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는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191.4km, 북한의 황해도 장연군과는 17km 떨어져 있으며 해발은 184m에 총인구는 5천 5백여 명, 면적은 51.086㎢, 농업 60%, 어업 15%, 기타 25%, 초등학교 2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 교회 13곳, 성당 1곳 (공회소 12곳), 그리고 서해 5도의 유일한 사찰 몽운사, 이것이 서해 최북단 섬이라고 불리워지는 백령도의 기본 현황이다.

부처님은 2600년 전 깨달음을 이루신 후, 전도선언에서 전법을 떠나기를 당부하였다. 이후 이러한 불법의 인연은 천 년의 세월을 넘어 한반도에까지 이르렀고 대한민국 불교역사가 이어져 왔다. 하지만 백령도는 어찌된 일인지 있던 절조차 폐사 되고 200여 년 전부터는 아예 불연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던 차 백령도 군법당 방문이 인연 계기가 되어 2002년 11월 15일, 백령도에 가람 창건을 위한 불사 원력의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사찰이 없으니 신도 또한 있을리 만무한 백령도에서의 처음 맞이하는 초겨울 풍경은 바닷가의 매서운 바람과 함께 궐기하는 모습의 부흥회 사진을 배경으로 한 현수막이 섬 주변 곳곳에 걸린 채 펄럭이고 있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 성지 백령도에 사찰건립이 웬 말이냐! 결사반대”
또 다른 한쪽에서는 백령도에서 내쫓기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백척간두진일보, 은산철벽이 이런 감정이었을까? 1898년 설립되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오래되었다는 중화동 교회를 비롯해서 100여 명의 목사를 배출하였다는 자긍심으로 팽배한 지역적, 정서적 특징이었다.

그러던 중 백령도가 불교를 배경으로 한 심청전의 설화와 관련한 많은 부분을 담고 있고, NLL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긴장감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기에 ‘심청효평화축제’를 통하여 육지의 신도님들과 관광객을 유치할 기획을 세우게 되었다.

마침 그 당시 불자 가수회 회장을 불교와 해병대의 홍대대사를 자처하는 운봉거사 김흥국씨가 맡고 있어서 백령도 위문공연을 부탁하였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어 축제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렇게 준비하며 행사일이 100여 일 앞으로 다가오게 된 어느 날, 신도님이 찾아와서 크게 염려를 하였다.

 “백령도 교회들이 연합해서 축제를 못하게 100일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행사를 위한 백일기도를 합시다.”
그리하여 총칼을 대신한, 보이지 않는 기도 전쟁이 시작 되었다.
“나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축제일이 다가오는 동안 마음은 평온하였고 행사 진행도 차분히 준비 되었으며, 한 편으로 육지에서는 격려와 더불어 축제에 동참하고자 접수한 불자들이 오백 명 가량 되었다.

그렇게 날은 흘러 축제는 사흘 앞으로 다가오게 된 상황에 폭풍이 불어 여객선이 통제가 되었다가 전일에서야 정상적으로 운행이 되기 시작 하였다. 폭풍을 미리 맞이하고 난 축제 당일은 아마도 그 해 중에서도 가장 좋은 날씨를 점지 받은 듯했다.

불자가수회를 비롯한 많은 연예인들과 손님들을 맞이한 백령도는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 되어 들썩였다.
그리고 또다시 맞이한 부처님오신날.. 앞만 바라보며 기도하다가 기도를 마치고 뒤돌아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법당이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몇몇이지만 신심 지극한 백령도의 불자님들과 백령도 관광으로 입도한 참배객, 신부님을 비롯한 이웃종교의 신자님들이 환한 웃음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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