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니 그대로 그냥 비었다!

 

▲ 그림 최주현

이 세상만사, 돌 하나 풀 한 포기도 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몸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어찌 내가 했다고 하며 내가 잘한다고 하며 내가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르침의 요체가 무엇인지요?

질문 이 길 저 길을 헤매다가 이 마음법이야말로 최상승의 공부이고 개인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일체와 둘 아닌 대장부가 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큰스님 가르침의 요체가 무엇인지요?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큰스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제 삶 속에서 실현해 나갈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답변 우리가 공부하고 가는 거는 다른 게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 몸속에 있는 자생 중생들을 제도를 하려면, 거기서 악업도 나오고 선업도 나오고, 잘못하는 일도 나오고 강도짓도 나오고, 선행도 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작용이 거기서 다 나오는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만이 해결을 할 수 있다.’ 하고 믿고 거기다가 다 놓는 것입니다. 병에 걸려도 ‘너만이 네 몸을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갈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질 때 비로소 몸이 건강해질 뿐만 아니라 몸뚱이 속에서는 내면의 모두가 작용을 해 줍니다.

즉 말하자면 인간이 ‘내 뿌리인 바로 내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줄 수 있다.’ 하고 생각을 했을 때 바로 마음으로부터 대뇌를 통해서 소뇌를 통해서 중뇌에서 결정을 지어서 사대로 통신이 됩니다. 사대로 통신이 되면 사대에서 통신을 받고 다 작용을 해 줍니다. 안에서는 그렇게 작용을 해 주고 또 바깥으로는 세포의 생명들이 화해서, 이 지구에서 레이더망으로 역할을 하는 거와 같이 혹성과 같은 내 몸의 모든 세포에서 작용을 해 줍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의식들이 전부 나가서 마음을 조정하고, 들고 남이 없이 들고 나면서 내 가정을 조절하고 또 사회를 잘 조절합니다. 이렇게 잘 이끌어 나가는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세포입니다. 이 세포가 바깥에서 세균성이 들어오는 것도 막습니다. 이것도 내 마음에서 벌써 입력을 해 놔야 됩니다. 내 마음에서 내면으로다 입력이 항상 돼야 되는데, 1년을 해 놓든지 2년을 해 놓든지 그건 자기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입력을 해 놓으면 거기에서는 세균성을 막고, 또 들일 건 들이고 내보낼 건 내보내고, 체로 치는 역할을 합니다. 통신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잘 파악해서 들이고 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통신하고 조달을 하는 것이 이 세포의 모든 소임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 마음 도리에서 ‘하나’를 안다면 ‘하나’로 돌아가는 걸 알고, ‘하나’로 돌아가는 걸 안다면 바로 너 나 없이 전체가 같이 돌아간다는 걸 알 겁니다. 이 내면으로 이렇게 많은 생명들이 있는데 그게 누구라고 보십니까. 여러분이 아닐까요? 여러분 한 몸뚱이 속에 수많은 생명들이 들어 있는데 내가 밥 한 그릇을 먹는다면 혼자 먹는 것입니까, 그게? 혼자 듣는 것입니까, 혼자 보는 것입니까? 혼자 하는 것입니까, 혼자 사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혼자 하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했단 말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내 몸뚱이 속에 그 많은 생명의 의식들이 바로 더불어 나인 고로 내가 혼자 나라고 세울 게 하나도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다가 외부적으로도 나를 세울 게 하나도 없어요. 이 세상만사, 돌 하나 풀 한 포기도 내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생명 아닌 게 하나도 없고 내 몸 아닌 게 하나도 없으니 어찌 내가 했다고 하며 내가 잘한다고 하며 내가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공이 색이요 색이 공이니라. 내가 한 말이 하나도 없고 내가 생각한 것조차도 없느니라. 나의 고깃덩어리를 믿지 마라. 나를 따르되 나를 믿지 말고, 너부터 믿어서 너부터 알면 바로 과거의 부(父)를 현재의 자(子)가 상봉케 되느니라. 상봉케 된다면 바로 너를 지도할 수 있는 자성 부처가 바로 너를 이끌어 갈 수 있으며 서로서로의 마음과 마음으로 전달이 되면서 점검을 하면서 일체 모든 만물을 보고 깨달을 수 있고…. 병풍 둘러치듯 둘러친 이 세상이 팔만대장경에 속하느니라. 너만 못한 게 하나도 없으며 너만큼 또 잘난 것도 하나도 없느니라.” 하셨던 겁니다.

이 모두를 우리가 잘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 자체가, 내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 부딪친다는 것을 알고 상대를 탓하지 말고 상대를 원망하지 말고 상대를 증오하지 말고, 가정에서도 그렇고 마음에다가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저 사람의 주인공이나 내 주인공이나, 저 사람의 생명이나 내 생명이나 둘이 아니니 바로 내가 나왔기 때문에 나한테 부딪치는 거니까 모든 것을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믿어야 합니다.

꿈이란 망상이 아닌지

질문 잠들었을 때 꿈을 자주 꾼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꿈이란 망상의 일종일 터인데, 그렇다면 꿈을 안 꾼다는 사람은 잠자는 동안 번뇌 망상을 쉬고 순수한 마음자리에 드는 것인지요?

답변 그게 아닙니다. 내가 그전에도 얘기했죠. 어떤 사람이 꿈을 꿨는데 소쿠리를 하나 주웠다고 어느 노승한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어휴, 너는 초대를 받아서 오늘 음식을 잘 먹겠다.”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 소리를 듣고 야비하게, 또 딴 젊은이가 꿈도 꾸지 않았으면서 ‘내가 또 소쿠리를 하나 얻었다고 해 보자, 어떻게 나오나?’ 그러고는 “저도 엊그저께 친구가 꿈꾼 것처럼 꿈속에서 소쿠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하시는 그 말씀이 “아휴, 너는 오늘 저녁에 매를 죽도록 맞겠구나.” 이랬답니다. 그랬는데 아, 그날 저녁에 정말 친구들하고 놀러 갔다가 그냥 매를 직사하게 맞았답니다. 그래서 가만 생각하니까 분해서 죽겠거든요. 꿈도 안 꿨는데 왜 이렇게 맞느냐 이거죠, 이제.

그러고는 가서 항의를 했죠. “나는 꿈도 안 꾸고 그냥 그렇게 얘기했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맞습니까?” “얘야, 네가 그렇게 말을 하겠다고 생각을 한 게 꿈이니라. 생시나 꿈이나 다 꿈이니라. 그러니까 생시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꿈이니까 꿈을 잘 꿔야 될 것 아니냐. 그렇게 야비하게 꿈을 꾸면 어떡하느냐. 그리고 밤중에 자다가 꿈을 꾼 것도 그 꿈을 잘 해석을 해서 잘 굴리면 아주 흥감하는 수가 있을 텐데, 아주 이건 나쁜 꿈이라고 지적을 해 놓기 때문에 나쁘게 돌아가느니라. 그러니 이 세상만사가 돌아가는 게 다 꿈으로 돌아가느니라. 그러니 자도 꿈이요, 생시도 꿈이요, 모두가 꿈으로 돌아가느니라.” 이러더라는 거죠. 어떻습니까?

『반야심경』의 공(空)에 대해서

질문 『반야심경』에 보면 ‘빌 공(空)’자와 ‘없을 무(無)’자가 많이 나오는데 특히 이 공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불교 사전에 보면 ‘진공묘유 진여실상’ 등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풀이하신 『뜻으로 푼 반야심경』에는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물질과 마음이 다르지 않고 마음은 모든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나니’ 하여 공을 마음으로 풀이하셨습니다. 그리고 법문집에 ‘모든 것이 다 공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공에다 다 맡겨라.’ 하고 자주 거론하셨습니다. 이 기회에 다시 한 번 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우리가 공이라 하면 용무(用無)를 말하죠, 용무! 우리가 그냥 자연스럽게 움죽거린다. 그런데 우리가 그대로, 여기가 그대로, 지금 공이라는 자체 그대로입니다.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가니 그대로 그냥 비었단 얘깁니다. 얘기해 드렸죠? 한 가정으로 친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됐을 때 나라고 하겠느냐, 남편이 됐을 때 나라고 하겠느냐.’ 이랬으니 그거는 어떤 거라고 말할 수 없으면서 그대로 용무가 되죠. 그냥 그대로죠. 그래서 아마 여래라고 이름을 붙여 놓은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대로 여래 속에서 여래의 행동을 하면서, 법이 그냥 그대로 용이면서 무다 이겁니다. 이 모두가 다 그냥 비었습니다. ‘비었습니다’ 이러면 빈 줄로만 알지 마시고 ‘꽉 찼다’ 이러더라도 꽉 찬 줄로만 알지 마세요.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구에 에너지가 다 없어진다면 무엇으로 살 것인가? 그런데 이 허공에 생명들이 꽉 찼느니라.” 했습니다. 생명이 꽉 찬 데는 에너지도 꽉 찼단 얘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용무를 그대로 알아서 진실하게 함이 없이 할 줄 안다면 에너지를 얼마든지 끌어 쓸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왜 못한다고만 생각하십니까? 왜 우리는 중생이기 때문에 죄가 많다고 생각을 하시고 우리는 왜 못한다고만 생각하십니까? 그 생각이 문제입니다. 생각이요! 해골을 놓고도 그 해골과 자기와 둘이 아닐 때 비로소 자기를 아는 겁니다.

옛날에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묘지가 두 개가 있는데 ‘너, 저기에 묘지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아비 거고 하나는 자식 거니라. 그런데 양쪽에 구멍이 뚫렸느니라. 그런데 아비가 자식한테로 가면 자식으로 하나가 되고, 자식이 아비한테로 가면 아비로 하나가 되니 그건 무슨 연고인가?’ 하고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때에 스물 몇 살인데 말입니다. 알 게 뭡니까? 가만히 생각을 하는데 아, 발이 떼어 놓아져야죠. 그래서 3일을 그냥 그것 때문에 앉아 있었어요. 그러다가 ‘아하!’ 이럭하고선 일어났죠.

생각을 해 보세요. 영에다 영을 넣어도 둘이 아니요, 이쪽 영을 이쪽에다 넣어도 둘이 아니요, 만 불을 하나에다 넣어도 둘이 아니요. 이랬으니 어찌 공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 안 하셨겠습니까? 이 묘한 법을 말입니다.

부처님이 한 분인 이유

질문 처음 한마음선원에 오게 되면 다른 사찰과는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눈에 띕니다. 우선 법당부터가 불상 한 분만 모셔져 있고 장엄물이 적습니다. 또 관음재일이니 지장재일이니 하는 기도나 금강경 강의나 다른 경전 강의 하는 것도 못 봤고 오직 한마음 주인공을 관하라고만 하십니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답변 만약에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아버지가 둘 셋이라면 그거 참 골치 아프겠지요? 어머니가 둘 셋이라도 골치 아픈 일인데 아버지가 둘 셋이라면 얼마나 골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은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이 바로 하나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만사가 하나로 돌아갑니다. 삼천대천세계 우주 삼라만상이 전부 하나로 돌아가며 그 하나마저도 공했다 했습니다. 얼마 전에도 ‘내가 나라고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 내면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하나도 내세울 게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내면으로도 나 아님이 없고 외부적으로도 나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왜? 보십시오. 어떤 회사를 경영하는 데도 직원이 없으면 사장이 없을 것이고 사장이 없으면 직원이 없을 것입니다. 직원과 사장이 어떻게 둘입니까? 네? 이게 없어도 아니 되고 저게 없어도 아니 되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생명이 없어도 아니 되고 마음 내는 게 없어도 아니 되고 육신이 없어도 아니 됩니다. 마음 내는 게 없으면 목석이고 생명이 없으면 무효고, 육신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또 손가락 하나도 없어서는 아니 되는 거죠.

그래서 모두가 아주 쉽게 인식하고 가게 만들려면 아버지 하나면 족합니다. 아버지 하나면 족하듯이 바로 부처님은 하나지 둘이 아닙니다. 수천수만 분이 깨쳤다 하더라도 평등공법 봉, 봉에 같이 모든 마음이 한마음이 돼서 주둔하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따로 부처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높고 낮음이 없이 한마음으로 공생·공용·공체·공식화 하고 돌아가고 평등하다는 그 뜻으로 바로 여래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몸 한 체 한 체가 여래의 집입니다. 바로 이 속에 있는 모든 자생 중생들이 화하게 되면, 바로 제도가 되면 그 여래 집 안의 여래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나 아님이 하나도 없으니까 깨치면 그냥 여래지요, 여래의 집이고요. 그리고 또 외부로 따진다면 따로따로 돌아가는 게 하나도 없어요. 같이같이 맞물려서 모두가 같이 돌아가지요. 생각을 해 보세요. 세상을 내다보세요. 하나라도 혼자 살 수 있는 세계인가. 독불장군으로 혼자 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북하면 무시무종이라고 했겠습니까.

사람 몸 받기 어렵다고 하는데

질문 『대열반경』이라는 책을 보다가 “세간(世間)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부처님 세상을 만나기 더욱 어려우니, 마치 망망대해 가운데에서 눈 먼 거북이 나무 구멍 만난 것 같구나.”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큰스님, 진짜로 사람 몸 받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요? 그냥 부처님 법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씀이 아니신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답변 그럼 먼저, 사람 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그 사실에 대해 말씀드리죠. 저도 봤습니다만 어느 사찰에서 있었던 일이죠. 그 도량에서는 시식을 지내거나 하면, 항상 그 넓은 돌 위에 밥도 덜어다 놓고 과일도 덜어다 놓고 그럽니다. 그럼 그 돌 밑에서 나와서 먹기도 하고 날아와서 먹기도 하고 그러죠. 그래서 꼭 그 생명들을 위해서 갖다가 놓죠.

그런데 큰 구렁이가 돌 밑에서 그걸 받아먹으면서 한 2년 남짓 살다 보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모두 보면서, 우리가 지금 부처님 찾는 거나 똑같이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나와서 먼 산을 보고 있는데, 그 돌 밑에서 구렁이가 나와서 하는 소리가 “스님처럼 저도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거는 도승들이나 듣지 보통 사람은 못 듣죠. 그러니까 “될 수도 있지만 그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 넘기겠느냐?” 그러니까 “죽더라도, 죽더라도 꼭 그렇게 해 보고 싶습니다.” 했답니다. 간략하게 그냥 얘기하죠.

그러니까 이 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의 동료…”, 즉 말하자면 뱀의 도반이라고 할까요, “… 3백 명을 꼭 교화를 시켜서 이 도리를 가르쳐 줄 뿐만 아니라 항상, 법당에서 스님이 법을 설하시거나 또는 예불을 올리시거나 할 때 그분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고 들을 수 있겠느냐? 셋째는 네가 3년 동안 이슬만 받아먹고 살 수 있겠느냐?” 하셨더랍니다. 그러니까 “그거보다 더한 거라도 하겠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뱀은 주는 것도 그때서부터는 못 먹고, 나와서 항상 이슬만 받아먹고 들어가고 들어가고, 그러면서 자기 동료들을 교화시키려고 애를 쓰고 그랬죠. 그리고 끄트머리에 가서는 “한 가지 또 있느니라.” 하면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장독에 가서 장을 얻어먹을 수 있어야만 된다. 사람이 먹는 장 방울을 얻어먹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항아리를 넘어 들어가서 먹는 게 아니다. 장을 뜨러 왔을 때에 떨어지는 방울을 먹어야 마지막에 인간으로 환토할 수 있느니라.” 했단 말입니다.

그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스님이 말씀하신 거를 새겨 본다면 우리가 노력 안 하고 그 뜻을 배울 수는 없다는 것이니까요. 또 노력하지 않고 차원이 높아질 수도 없고, 노력 안 하고서 내가 스스로 여여하게 살 수는 없으니까요. 모두가 다 그렇죠. 그런데 그 구렁이는 그걸 이겨 냈답니다. 이겨 내서 거길 떠나지 않고 공양주 스님이 간장을 뜨면서 떨어뜨린 거를, 그걸 그냥 기다리려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거를 받아먹고, 또 한 번 받아먹고, 또 한 번 받아먹고 세 번을 받아먹는 데 3, 4년이 넘게 걸렸단 얘깁니다. 그러니 얼마나 깊은 의지와 깊은 뜻이 거기 서려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구렁이는 뼈다귀만 남아 가지고, 너무나 애절하게 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벗고 인간으로 환생을 하는데, 그 스님이 인도를 했답니다. 자손 없는 집으로 인도를 했죠. 그거는 부처님의 일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는 모두 황당하게 들릴지 몰라도 부처님의 연기법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잘 자라서 어른이 돼서 지금 부지런히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모습 하나 벗기가 그렇게 어렵단 말입니다. 토끼라면 토끼 모습을 벗기가 어렵고, 새라면 새 모습을 벗기가 어렵고, 또 개라면 개 모습 벗기가 어렵고, 소라면 소 모습 벗기가 어려운데, 부처님 경지에 이르러야만이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돼 가지고도 99%는 자기 자신부터 알아야 된다는 거죠.

예전부터 그렇게 얘기했죠. 육조(六祖) 스님이 오조(五祖) 스님한테 대답하기를 “내 불성이 있는 줄 어찌 알았으리까.” 했단 말입니다, 내 불성이. 각자 모든 사람들에게 불성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 불성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냥 여여하게 살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두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여여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들이고 내고 하는 생활 자체가, 그대로 만법을 들이고 낼 수 있는 불성 자체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만법을 스스로 들이고 내고 할 수 있게끔 되는 것이죠.

이것을 아마 말로 해서는 실감이 영 안될 겁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지만 사람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지금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현재 누구에게나 다 물질과학이 50%로 등장하고 있죠. 그런데 정신과학이라는 걸 거기다 벌충해서 100%를 만들어서 굴리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우리가 살기가 그렇게 힘들고 어려워지고 오래 걸리고 이러는 원인이 정신계를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물질계를 다 알아 가지고 이제 정신계로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거기까지 알아야 되니까요. 이게 물질계 속에서 ‘정신계는 물질계를 리드하는구나.’ 하는 거를 알아야 빠른데,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뿌리를 무시하고 그냥 싹이 산다고만 생각을 하고 가니까 이건 50%의 물질계만 알면서 수없는 광년을 그냥 허송세월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정신계로 들어서도 또 50% 정신계에서의 수없는 광년이 지나야 할 테니까 말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내가 말하는 거를 어떻게 들을지 몰라도 나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불쌍한 마음이 그지없을 때가 많습니다. 불쌍하다고 어떻게 말로 다 하리까, 이거를. 세상에 사람 사는 것도, 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느냐는 거죠. 그건 무(無)의 세계로 인해서 유(有)의 세계가 돼야 하는데, 무의 세계는 저버리고 유의 세계 속에서만 사니까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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