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은 왜 유마경을 읽었을까

가흥대장경은 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약 100년 간 절강성을 중심으로 간행됐던 최초의 방책본 대장경이다. 가흥대장경은 조선 후기에 유입돼 불교사학과 출판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일본으로도 수출돼 황벽대장경으로 복각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 복각된 가흥대장경의 유입 경로와 불서 간행 등의 정황이 이종수 순천대 남도불교문화연구센터장의 논문을 통해 발굴되고 있다. 이 센터장의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 간행’과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등 두 편의 논문을 함께 묶어 정리했다. 정리= 신성민 기자

숙종마저 매료시킨 난파선 佛書

신하들 요청에 사찰로 보내기도

난파선 불서는 가흥대장경서 비롯

수습 못한 일부, 성총이 수집·간행

총 12종 197권 5000판에 이르러

조선후기 화엄학·정토신앙 유행 계기

“韓中日 불서 유통 연관성 주목해야”

조선 숙종 7년(1681) 6월 5일, 큰 태풍이 몰아쳤다. 한양 근처 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뽑혔고, 함경도와 경상도에는 폭우로 사람들이 물에 떠내려가 목숨을 잃었다. 또한 전라도 암자도에는 중국 선박이 표류해왔다. 표류선에는 살아남은 중국 선원과 무역 물자가 실려 있었다. 나주 관아는 배에 실려 있던 각종 물품을 수습해 조정으로 올려보냈다. 〈숙종 실록〉에 따르면 불서는 1천여 권이 있었고, 불기(佛器) 등도 다수 존재했다.

실록 등에 따르면 숙종은 조정으로 올라온 표류선의 불서를 왕실 창고에 두고 틈틈이 읽었다. 문제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의 왕이 정사는 멀리하고 불서를 탐독한데 있다.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의 불서 탐독을 경책하는 신하들의 이야기가 기술돼 있다.

정승 판서 중 한명인 민정중은 숙종에게 “이번에 전라도에서 건져 얻은 서책은 모두 불경입니다. 오래도록 궁궐에 둔다면 바깥사람들은 반드시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내어 주게 하심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에 숙종은 “알았다. 내가 평소에 내어 주고자 하였다. 책의 글자가 바르고 돋으니 아낄만 하다. 근래의 물건 같지 않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숙종이 대신들의 질타를 받았을 정도로 읽었던 불서는 무엇일까? 이는 성주암(聖住庵)에서 간행한 〈유마힐소설경직소(維摩詰所設經直疏)〉의 중권에서 수관거사로 불렸던 이충익의 글에서 숙종이 읽은 책의 출처를 알 수 있다.

 

▲ 화개 칠불사 백암성총의 부도. 시문이 뛰어났던 스님은 선종과 교종에 두루 통하였을 뿐 아니라 정토문(淨土門)에도 귀의하여 극락왕생을 염원했다. 또한 스님의 참선 공부법은 철저히 임제종(臨濟宗)의 것을 따라 후학을 지도하였으며, 유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유사(儒士)들의 배불론에 대해서는 철저히 변호하기도 하였다.

“숙종 7년 표류한 배에 불서가 가득 실려있었다. 일부는 바다에 가라앉았고 남은 것들은 수레에 실어 서울로 보냈다. 그 당시 판서를 역임한 임상원이 승지로 있었는데 많은 불서를 암송하고 있어서 음내전이라 불렸다. 임금이 유마힐경을 보다가 임상원에게 해설해달라고 명했다. 그러자 임상원이 사양하며 ‘신의 직분은 경연에서 질의하는 것인데 어전에서 불서를 강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임금이 옳게 여기고 불서를 모두 남한산성 개원사에 보냈다.”

숙종 7년에 표류한 중국 무역선에는 1천 권에 달하는 불경이 있었다. 하지만 먼 바다에서 표류된다면 배에 있던 물건들이 해안가에서 발견됐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기록에는 당시 상선이 표류해 칠선도에 이르러 파괴됐고, 불서를 가득담은 수많은 목함들이 파도에 따라 해안가에 밀려왔다고 기술돼 있다. 나주관아에서 수습한 것은 1000권에 불과했지만, 당시 가홍대장경은 1만여 권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아가 수집하지 못한 가흥대장경을 수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사람이 바로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이다. 성총은 13세에 출가해 16세에 법계를 받았으며, 18세에 지리산에 들어가 수행 정진했다. 그 후 30세부터 경전을 강의하기 시작했으며,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1681년 표류선이 임자도에 표착했을 때 성총은 인근 지역인 영광 불갑사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 선박이 나주 앞바다에 있는 임자도에 표착했다는 소식을 비교적 빨리 접하게 됐다. 1766년 김상복이 찬술한 ‘백암당성총대선사비문’에는 “일찍이 바닷가 나루터에 큰 선박이 와서 정박한 것을 발견하고 그곳에 실려 있는 것은 봤는데 190권의 불경이 있었다”고 기술돼 있다. 관아로 올라간 불서를 제외하고 해변 곳곳에 떠내려 온 불경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당시 성총의 나이가 51세였는데 55세에 수집한 경전을 가지고 징광사로 갈 때까지 4년 동안 곳곳에 흩여진 불서들을 수소문해 수집했던 것이다.

징광사에서 판각을 시작한 성총이 제일 먼저 판각을 마친 것은 〈정토보서〉였다. 이 책은 가흥대장경 속장에 있던 여러 정토서적의 내용을 발췌해 엮은 것으로 정토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이후 성총은 총 12종류 197권 5000판의 책을 간행했다.

성총은 징광사에서 4종의 지험기를 복각하고 합철해 ‘사경지험기’라는 제목으로 유통시켰으며, 〈금강반야경소론찬요간정기회편〉, 〈대명삼장법수〉, 〈대방광불화엄경소초〉를 복각해 보급했다.

성총은 1694년 전남 용흥사에서는 가흥대장경의 〈성원제전집도서〉를 복각했다. 용흥사는 당시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로 강원교육을 위해 이 책을 복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담양 용흥사 소장된 가흥대장경. 성총은 1694년 전남 용흥사에서 가흥대장경의 〈성원제전집도서〉를 복각했다.

가흥대장경의 〈화엄현담회현기〉는 총 40권으로 구성돼 있는데 계파성능이 주도해 1695년 지리산 쌍계사에서 복각했고, 서문과 발문을 성총이 썼다. 두 스님의 가흥대장경 복각사업은 제자인 인담에게 이어진다. 인담은 〈주화엄법계관문〉과 〈임명입정리논해〉를 1713~14년 지리산 왕산사에서 복각했다.

1724년 지리산 화엄사에서는 함경도 안변 석왕사에서 온 용곡일심이 가진 가흥대장경인 〈보왕삼매염불직지〉, 〈귀원직지〉, 〈준제정업〉 등 3권의 책이 복각돼 간행됐다.

26년 후인 1750년 함월해원은 안변 석왕사에서 가흥대장경 〈대승백법명문론〉과 〈성상통설〉을 합쳐서 발행했다. 이 논서들은 유식학의 논서로서 조선 후기 불교 교학의 수준과 경향을 가늠하는 데 매우 주목되는 책이다.

가흥대장경의 복각은 1769년 안동 봉정사에서 다시 이뤄진다. 봉정사에서 복각된 가흥대장경은 〈보살계의소〉, 〈사분계본여석〉, 〈기신론소필삭기〉 3종으로 계율 관련 2종과 강원 교재 1종으로 나눌 수 있다.

가흥대장경 복간의 결정적 역할을 했던 성총은 많은 저본을 남겼다. 이 중에서 〈화엄소초〉는 8세기 이후 불교계에 화엄학이 유행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성총은 직접 〈정토찬〉 이라고 하는 100수의 시를 지었는데 이 책은 〈정토보서〉와 더불어 18세기 정토신앙의 유행에 밑거름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성총의 불서 간행에 의해 18세기 삼문수학(三門修學)이 일반화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말부터 불교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선의 경절문에 원돈문과 염불문이 더해져 불교계가 더욱 풍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총이 간행한 불서의 종류를 보면, 총 12종류의 불서 중에 사집(四集)을 포함한 9종류가 당시에 성립되어 가던 이력과목과 직접인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치문경훈〉은 사미과, 사집은 사집과 〈대승신기론필삭기회편〉과 〈금강반야경소론찬요간정기회편〉은 사교과, 〈화엄소초〉는 대교과에 각각 대응하고 있다. 이들 서적들은 모두 이력과목의 참고서로서 18세기 이력과정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종수 순천대 남도불교연구센터장은 논문을 통해 “성총의 불서 간행 속에는 조선 사회를 넘어 중국과 일본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면서 “그러므로 조선후기 불서에 대해 접근할 때, 단순히 국내의 유통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연적 교류이기는 하지만 표류선에 의한 불교 교류는 이후 삼국 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성총은 1681년부터 1696년까지 낙안 징광사에 머물면서 가흥대장경을 복간해 징광사와 쌍계사에 봉안했다. 사진은 쌍계사 전경. 징광사는 200년 전 조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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