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승가’ 연담 찬탄… 대흥사 교류로 전등계 맺어

17세에 화순 동림사서 학문 정진
연담 스님 만나 불교와 인연 쌓아
천주교리 관심 있었지만 교인 아냐
암행어사 시절 백성들의 현실 목도
토지 개혁을 위한 ‘田論’ 발표하기도
정조 승하 후 강진 유배, 새 삶 시작 

▲ 초의 선사가 그린 ‘다산 초당도’.〈개인 소장〉 정조의 승하 후 당파싸움에 밀린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를 온다. 다산은 유배의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찾아갔다. 그리고 초의 선사 등 대흥사 승려들과 교류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2500여 수가 넘는 시를 남겼다. 경세(經世)에 관심이 컸던 그가 피폐해진 정치, 사회,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안했는데 이는 그의 수많은 저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미했던 그가 7세의 어린 나이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고 있으니(小山蔽大山)/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라(遠近地不同)”라는 시를 지었는데 이를 본 그의 부친이 “분수(分數)에 밝으니 자라면 틀림없이 역법과 산수에 통달할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연천과 화순 현감을 지냈던 그의 부친은 바로 정재원(丁載遠)으로, 예천 군수와 진주 목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다산이 고승 연담 스님을 만난 것은 1778년 무렵이다. 1777년 가을에 화순현감으로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아내와 함께 화순으로 간 다산은 이듬해에 화순으로 온 둘째 형 약전과 동림사에서 학문에 정진한다. 당시 동림사에는 교학과 선에 밝았던 연담유일(1720~1799)이 머물며 수행하고 있었으니 현감이었던 그의 부친은 이미 연담과 알고 지낸 사이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기에 두 아들을 동림사에 보내 공부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는데 유생들 중에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절에 머물며 공부하는 이들이 많았다. 다산 또한 이를 위해 동림사에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연담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 셈이다.

그가 연담 스님을 위해(示有一) 지은 〈지리산승가(智異山僧歌)〉에는 연담의 수행자다운 풍모를 잘 드러냈다. 1778년경 연담 스님의 모습은 “백발의 스님은 검은 승복을 입고(有僧白毫垂緇幌)”있었다고 한다. 당시 연담은 58세의 노승이었기에 백발이 성성했다. 하지만 수행이 높았던 스님은 “솔잎에 멀건 죽으로 목을 축이고(松葉稀?或沾喉)/ 갈사(칡으로 만든 실)로 만든 방한모로 이마를 가렸(葛絲煖帽常覆?)”던 검소한 수행승이었다.

이미 그의 수행은 무주무상(無住無常)을 넘나든 경지였기에 “꽃이 피고 꽃이 져도 거들떠보지 않고(花開花落了不省)/ 오가는 구름처럼 한가할 뿐이라(雲來雲去只同閑)”라고 한 것은 아닐까.

17세의 어린 다산이 불교의 이런 경지를 읊었으니 그의 불교에 대한 박학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뿐 아니라 다산은 이미 연담 스님의 수행력을 간파한 것일까. 그러기에 그가 “내 들으니 설파가 선정에 들었다고 하는데(吾聞雪坡入禪定)/ 그 높은 발걸음이 여기에 숨어든 건 아닌가(無乃高?此逃匿)”라고 했을 것이다. 그가 말한 설파상언(雪坡尙彦1707~1791)은 연담의 스승으로 화엄에 밝았던 대흥사 승려이다. 후일 다산이 강진 유배시절에 만덕사 승려 아암혜장을 만난 것이나 대흥사의 승려들과 전등계를 맺게 된 인연은 이로부터 싹을 튼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 후기 성리학에 전도된 시류에서도 승려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불교 경전을 배척하지는 않았던 다산은 유학자이지만 불교를 가까이한 인물이다.

그는 1762년 6월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8대가 연이어 홍문관에 들어갔기에 ‘팔대옥당(八代玉堂)’이라 칭송된 명문가 집안이다. 그의 어머니는 해남 윤씨 집안으로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았던 흔적은 그의 오른쪽 눈썹 위에 남아 눈썹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고한다. 이로 인해 자호(自號)를 삼미자(三眉子)라고 하였다.

그가 증광감시(增廣監試)의 초시(初試)에 합격한 것은 1783년이다. 이듬해에 회시(會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다.

천주교와 관련된 집안의 내력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산의 형 약종과 그의 아들 철상이 신유박해(辛酉迫害1801년에 일어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사건) 때 순교했고,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그의 자형이다. ‘황사형 백서’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황사영이 바로 큰형의 사위이고 그에게 천주교 교리책을 전해 준 이벽은 큰형의 처남이었다.

실제 다산은 적극적으로 천주교를 신봉한 것은 아니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승하한 후 그의 삶을 질곡으로 빠뜨린 것은 천주교와 관련된 일이었다. 천주교 교리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힌 빌미였던 셈이다.

 

▲ 다산 정약용의 초상화〈김호석 作, 강진군 소장〉. 다산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다.

다산은 과거제도에 부정적이었지만 벼슬을 멀리하거나 산림에 은둔한 산림처사는 아니었다.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오르지 않고는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펼칠 수가 없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따라서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에 나아가 초계문신으로 임명되는 영광을 누렸고 정조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친상을 당한 후 잠시 벼슬을 사직하였다가 다시 관직에 나아갔을 때에는 그의 정치적인 입지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임금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지만 노론 벽파들의 정치공세로 어려움을 겪는다. 다산의 고뇌는 정치적 상황만큼이나 암담했다.

얼마 후 다시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연천 지방을 순행하는 암행어사로, 이 지역을 암행 순찰하던 그의 눈에 비친 현실은 피폐될 대로 피폐되었다. 이런 현실을 그린 시 ‘적성촌에서’는 암행어사 시절에 군포와 환곡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참담한 삶을 “구리 수저 이정에게 빼앗긴 지 오래인데(銅匙舊遭里正攘)/ 지금은 옆집 부자가 무쇠솥을 앗아 갔네(鐵鍋新被隣豪奪)”라고 하였다.

그리고 군포에 시달리던 백성의 어려움은 “큰 아이 다섯 살에 기병으로 등록되고(大兒五歲騎兵簽)/ 세 살 난 놈은 군적에 올라 있어(小兒三歲軍官括)/ 두 아들 세공으로 오백 푼을 물고 나니(兩兒歲貢錢五百)/ 빨리 죽기 바라는데 하물며 옷을 입히랴(願渠速死況衣褐)”라는 당시의 현실을 참담히 그렸다.

이런 실상은 다산의 마음에 각인된 듯하다. 후일 그가 사회제도를 개혁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목민심서〉나 〈흠흠신서〉, 〈경세유표〉 는 이런 배경에서 저술된 그의 노작(勞作)이다.

조선 후기 사회적인 참상은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들의 부패와 왕실의 무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제도의 개혁안을 낸 것이 〈전론(田論)〉이다. 다산은 〈전론(田論)〉에서 “제가 듣기에 토지에는 두 사람의 주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임금이고, 그 두 번째는 농사를 짓는 사람(臣嘗謂田有二主 其一王者也 其二佃夫也)”이라 하였다. 따라서 권력과 힘이 있는 지주들이 사사로이 거두어들이는 소작료는 부당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토지를 개혁하여 “힘쓴 것이 많은 사람은 양곡을 많이 얻고 힘쓴 것이 적은 자는 적게 얻는 사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는 그가 젊은 시절에 주장했던 ‘여전제(閭田制)’의 기본 골격이다. 실현 가능성이 적었던 이 개혁안은 훗날 ‘정전제(井田制)’로 수정 보완되었는데 이는 헐벗고 고생하는 백성을 위해 그의 충심(衷心, 정성스러운 마음)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다산은 수많은 시를 지었다. 그에 시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본받은 인물은 황상(黃裳)이다. 강진의 사의재 시절에 기른 아전 집안 출신 황상은 다산의 시격을 이은 제자로 칭송되었을 뿐 아니라 끝까지 사제의 의리를 지킨 인물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은 두 집안의 결연을 다지는 정황계(丁黃契)를 맺어 대대로 우의를 다지는 증표로 삼은 바가 있다.

다산이 강진에서 보낸 〈시양아(示兩兒)〉에는 다산의 시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낸다. 그 내용은 이렇다.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 군신, 부부의 도리에 있으며, 혹은 그 즐거운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더러는 원망하는 마음과 사모하는 정을 알리기도 한다. 그 다음에는 세상을 근심하고 백성을 긍휼히 여기며 항상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재물이 없는 사람을 구제하려고 이리저리 생각하고 안타까워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는 뜻이 있은 연후에 바야흐로 시를 짓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이해만을 따른다면 이는 시가 아니다(凡詩之本 在於父子君臣夫婦之倫 或宣揚其樂意 或導達其怨慕 其次憂世恤民 常有欲拯無力 欲?無財 彷徨惻傷 不忍遽捨之意 然後 方是詩也 若只管自己利害 便不是詩)

그가 말하는 시의 근본은 오륜에 있다. 이는 유가 철학의 사회 윤리에 기저(基底)이다. 다산이 말하는 시란 수양과 사회 윤리를 실천한 이후에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론은 공자께서 말한 충서(忠恕)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다.

 

▲ 다산 정약용 생가 전경. 〈박동춘 제공〉 다산은 7세에 시를 지을 정도로 영특했다고 전해진다.

더구나 사회 윤리의 실천은 선비가 도달할 목표이었다. 따라서 힘이 없거나 돈이 없어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고 이끌어 함께 누리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은 시를 짓는 목표인 것이다. 이는 유학에 충직했던 다산이 내린 시의 정의이며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시의 세계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포부는 정조의 승하 이후 그 빛을 잃었다. 그를 총애하고 신뢰했던 정조의 죽음은 다산의 삶 또한 암울해짐을 예단(豫斷)했던 사건이었다. 바로 노론 벽파는 남인 시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신유옥사(辛酉獄事)를 일으킨다. 이들은 사흉(四凶)과 팔적(八賊)을 제거한다는 명분 아래 정약전을 신지도로 유배 보냈고 다산을 경상도 장기로 유배시켰다. 이때가 1801년 2월이다. 장기에서 지은 ‘자신을 비웃으며(自笑)’은 자신을 되돌아보며 지은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와 인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매며(迷茫義路與仁居)

젊은 시절, 도를 구하려 다녔네(求道彷徨弱冠初)

망령되이 세상일을 모두 알고자하여(妄要盡知天下事)

이 세상에 책들을 다 읽으려 했네(遂思窮覽域中書)

맑은 때엔 활에 다친 새의 신세요(淸時苦作傷弓鳥)

남은 목숨, 그물에 걸린 고기라네(殘命仍成掛網魚)

천년 후에 나를 아는 자 있으려는지(千載有人知我否)

마음을 세운 일,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재주가 부족했네(立心非枉是材踈)

그가 찾아 헤맨 의로(義路)는 의(義)이고 인거(仁居)는 인(仁)이다. 인은 인간의 천성(天性)이다. 인을 토대로, 행신(行身: 자신의 처신)의 기준을 삼은 것이 의이다. 따라서 의는 준칙이며 사안(事案)을 보는 잣대이다. 약관의 나이에 세운 다산의 입지는 이와 같았다. 이랬던 그가 장기로 유배된 것은 활에 맞은 새처럼,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암울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인과 의를 찾아 헤맨 그의 태도는 선비의 기상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다산이 유배의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열었던 시기는 강진이었다.

“천년 후에 나를 아는 자 있으려는지(千載有人知我否)”라고 한 다산의 간절함은 결국 강진에서 토대를 놓게 된 셈이다. 실로 강진은 다산의 생애를 빛낸 인연들을 만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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