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 불교적 대안은- 부처님은 혐오를 어떻게 대처했나

한국 사회에서 넘쳐나고 있는 ‘혐오’라는 감정은 불교적으로는 ‘탐·진·치’ 삼독심 중 분노로 해석할 수 있다. 분노가 혐오를 이끌고 언어를 통해 표출함으로서 구업(口業)을 짓는 구조이다. 부처님은 이 같은 분노의 연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 초기 경전인 〈앙굿따라니까야〉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벗들이여,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으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성냄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성냄이 더욱 많아지고 증대하는 것인가? 혐오스러운 인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혐오스러운 인상에 대해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을 하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성냄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성냄이 더욱 많아지고 증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 이러한 조건으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성냄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성냄이 더욱 많아지고 증대하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전재성 역〉

혐오의 감정이 이치에 맞지 않는 정신활동을 하면 분노가 확산된다고 부처님은 말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보여지는 혐오 문화 역시 특정 대상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방적 멸시와 조롱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는 데에서 부처님의 교설을 되짚어봐야 한다.

부처님의 일생에 있어서도 탐·진·치 삼독심으로 인해 스스로 자멸한 인물은 많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마간디야이다.

쿠루국의 한 바라문의 딸이었던 마간디야는 뛰어난 외모로 사람들의 찬사와 부러움을 받고 자라 성품이 오만했다. 그런 딸에 어울릴 만한 멋진 남자를 찾기 위해 아버지는 노력했고, 하루는 거리에서 탁발을 하고 있던 부처님을 만난다. 아버지는 아름답게 장식한 마간디야를 데리고 부처님을 찾아가 자신의 딸과 결혼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라고 해도 똥오줌으로 가득 차 있는 주머니”라고 일갈에 잘라 말했다. 부처님의 대답을 들은 마간디야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끼며 분노했고 복수를 다짐했다. 그후 마간디야는 우데나왕의 왕비로 시집을 가게 되지만, 오만한 성격과 불같은 질투심은 그녀를 평온하게 두지 않았다.

제1왕비였던 사마와티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제거할 기회를 노렸지만 그때마다 부처님의 가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결국 어느 날 왕이 적국에 병난이 일어나 스스로 출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간디야는 숙부와 공모해 사마와티와 시녀들을 모두 한 방에 가두고 불에 태워 죽였다. 음모는 곧 발각됐고, 우데나왕은 마간디야의 숙부는 외국으로 추방하고, 마간디야는 땅속 굴에 유폐시켰다. 마간디야의 일화는 분노를 비롯한 삼독심이 어떻게 인간을 자멸시키는 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분노의 감정을 누르기 위해서는 인간은 무엇을 해야할까. 부처님은 자애심을 강조하고 있다.

“어떠한 원인, 어떠한 조건으로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성냄이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성냄이 사라지는 것인가? 가애로운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자애로운 마음에 의한 해탈에 대해서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을 하면, 아직 생겨나지 않은 탐욕이 생겨나지 않고, 이미 생겨난 성냄이 사라지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전재성 역〉

혐오를 극복하는 것은 결국에는 대화이다. 올바른 대화 방법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설했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집착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이 대화의 목적이고, 대담의 목적이고, 관심의 목적이고, 귀를 기울임의 목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렇게 교설했다.

“분노로 가득 차 대화를 하네. 화를 내고 오만하고 고귀하지 못한 수단을 사용하며 다른 사람에게서 잘못을 찾네. 악담을 하고, 무례를 범하고 혼란스럽고, 상대를 짓밟는 것을 대화에서 서로가 즐겨하니 그것은 고귀하지 못한 것이네. 〈중략〉 집착없는 정신으로 화내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질투함이 없이 성급함이 없이 현자는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는 질투를 여읜 마음으로 올바른 앎을 말하네. 잘 말해진 것에 대해서는 칭찬하고 잘못 말해진 것이 있어도 비웃지 않네. 바른 말은 청정한 믿음을 주고 우리의 앎을 깊게 하네.”  〈앙굿따라니까야, 전재성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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