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종 종무원 인문사회특강 박웅현 TBWA KOREA 크리에이티브 대표

 
▲ 박웅현 대표는… 현재 TBWA KOREA 크리에이티브 대표(CCO)를 맡고 있고 제일기획 제작본부 국장, 아시아퍼시픽광고제 심사위원, 칸국제광고제 심사위원, TBWA KOREA 전문임원 등을 역임했다. 1986년 조선일보광고대상과 1987년 진로광고대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여덟 단어〉 〈책은 도끼다〉 〈생각수업〉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사람은 누구나 폭탄이다〉 등 15개의 저서가 있다.

창의력, 엉뚱·독특함서 비롯
물리적 결합 아닌 화학적 결합
사소한 것, 특별해질 때 ‘발견’
인문학적 소양 높으면 더 발달

창의력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매일 보는 꽃에서 감성을 찾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이처럼 모든 대상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늘 새로운 것임을 느끼는 것에서 창의력은 출발한다. 박웅현 TBWA KOREA 크리에이티브 대표는 10월 13일 조계종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2층 국제회의실에서 인문사회특강 ‘창의력은 어디서 오는가’를 강연했다. 박 대표는 “책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읽었으면 느껴야 하고 느꼈다면 내 인생을 바꿔야 한다”며 “책만이 정답이 아니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갈 때 진정한 인문학적 소양이 발휘되는 순간”이라고 강조했다. 정리=이계섭 수습기자

 

창의력의 시작은 ‘탈피’

오랜 시간 동안 광고 일을 해왔습니다. 올해로 28년째입니다. 괜찮은 평가를 받은 광고가 있었던 반면에 많은 실패작도 있었습니다. 광고 분야는 진입 장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라인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분야이고 척박한 분야입니다.

최근에 상황이 많이 악화 되었는데 그 이유는 요즘 TV를 많이 시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방송도 아니고 다운로드를 많이 받아 봅니다. 예전 같으면 TV나 신문광고를 많이 만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잘나가는 프로그램 시청률이 20%가 넘기 힘든 실정입니다. 예전에 방영됐던 드라마 ‘모래시계’ 시청률이 60%가 넘었었는데 그에 비하면 요즘 인기 드라마나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많이 미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업계에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여전히 난파하는 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매체에 따라 광고도 변해야 하는데, 특히 지하철 풍경을 볼 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쳐다보는 광경을 보며 ‘수구리족’이라고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새로운 현실의 측면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번 케이블 종편에 새로운 채널이 런칭하게 돼 짧은 광고 다큐를 만들게 됐습니다. 돈키호테를 모델로 삼아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데, 돈키호테는 엉뚱하면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인물입니다. 창의력과 돈키호테는 많은 면이 닮았습니다. 엉뚱한 상황과 말도 안 되는 일은 창의력이 가지는 독특함과 신선한 충격을 대변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제가 ‘창의력이 어디서 오는가’ 인데 솔직히 저는 창의력이 어디서 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창의력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3분 정도 다큐 12개를 준비하면서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모든 구성과 기획과 아이디어는 회의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창의력은 회의실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저희 회의실에 엄청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창의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리적 결합이 아닌 화학적 결합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별것 아닌 여러 의견이 모여 상호 화학작용을 일으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작업을 하다 보면 시작과 끝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광고 문구가 나오고 나서 “그런데 이거 누가 썼지?”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입니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창의력이라는 것은 회의실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닌 저마다의 경험과 체험에서 시작됩니다. 사소하게 지나쳤던 생각이나 상황이 특별한 아이디어가 되는 것은 어떤 새로운 의미 부여가 아닌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 라는 영화를 보면 노인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시인이 첫 시간에 빨간 사과 하나를 가지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과를 몇 번이나 보셨습니까? 백 번, 천 번, 만 번?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사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칠판에는 한자로 ‘詩(시)’라고 쓰여 있고 그 옆에 ‘본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시를 배운다는 것은 창의력을 배운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보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창의력이 그렇습니다. 별안간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 사소한 것이 특별하게 인지될 때 착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만든 문장 중에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문장인데 이처럼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대상은 더 이상 새롭지 못하게 됩니다. 아는 것이 진짜 아는 것인가 겉으로 아는 것인가 라는 고민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모른다 생각해야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대상을 새롭게 인지하는 것이 창의력의 시작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문(人文)의 생활화

인문에 대해 저는 강력히 주장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도서관에 있거나, 먼지가 끼어있거나, 상아탑에 있거나, 학자들에게만 있는 인문을 우리가 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생활의 인문입니다.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저는 그것이 내 삶을 바꿔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책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제가 다음 책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곳에 쓰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읽었으면 느끼고, 느꼈으면 행해라’입니다. 알았으면 행해야 합니다. 읽었으면 느껴야 하고 느꼈다면 내 인생을 바꿔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 번 제대로 책을 읽은 사람은 몇 천권을 겉핥기로 읽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인 스님이 쓰신 책에 등장하는 한 할머니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은 사람들이 못 배워서가 아니라 잘못 배워서다.’ 길이 책속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책만이 정답이 아니고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졌을 때 진정한 인문학적 소양이 발휘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문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느냐, 철학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결국에 인문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인문 훈련이 잘돼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했을 때 저는 문학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음악, 영화 등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사람들을 꼽습니다. 창의력이 어디서 오는지 그 사람들도 잘 모를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것을 보고 사람을 감동시키고 문장을 만들어내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발굴해 냅니다.

‘산수유는 그 흐릿한 색감 때문에 꽃보다는 꽃이 꾸는 꿈같다’. ‘벚꽃의 죽음은 풍장인데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그 순간이 벚꽃의 절정이다. 꽃잎 하나 져도 봄빛이 줄어드는데 수많은 꽃잎이 떨어지는 이 슬픔을 어이 견디리’.

각각 김훈과 두보의 문장입니다. 이들은 우리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잘돼 있다 보니 대상에서 새로움을 잡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가 늘 곁에 두고 있는 대상입니다. 벚꽃도 산수유도 우리가 수만 번도 넘게 본 사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후배들이 제게 어떻게 하면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지 물으면 저는 오늘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돼 묻습니다. 친구랑 수다를 떨겠다고 하면 그 수다 속에 창의력이 있을 것이고, 클럽에 간다고 하면 클럽 속에 창의력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어디에 있지 않고 거기에 있습니다.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창의력입니다. 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닌 우리 생활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이 말을 꼭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유레카는 수년간 흘린 땀의 결과

여러분과 함께 들을 음악 하나가 있는데 짐 리브스(jim reeves)의 ‘he'll have to go’란 곡입니다. 노래가사를 먼저 함께 보겠습니다.

예쁜 당신 입술을 전화기에 좀 더 가까이 붙여 주세요 / 우리 단둘이만 있는 것처럼요 / 난 종업원에게 음악 볼륨을 낮춰 달라고 말할게요 / 당신은 함께 있는 남자친구에게 말해주세요 / 그는 가야만 한다고 / 내게 속삭여 주세요 나를 진정 사랑하는지 말해주세요 / 아니면 내가 한 것처럼 그 남자친구가 놓아주지 않고 있나요 / 사랑은 맹목적이지만 마음을 정하세요 나는 알아야겠어요 / 내가 전화를 끊을까요? 아니면 당신 남자친구에게 말하렵니까? / 그는 가야만 한다고 / 당신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못할 것 같네요 / 당신이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동안은 / 당신은 나를 원하세요 예스나 노로 대답해주세요 / 사랑하는 당신 난 이해할게요

가사가 마음 아파서인지 요즘과 같은 가을날에 듣기 좋은 곡입니다. 내가 이해를 못 하는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인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 저는 노래를 듣고 느끼는 것이 더 인문적이라 느껴집니다. 또한 사람 사는 모습이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인문을 찾아서 굳이 어려운 책을 찾아봐야 하느냐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좋은 노래를 듣고 있으면 음악을 비롯한 모든 인문은 삶의 ‘프로포폴’ 같다고 생각합니다. 삶이 힘들 때 잠시라도 삶을 마비시켜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인문은 위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런 역할은 어려운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책을 쓰면서 ‘세상에 좋은 것은 많다, 볼 마음이 없을 뿐이다’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비슷한 의미로 황현산 선생님께서는 ‘맛있게 먹으려는 사람에게는 온 천지가 산해진미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마음이 먼저 가야 하는 부분을 강조하는 겁니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서도 감동하는 재능’이라 합니다. 모두가 먹는 자두를 보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시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창의력은 그렇습니다. 저는 천재를 믿지 않습니다. 천재를 지속적인 상태로 보지 않고 순간적인 상태로 보기 때문입니다. 순간 스쳐 가는 영감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는 것일 뿐입니다. 어느 팔순의 한 할머니가 한글을 깨우치고 노인정에서 시를 배우는 데 누군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시를 배우니 무엇이 가장 좋습니까” 했더니 할머니께서는 시를 쓰려고 하니 안 보이던 꽃이 보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이 아니셨으니, 꽃이라면 수만 번도 더 보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창의성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제대로 볼 수 있는지, 애정을 가지고 보고 있는지에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의성이라는 것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지만 아무 때나 오지 않습니다. 많은 땀을 흘리고 무언가를 간절히 생각하고 있을 때 생겨납니다. ‘유레카는 수년간 땀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쳤을 때 처음 목욕을 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 물이 처음 넘쳤던 것도 아닐 것입니다. 고민의 축이 서 있는 상태에서 물이 넘쳤을 겁니다. 뉴턴 또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어느 순간 사과가 떨어지면서 정리를 했다는 것은 이미 임계치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문은 삶을 대하는 자세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것이 삶에서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태도를 바꾸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 또한 인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문이라는 단어는 창의성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풍부하게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풍요롭게 존재하는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중요한 화두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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