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 스님 (태고종 원로위원·금붕사 주지)

수암 스님은 … 1959년 사라사서 이성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1959년 사라사서 방동화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 1975년 서울 신촌 봉원사서 묵담 스님을 전계사로 대승계를 수지한다. 1980년 선암사 승가대학을 4년 수료했으며, 1994년 원광대학원 동양종교학과서 불교학을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에는 태고종 제주교구 종무원장과 제주불교총연합회 회장에 취임했다. 1999년 제주대 철학과 및 중어중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2000년에는 제주대 대학원 중어중문과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0년에는 한라불교신문(현 제주불교신문) 발행인에, 2002년에는 태고종 중앙교육원장, 2004년에는 태고종 동방불교대학 부학장 등에 취임했다. 2006년에는 제주대학원 중어중문과서 박사학위를, 2014년에는 중앙승가대학원 서 역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한국불교 태고종 원로위원 , 중앙강원 대교과 강주, 태고제주강원 강사와 금붕사 주지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수행자와 중문학자가 함께 풀이한 금강경〉 〈무문관〉 등이 있다.

공부해야 불교 포교할 수 있다
1999년 제주도내 최초 불교대학 설립
올해까지 37기 배출… 졸업생 2천여명
복지불사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
태고복지재단, ‘제주태고원’개원 산파
태고종 복지사업기틀… 타지방 모델

‘배우니까 청춘이다’. 이는 평생 공부 열심히 하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수 70세를 훌쩍 넘긴 초로에도 공부에 대한 열정만큼은 젊은이들 못지 않은 스님이 있다. 바로 태고종 원로위원이자 제주 금붕사 주지인 수암 스님이다. 그는 끊임없는 자신의 향학열을 출재가 불교 교육으로 회향하며, 수행 방편으로 삼아온 수암 스님(태고종 원로위원·금붕사 주지)이 그런 인물이다. 스님에게 공부는 평생 화두였다. 제주대 중문과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도 스님은 종단은 다르지만 지난 2008년 중앙승가대 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해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박사 학위를 받았다.

태고종의 대표적 학승으로 꼽히는 수암 스님은 “공부는 내 평생의 업이자 수행 방편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 자체에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 언제나 즐겁습니다.”

스님이 이렇듯 학승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것은 집안 내력과도 연관이 있다. 1926년 10월 화주 김대승각 스님과 도감 이성봉 스님이 초가 법당을 세우면서 금붕사는 ‘화엄사 제주포교소’로 허가를 받는다. 김대승각 스님은 수암 스님의 증조할머니고, 이성봉 스님은 외할머니다. 특히 이성봉 스님은 제주지역에 정법을 바로 알릴 교육기관이 없음을 안타까워했으며, 민간신앙과의 융화로 변색된 제주불교의 본 모습을 찾는 일이 급선무라고 판단해 불교의 근본 정신을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1932년 최청산 스님을 강사로 모시고 제주도내서 처음으로 승려교육을 실시한다. 당시 승려 교육에는 많은 도내 학인 스님들이 참석했다고 전해진다.

“선대 어른들이 절을 창건하시면서 교육에 힘써온 정신을 이어받아 공부하는 사찰 가풍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배워서 불교를 알아야 남에게 포교를 할 수 있는 법이죠. 자신이 모르는데 누굴 포교합니까? 공부하지 않고 전법에 힘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셈이죠.”

왜곡된 불교 풍토와 일재 잔재 청산에 노력한 이성봉 스님은 제주도민들의 최대상처인 4.3 사건 당시인 1948년 토벌대에 의해 총살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 아픔을 딛고 다시 수암 스님의 이모인 법인 스님이 법맥을 이었다.

1940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출신인 수암 스님은 아버지를 따라 전남 여수로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1961년 금붕사서 행자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된다. 1964년 군대 제대 후, 1965년 금붕사 감원과 1973년 금붕사 주지로 취임한다. 20여 년 동안 사찰의 안정과 신도 포교에 진력하며 금붕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스님은 속세 나이 40대 중반에 들어서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린다. 신도들을 올바른 불법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늦은 나이지만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1986년 순천 선암사 강원의 문을 두드린다.
“공부라는 놈이란 참, 녹녹치 않더군요. 만학에 뛰어들다 보니 어려움이 많더군요. 보따리를 싸고 싶을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공부한 내용이 이해 되지 않으면 그때만큼 속상할 때가 없었죠. 늦게 시작한 만큼 젊은 도반들이 쉴 때도 참고 견디면서 공부 했습니다. 수없이 찾아오는 수마(睡魔)와 번뇌, 쉼의 유혹을 물리치며 원을 세워 공부 삼매에 빠져 정진했습니다.”

제주대서 일반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양과목 강의중인 수암 스님.
공부하다 힘들면 수암 스님은 태고종 종정을 역임한 묵담 스님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큰 스님은 수암 스님이 왜 자신을 찾았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곤 “경전 속에 모든 것이 담겨있으니, 강사 스님을 부처님으로 모시고 공부에 열중하라”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큰 스님께서는 논밭사서 불사하려고만 애쓰지 말고 공부해서 전법에 열중하면 그게 바로 중생 불사라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경책을 내리셨습니다. 그게 오늘날 저를 학승으로 이끌어준 셈이죠.”
이후 수암 스님은 졸업하기 어렵다는 제주방송통신대학(중어중문학과)을 4년 만에 졸업하고 1994년 원광대 동양종교학과에 입학해 ‘불교학’을 전공한다. 여기서는 ‘대승기신론’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숱한 고비를 넘기면서 불이 붙은 수암 스님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쉽게 사그러 들지 않았다. 다시 2000년에 제주대 중어중문학과서 ‘불전 어음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는다.

이에 앞서 수암 스님은 1998년 제주대 일반 학생을 대상으로 교양과목인 ‘한자의 이해’ 강의를 제안 받고 강의에 매진했다. “처음 제가 강의실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신기한 듯 위·아래로 시선을 계속 옮기더군요. 삭발염의하고 승복 입은 교수가 일반 학생들을 지도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호기심을 유발시켰던 것 같아요. 수행자로 오히려 더욱더 매사 행동에 조심하며 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후학 양성에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수암 스님은 일상 생활에 자리잡은 불교 용어에 대한 설명을 많이 전했다. 강의는 너무 지루하지 않게 간단한 퀴즈와 농담을 섞어가며 재미있게 진행했다. 효과는 빨랐다. 200여 학생들이 스님 강의를 신청 하는 등 학생들 사이에선 금방 입소문이 퍼졌다.

“강의하다 많은 젊은이들이 의외로 불교를 잘 모른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래서 불교용어와 연계하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 한자를 중심으로 가르치다 보니 학생들의 관심도가 높아졌습니다. 항상 ‘걸어다니는 포교사’라는 마음가짐으로 불교적 테두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오히려 종교와 상관없이 수강생들이 점차 늘어나더군요. 그만큼 우리 불교가 한국인들의 정서와 사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수암 스님은 5년의 교양강의에 이어 본격적으로 중어중문학과 전공과목인 ‘한문과 고사성어’도 가르쳤다. 철저히 불교식 교육 방법을 고집했다. 우선 공부시작 전 죽비로 시작을 알리며, 5분 동안 학생들의 ‘마음챙김’ 시간을 가졌다. 강의 커리큘럼도 〈초발심자경문〉 〈치문〉 〈부모은중경〉 등의 경전 가운데 좋은 글을 가려 뽑아서 학생들에게 가리켰다. 마음공부와 겸한 스님의 독특한 수업 방식 때문인지 강의 요청도 잇달았다.

제주대 철학과에서도 ‘불교철학·인도철학’ 관련 강의를 제안해 10년 동안 꾸준히 강의했다. 제주대 학생들 사이에선 스님의 명성을 모르는 학생들이 없을 정도로 스님의 강의 그 자체가 바로 전법이요 포교활동이 된 셈이다.

강의뿐만이 아니라, 여름·겨울방학 때마다 스님이 주지로 있는 금붕사서 템플스테이를 개최해 대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불교문화에 스며들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바쁜 틈틈이 짬을 내 저술 활동도 했다. 지난 2003년부터 1년 여 동안 제주불교신문에 연재한 ‘금강경 강의’를 바탕으로 제주대 중문과 안재철 교수와 함께 문법풀이를 수록한 〈금강경〉을 펴내기도 했다. 이어 2007년 2월에는 중국선종 사상 최고의 저술로 추앙받고 있는 〈경덕전등록〉에 수록된 게송의 시가형식과 선사상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수암문도회의 모습.
이외에도 스님은 또한 탁월한 행정 개혁가였다. 태고종 제주교구 종무원장을 지난 1998년부터 2001년까지 4년 동안 역임하면서 종단 발전의 획기적인 인프라를 구축했다.

당시 타 종교서 우후죽순으로 노인복지사업에 심혈을 기울일 무렵이지만 태고종단의 복지사업은 수암 스님이 종무원장을 맡을 이전까지만 해도 전무했다. “그 당시만 해도 태고종이라면 조계종단의 ‘아류’란 인식 때문에 복지사업권을 따내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그래서 종단행사인 ‘방생법회’ 등에 대규모 신도들의 동참을 유도하고, 기관단체장을 초대하면서 태고종단의 대외적 위상을 제고하려고 했습니다. 그 전략이 맞아 떨어졌지요.”

하지만 문제는 종단내부에서 불거졌다. 종단 스님들이 “우리가 할 수 있겠냐”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어서 반대가 심했던 것이다. 결국 수암 스님은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태고종단 스님들을 대상으로 좌담회를 개최하는 한편 제주 도지사와의 간담회도 마련해 복지사업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자 종단 스님들이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수암 스님의 끈질긴 노력 덕택에 결국 태고종단서 2억 원을 들여 토지(현 제주태고원 부지)를 매입해 (사)태고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이는 이후 2005년 1월 노인요양복지시설인 ‘제주태고원’ 개원에 산파역할을 하게 된다. 이어 2007년에는 미타요양원이, 2010년에는 제주도노인복지관 위탁운영 등 태고종단 복지사업의 기틀을 마련했고, 이는 타지방 태고종 복지사업의 모델이 됐다.

“100세 시대를 맞은 우리나라에서 복지사업은 불교가 앞장서서 펼쳐야 할 분야로 생각해 강력하게 밀어 부쳤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자비심입니다. 늙고 병든 노인들과 아픈 중생들을 위해 그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병원과 쉼터를 마련하는 것은 우리 불교가 반드시 해야할 시대적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암 스님은 복지 뿐 아니라 학승답게 재가불자의 교육에도 힘썼다. 타 지방에 불교대학이 점차 우후죽순 생겨날 무렵 제주도에도 불교대학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느꼈다.

수암 스님은 불교교양대학을 통해 ‘참 불자’를 양성하는 것이 한국불교를 발전시키는 지름길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스님은 지금 당장이 아닌 먼 미래를 항상 바라보며 불교대학 건립에 진력했다.

수암 스님의 원력에 이어 지난 1999년 9월 개교한 도내 최초인 제주불교대학은 1기부터 2015년 7월 배출한 37기까지 졸업생 수만도 2천여 명을 넘을 정도로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제주불교계 뿐만 아니라 제주사회에 널리 퍼져 포교 역량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또한 졸업생들이 주축이 돼 그 당시 창립한 봉사단체인 ‘태고보현봉사단’, 신행단체인 ‘태고법륜불자회’, 합창단인 ‘태고만다라합창단’ 그리고 제주불교대학 총동창회 산하 제주불교대학산악회 등은 태고종 제주교구를 떠받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며 포교 일선에서 신행활동에 여념이 없다.

“교양 대학이지만 학사관리 부터 철저히 했습니다. 처음에는 며칠째 나오지 않는 학생들은 특별 관리하며 일일이 독려전화를 거는 등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졸업 시킨 게 33명이었지요. 하지만 불교대학은 2000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90명 정원으로 한정했지만, 수 개월 동안 기다려야 입학 가능할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죠. 졸업생들이 신행단체로 연계되면서 제주교구의 뿌리는 더욱 튼실해졌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수암 스님(맨앞줄 왼쪽서 네번째)이 제주불교대학 36기 재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불교대학의 파장은 재가불자 이외에도 종단 스님들에게도 퍼졌다. 불교대학 강사로 나섰던 스님들부터 팔을 걷어 부치고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순식간에 면학분위기가 종단 내부에 조성이 된 것이다. 종단 스님들은 동국대·동방대 등 종립학교에 입학하는 등 학구열기가 높아졌다. 재가불자와 더불어 교육열기가 동반상승 효과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됐다.

이런 공로로 스님은 점차 태고종단 중앙서도 명실상부한 학승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동안 결국 스님이 공부에 전념한 귀결점이자 회향은 태고종단의 인재양성이었다. 수암 스님은 지난 2002년 태고종 중앙교육원장과 2004년 태고종립 동방불교대학 부학장 소임을 맡으면서 10년 동안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고된 일정 속에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강의비를 모아 동방불교대학 후학들의 장학금으로 쾌척하기도 했다.
하지만 태고종단의 정치적 상황과 내홍속에 희생된 동방불교대학의 실태는 자신의 살을 도려내야하는 아픔과 같았다고 수암 스님은 회고한다.

“교육이 없으면 우리 태고종의 미래도 없습니다. 1988년 금붕사서 백양사와 선암사 강주를 역임한 서병제 강백을 초청, ‘제주교육원’을 설립해 3~4년 동안 도내 스님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했습니다. 당시 공부 했던 스님들이 저를 비롯해 수열, 진주, 수철 스님 등 제주불교계에 향학열을 지피는 기둥이 됐으며, 태고종 제주교구가 타 지방보다 모범적 신행활동을 많이 펼치며 교세를 확장한 것도 바로 교육에서 시작됐다고 봅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제주교육원’은 지난 2014년 1월 ‘태고제주강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올바른 승가사상을 구현하고 불교의 고유전통에 입각한 승가전문강원이자 도내 유일의 강원 이다. 수암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은 태고종 제주교구 종무원장 탄해 스님도 강원을 30여 년 만에 재개원한 것은 제주교구만이라도 제주불교를 책임질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배움에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보인 수암 스님은 그동안 석사학위 2개, 박사학위 1개를 취득했지만, 2014년 1월 다시 중앙승가대학 대학원 ‘불전 한어의 복음절사와 문법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박사 학위를 또 하나 취득했다. 이어 수암 스님은 제주대 중문과 안재철 교수와 함께 무문 혜개 선사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번역한 ‘무문관’도 펴냈다.

수암 스님은 마지막으로 “역경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다른 언어로 바뀌는 것으로 이 번역과정을 통해 새로운 글자가 사용됐고 문법형식이나 수사법 등이 침투돼 언어학적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중국 언어가 사장되는 것이 안타까워 해석 연구한 것이 논문 주제입니다. 중국 언어의 역사를 완성하고 불교라는 종교의 문화적 전이과정을 파악한 것이지요.”라고 최근 취득한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 설명했다.

노송 주위에는 그 향기며 자태를 그대로 빼닮은 또 다른 노송들이 즐비하듯 수암 스님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앞으로도 계속 마르지 않고 불자들에게 귀감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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