만나지 못했을까로 뻗었다. 이 보살이 말한 ‘법문을 들을 수 없다’는 것에 집중했다. 이 작은 인연 이후 이 스님은 22년간 청각장애인을 위한 전법에 나서게 된다.

스님은 해운대 여래사 주지 도원 스님(64)의 이야기다.

도원 스님은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법회와 쌀나눔 및 장학금 전달, 장애인 학생들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련회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운대 여래사 포교원에서 10월 12일 스님을 만나 스님의 일생에 대해 들었다.

▲ 2013년 위덕대학교에서 열린 불교학도의 날, 수화 공연을 펼치고 있는 도원 스님

열악한 장애인 포교 현실에 발심

도원 스님은 22년 전 위의 노 보살과의 만남 이후 수화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화엄법계사 불교문화대학(舊 부산불교 교육원)의 불교 수화반에 1기로 들어갔다. 그리고 농아인협회에 가입하고 날마다 청각장애인들을 만나 연습했다. 또 이미 청각장애인을 위한 설교를 하고 있는 서울 영등포교회를 5년 동안 다니며 그 노하우를 배우기도 했다.

“전국에 수화를 활용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수화는 외국어와 마찬가지로 매일 마다 연습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청각장애인들에게 법문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을 잘하고 있는 곳을 찾을 필요가 있었지요. 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먼저 법회를 열었습니다.”

스님은 수화를 완벽히 익히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고 말했다. 스님은 하루라도 빨리 부처님을 법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본적인 법당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사찰을 돌아다니며 청각장애인을 위한 법회를 열 때 마다 적게는 50여 명에서 많게는 100여명이 법당을 가득 채웠다.

“부산에 각 사찰의 스님들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동래 자비암, 범어사 내원암 등 사찰을 돌면서 법회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2007년 해운대에 여래사 포교당을 개원했습니다.”

스님의 포교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됐다. 한번도 진행된 적 없었던 청각 장애인 청소년들을 위한 템플스테이를 여는가 하면 수련회 캠프를 열고 발우공양 및 산사체험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왔다. 스님은 쌀 나눔과 장학금 전달도 정기적으로 진행했다. 이밖에 환경이 어려운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자잘한 고충을 해결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번은 법당에 나오던 장애우가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횡단보도 밖으로 튕겨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사고 처리 과정에서 상황을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못해 자신에게 불리하게 진행이 돼도 알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이라 통역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구요. 이처럼 청각장애인은 삶 속에서 많은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스님은 교통사고를 당한 청각장애인을 위해 상황을 설명하고 문제를 해결했다. 스님은 최근에는 핸드폰과 같은 IT기술이 발달해 예전보다는 청각장애인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부담을 덜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장애인들을 위해 해외불교문화 탐방 가이드도 자처하는 한편, 사경을 통한 한글교육 등으로 삶의 중심을 잡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수화 가운데 지화라는 방식이 있습니다. 한글의 자음 모음을 엮어 글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분들은 이런 지화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전에는 장애인이라는 사실 만으로 집안에서 천대받고, 교육조차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사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글자 한글자 쓰며 지화로 외우게 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지화를 가르친 결과 가족들이 더 반가워했다고 밝혔다.

▲ 2014년 초파일 봉축법회에서 청각 장애우들과 함께 법회를 여는 모습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새로운 법회 도입

도원 스님의 법회 통역의 특징은 ‘쉬운 언어 사용하기’다. 스님은 이해하지 못하는 통역은 또 하나의 언어 장벽이 될 뿐이라고 강조한다.

“청각장애인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단어에 대한 이해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특히 불교 통역에 있어서 한자로 되어 있는 어려운 단어들이 많기 때문에 통역을 해도 법문의 30%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쉬운 단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스님은 해박한 불교지식과 그 순간 가장 어울리는 단어를 선택해 어려운 고승대덕 스님의 법문을 거뜬히 풀어낸다.

“수화는 손 뿐만이 아니라 얼굴 표정으로도 많은 감정과 뜻을 전달합니다. 이 때문에 오해를 살때도 있습니다. 법회에서 스님이 서서 얼굴을 찡그리고 웃고 손을 막 움직여대니 말이죠. 하지만 이런 오해보다 장애인들에게 부처님 법음을 전하는 것이 먼저 아니겠습니까?”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법회는 통역만이 문제가 아니다. 절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전달할 방법이 모호했다. 스님은 북을 사용한다고 했다.

“음의 파장을 이용하기 위해 북을 이용합니다. 공기를 통해 전달되는 파장은 미세한 흔들림으로 전달이 됩니다. 그리고 청법가나 찬불가는 모두 수화로 그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렇다면 스님이 장애인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스님은 법회 때마다 ‘보시 바라밀’을 설한다고 했다.

“수많은 장애인들은 대부분 받는 것에만 익숙해 있습니다. 어디 법당이나 교회에서 무엇을 나눠준다고 하면 100명이 넘게 모이곤 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받지 않아도 마음을 풍성하게 하는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에게 역으로 보시바라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스님이 장애인들에게 나누는 사람이 되기를 강조한 지 5년이 지나자 이제는 법당을 찾아오는 장애인 불자들이 늘고 있다.

“처음에는 마치 썰물처럼 빠져 나가더군요. 이런 처지에 누구를 도우라는 것이냐는 것 마냥요. 하지만 보시의 중요성을 계속 설명해주니 삶이 변화하는 이들이 늘은 모양입니다. 처음에 기복에만 매달리던 이들이 법당을 찾으며 수복(修福)의 단계를 그리고 작복(作福)의 단계로 올라서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낍니다.”

▲ 청각 장애인 청소년을 위한 산사 문화재 및 템플 스테이가 끝난 뒤 기념 촬영 모습

사업 실패로 인한 삶의 회의가 출가로 이어져

스님은 출가 당시의 시절을 돌이켜 보며 수많은 역경이 자신을 출가로 이끌었으니 감사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스님은 먼저 어릴 적 할머니의 깊은 신심으로 불자가 됐다고 말했다.

“할머님이 돌아가 실 때도 손에 염주를 놓지 않으셨어요. 신심이 크신 할머니와 함께 초파일이 되면 등을 달고 밤새 등 아래에서 기도를 올렸죠. 할머니께서는 관음기도를 열심히 하셨어요. 그 인연으로 저도 관음기도를 자주 합니다.”

남달랐던 불교의 인연을 시작으로 스님은 어릴 적부터 출가의 권유를 받았다고 말했다.

“명이 짧다는 말과 함께 출가를 해야 한다는 말을 절에서 여러 차례 듣기도 했습니다. 장성해서 자수성가를 꿈꾸며 섬유계통 사업을 벌였는데 불이 세 번 나고, 수해를 한번 겪으며 좌절할 수 밖에 없었죠.”

스님은 “발명특허를 받은 기술을 가지고 사업을 진행했다. 재난만 없었으면 탄탄한 성공대로를 달렸을 것이지만 누가 불을 낸다고 해도 그렇게 자주 재난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 당시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일어서려 해도 의지가 생기지 않았죠. 출가를 한 후 제 길을 찾았다 싶었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하며 그들을 위한 귀가 되어라는 부처님의 이끄심이라 지금은 생각합니다”

복지관 및 수행도량 불사원력 세워

도원 스님은 2012년부터 시작한 100만 배 및 대다라니 108독송 천일기도를 8월 19일 회향 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한 여래사 신도는 스님의 가사를 보여줬다. 모두 무릎 부분이 낡아 구멍이 나고 너덜했다. 스님은 기도를 시작한 이유가 장애인들을 잘 보듬을 수 있는 복지 시설과 수행도량의 불사를 위해서라고 했다.

스님은 한 여름에는 선풍기도 없이 절을 했다. 땀이 흘러 가사가 흥건하게 되어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찢어지고 헤어진 가사는 온통 구멍투성이다.

“원을 세우고 기도를 시작하고 30만배를 할 때 였습니다. 다리가 너무 아프더군요. 하지만 아픈 것보다는 번뇌와의 싸움이 더 힘들었습니다. 법당으로 나가는 거리가 7미터도 안되는데 육신과 번뇌와의 싸움이 반복됐습니다. ‘왜 해야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법당에 부처님 앞에 서기까지 3시간이 걸리더군요. 마음에 망설임은 내 다리를 붙잡았습니다.”

부처님 앞에 서기만 하면 절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매일 천배씩 3년간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라 했다.

“40만 배를 넘어서고는 불사를 위해 시작한 기도 내용이 자연스럽게 달라지더군요. 내 마음의 불사가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물 불사는 그 후이며 내 마음이 바로 잡혀 지길 발원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 내 마음의 불사가 바르게 되고 난 뒤 그 위에 도량 불사가 이뤄지길 바란다고 깊이 기도했습니다.”

스님은 50만배가 지난 후에는 번뇌가 없어졌다고 했다. 오히려 하지 않으면 업을 짓는 거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고 했다.

도원 스님은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관심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전국에 청각 장애인들을 위해 법회를 여는 곳은 제가 알기로 서울 2곳, 그리고 부산은 이곳 여래사 밖에 없는 것으로 압니다. 부처님 법을 알고 싶어도 기도 하고 싶어도 갈 곳이 없는 것이 그들의 현실입니다. 자료화 되어 있는 것도 부족하고 그들을 위해 법문을 통역할 봉사 인재들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도원 스님은 청각장애인들의 현실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그들에게 부처님 법을 전할 여건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각장애인들과 만남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타 종교인들과의 만남도 자주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장애인들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합니다. 그에 비해 불교계는 아직도 열악합니다. 장애 청소년들을 위한 자리를 자주 만들고 싶습니다.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발우공양도 가르치고 박물관도 가고 했던 기억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과는 달리 지속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전법은 위 아래 그 어느 곳에도 구분 없이 펼쳐져야 합니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으며 스님은 부처님과 보살 그리고 연꽃을 의미하는 수화를 보여줬다.

스님의 손을 보며 천수천안관세음 보살님의 손이 떠올랐다. 들리지 않는 이들의 소리가 되어 하루에 천개의 손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대자비의 손이였다.

 

▲ 청각 장애인 템플 스테이에서 도원 스님이 자원 봉사자들과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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