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최주현

병고가 오든 애고(哀苦)가 오든 어떤 환난이 오든 그 모든 걸 되돌려 놔라.

거기다 놓으면은, 불에다가 불을 넣으면 그냥 하나가 돼 버린다.

불덩어리에다가 그냥 놓으면 용광로에 넣듯이 그냥 녹아 버린다.

(지난 호에 이어서)

이런 문제 등등이 나올 때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 스님네들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내가 이렇게 해 나가는 일은 자나 깨나 오직 정신을 거기다 두고서 이 삶의 보람을 자유스럽게 누리면서, 이렇게 다른 사람도 돌봐 주면서 다스리면서 나가야 되는 거지, 그것도 욕심이 과해서 그렇게 한다면 그건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또는 세세생생에 버림을 받아서 오간지옥에 태어나서 국내 밥내도 못 맡게 됩니다. 사람의 의식으로 살다가 벌레가 돼서 산다면은 얼마나 그게 치욕적인 고(苦)입니까? 그거를 알고 있는데 벌레로 만들어 놨으니까 그렇게 고가 많단 얘깁니다.

여러분은 ‘지옥이 이 자리에 있고 천당도 이 자리에 있다.’ 하니까 그냥 겉으로만 그렇게 알고 계시죠? 실질적으로 이것이 그렇게 돌아갑니다. 금방 살다가 금방 딴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오는 수가 많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말입니다. 그래서 죽으면 몸까지 다 두고 가지만 업식은 가지고 간다 이겁니다, 한 발짝도 에누리 없이.

옛날에 원주에 있을 때 이런 실질적인 얘기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뭘 잃어버리면 고양이를 시루에다 앉혀서 찐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게 비비 틀리는 대로 그것을 집어 간 사람이 비비 틀린다고 그런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어디 그 농촌에서 무엇을 아마 크게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그러니깐 그 마을에서 전부 그냥 이것을 이렇게 한다고 외치고는 고양이를 시루에다 안치고는 쪘답니다. 그거를 그렇게 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서 손주를 봤는데, 머리는 고양이고 몸뚱이는 사람이었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갖다가 묻어 버린 예가 있다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묻어 버렸다고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엊그저께도 얘기했듯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많아서 박사님들이 연구를 해서 그 병을 고친다 하더라도, 그 병은 고쳐질 수 있을지언정 그 병의 근본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화해서 다른 걸로 바뀝니다. 그래서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어떠한 인과로서 이렇게 왔는지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마음도리를 공부하는 데 열심히 잘 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게 그냥 대충 이렇게 얘기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가 지금 생활 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냥 그대로, 알면 병이고 모르면 약이다 이러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알고 몰라야지, 모르는 게 그냥 모르면 안 됩니다. 알고도 겸손하게 몰라야 됩니다.

그러니 정진하실 때도 그렇고, 어느 분이든지 상대를 놓고 빌거나 상대를 놓고 기도하거나 상대를 놓고 하면은 안 되고 또 내면으로라도 ‘해 주시오’ 하고, 당신이 있어 가지고 주인공을 상대로 놓고 거기다가 ‘해 주시오’ 하면은 또 그것도 안 됩니다. 그대로 믿고 ‘할 수 있다.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다.’ 하고 마음으로 굴려서 다시 놓을 수 있는 그런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게 뭣고?’ 하기 이전에 벌써 그냥 직선적으로 들어가는 공부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지켜보고, 그래서 ‘관세음’이라고 했습니다. 관세음! 관해서 보고, 이 세상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바로 진리인 것이고, 관세음이라고 이렇게 이름을 지어 놓은 겁니다. 그걸 깨달으라고 그렇게 한 거지 이름을 부르고 찾으라고 그런 게 아닙니다. 네가, 말하자면 네가 즉 관세음이니라. 네가 이 세상에서 나와서 말하고, 이 세상에서 살면서 행동하고 보고 듣고, 그리고 들이고 내고, 이게 모두 네가 보고 살고 있지 않느냐 이거야. 그거를 딱 드잡아서 자기로 볼 수 있다면 바로 여러분이 다 관세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거를 깨달아서 완벽하게 섰다 하면은, 지팡이가 완전히 섰다 하면은, 이 몸속에 든 의식도 그게 전부 업식인데 그 업식이 한데 합쳐져서 그냥 큰 에너지덩어리로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심력입니다.

여러분이 날더러 항상 말을 하라고 그러는데 허,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말해 봤자야 어떤 때는 소용이 없이 될 때가 있어요. 금방 말하고 돌아섰는데 금방 행동은 그렇지 못하더라, 이 소리예요. 여러분이 말로는 전부 안다 하더라도 행동 하나 하기가 어렵다 이 소립니다. 행동이 그렇게 돼야만이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화목하고 즐겁고 좀 색다르게, 빛나게 살려면 행동부터 진실하게, 그렇게 모든 거를 ‘잘못했든지 잘했든지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상대하고 부딪치기도 하지.’ 하고 내 탓으로 돌려야지 남의 탓으로 전전긍긍하고 남의 탓으로 원망하고 남의 탓으로 증오하고….

그리고 자식도 자기가 인연에 따라서 낳았는데, 자식이 잘못하면 “저놈의 새끼가 누굴 닮아서 저러냐? 제 아비를 닮아서 저렇지!” 또 아버지는 “제 어미를 닮아서 저렇지!” 이렇게 해 나간다면 그거는 자식의 뿌리를 북돋워 주는 게 아니라 아주 싹을 망쳐 놓는 겁니다. 부부지간도 그렇거니와 부모 자식지간도 그렇고 모두가, 위로는 묵은 빚을 갚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태도를 진실하게 가져야 하고, 아래로는 내가 햇빛을 주는 것이 바로 뿌리를 도와주는 것이니까 햇빛을 주게끔 심력을 길러야 하고, 이런 것이 우리들의 지금 배움에 따라서 종교를 진짜로 실천해 나가는 그런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종교를, 어디 가서 남편이 잘되게 빈다, 자식이 잘되게 빈다 하고서 산 기도를 무슨 백 일을 한다, 천 번을 절을 하기 위해서 간다 그런 것이 종교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항상 그러죠. 천 번 절한 것도 바로 일정례에 속한다. 마음에 항상 끊어지지 않게 전력을 다해서 진실로 둘 아니게 한다면 만 번 하는 것보다 일배 하는 것이 더 위대하다 이랬죠. 그런데 그 자식이나 부모나 남편들을 다 그냥 정신적으로 배고프게 만들어 놓고 기도 간답시고 멸치 뭐 이런 것도 다 안 먹이고 고기도 한 칼 안 먹이면서 ‘백 일 동안은 먹지 맙시다.’ 하고선 그냥 다 안 먹이고선 기도를 다니고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게 어딨습니까? 세상에 그런 게 어딨습니까? 백 일이 일 초가 될 수 있어요. 일 초! 일 초가 모르면 백 일이고, 백 일이 만 일도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 한생각을 잘하면 한 찰나에 일어설 것이고, 절룩발이가 두 다리를 다 찾을 것이고 한생각을 잘못하면 두 다리가 다 빠질 것이다.’라는 얘기예요.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을 좀 보세요. 우리가 경 속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지켜보세요. 아까도 얘기했죠? 관세음이라고 그런 게 지켜보라고 그런 거거든요. ‘이 만물 돌아가는 거를 다 지켜봐라.’ 이거거든요. 관(觀)! 그래서 볼 때에 둘 아닌 도리에서 본다면 모두 가르치는 스승이에요. 나무 한 그루도 그냥 있질 않아요. 내가 산으로 다닐 때 그 나무 한 그루도, 어떤 거는 목신(木神)이 인사를 해요.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 목신처럼, 세상에 이리 바람이 불고 저리 바람이 불고, 눈이 오고 비바람이 치고 이래도 나중에 가을이 되면 잎이 단풍이 들어서 다 떨어지고 앙당한 가지만 남아도 말이 없어요. 말없이 그냥 움죽거리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냥 인내 있게 걸어가고 있더라 이 소리예요. 그러면 그것이 바로 나에게 배움을 주는 거라고. 그 나무 한 그루가 앙당한 가지만 남아서 불불 떨면서도 인내하는 그 마음이, 바로 그 생명이 그 뿌리를 지키면서 날더러 그렇게 살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말을 해 줘서만 압니까? 물도 그렇고 산도 그렇고 돌도 그렇고, 모두가 자기네들처럼 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스승이 안 되겠습니까?

불교에서 그렇게들 하고 다니기 때문에, 외국에 가서 들어 보니까 이 불교라는 것은 마구니 소굴이라고, 귀신들이 들끓는 데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디다. 그래서 그냥 거기다 대고 “그 불교 속에 들어 있다.” 하고선 그냥 “불교가 어느 한군데에 국한돼 있는 게 아니다. 너희들도 불교 속에 들어 있다.” 이러고는 그냥 “당신네들도 기복이야. 전부 기복이야. 여기 이쪽이 귀신이고 그런다면 너희들도 귀신이다, 그 마음이. 돌아가면서 가만히 생각해 봐라. 상대를 놓고 빌고 상대를 놓고 기도하는 것은 다 미신이다.” 그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마는, 그렇다고 해서 심정이 좋지 못해서 그런 소리 한 게 아닙니다. 누구나가 다 그럭하고 있으니까 했던 말입니다. 누구나가 다 기복이에요.

기복이라면 어떠한 문제가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조상들이든가 친구들이든가 죽은 영혼이 이렇게 다가와도 그걸 모르니까 모르는 대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아는 대로 돌아가게 돼 있거든요. 그러면, 오면은 그것이 둘이 아니게끔 거기다가, 즉 말하자면 자석이 이렇게 있으면 뭐 쇠 부스러기가 그냥 붙어서 하나가 돼 버리는데, 그냥 자석에 한 덩어리가 돼 버리는데, 그러니까 탈이 없죠. 그런데 요거는 요것대로 자꾸 가깝게 와 가지고 붙으려고 하는데 자꾸 떼어 버리니까 자꾸 와서 붙으려고 하는 거죠. 그게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이것도 자석이니까. 그러니까 붙으려고 하는 힘과 끌어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하는데 그냥 자꾸자꾸 떼어 버리려고 하고 붙으려고 하고 떼어 버리려고 하고 이러니까 환난이 일어나는 거죠. 이게 한마디로 표현을 이렇게 합니다. 어느 거든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거 지금 얘기하는 영계성·유전성·세균성·업보성, 이 모두가 다 그런 형국이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림하면서 이 도리를 모른다면 항상 그렇게 돌아갈 겁니다. 그러니까 붙지 못하게 “너는 죽어야 해. 너는 떼어 버려야 돼. 너는 여기 없어야 돼.” 이럭하고 만날 떼어 버리려고들 드니까 그냥 한시가 바쁘게 일이 생기죠. 하하하. 만날 바쁘고 만날 괴롭고. 이뿐만 아닙니다. 알지도 못하게 유전성이라는 건 또 오죠. 그러니까 병고가 오든 애고(哀苦)가 오든 어떤 환난이 오든 그 모든 걸 되돌려놔라. 거기다 놓으면은, 불에다가 불을 넣으면 그냥 하나가 돼 버린다. 불덩어리에다가 그냥 놓으면 용광로에 넣듯이 그냥 녹아 버린다. 하나가, 한 덩어리가 돼 버린다. 그러니 탈이 안 난다. 이사를 가고 오고 삼재가 들고 오고 뭐가 어쩌고저쩌고…. 이런 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니, 그런 거를 일일이 그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재미를 보고 삽니까? 하하하. 아니, 어떻게 그걸 사람이 산다고 하고 살 겁니까? 만날 고통이지!

그래서 좀 미련한 듯한 사람이 쉬이 깨닫는다 이런 문제가 있죠. 미련하면 무조건 거기다 놓으라면 그냥 무조건 놓으니까. 그런데 약은 사람들은 요리 굴리고 조리 굴리고 그러거든요. 하하하. 그러니 여러분이 종교라는 이름도, 불교라는 것도 이름이요, 종교들이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다 이름입니다. 그건 다 이름일 뿐이에요. 나 하나하나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냥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왔는지 그거를 알기 위해서,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내가 항상 그런 말 잘하죠. 저 지구가 버스라면, 버스 안에서 옹기종기 네 거니 내 거니, 내 종교니 네 종교니,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하고 싸우고 박치고 온통 그냥 혼란을 부리고 이게, 이게 사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러고 살고 있거든요. 그게 사는 겁니까, 어디? 수라장이지.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 오신통(五神通), 본다, 듣는다, 남의 마음을 안다, 어디서 왔는지도 안다, 가고 옴이 없이도 가고 오고 한다 이러더라도 그것은 도가 아니니라. 그 안에서 싹 벗어나야 된다 이런 겁니다. 싹 벗어나서, 아예 다 내려다보고 다 그냥 모두가 그저 사대(四大)를 다 흡수하면서 같이 여여하게 돌아가는 것이 바로 여래니라. 이게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냥 여여하게 돌아간다면 여래일 것이고, 여여치 못하다면은 중생일 것입니다.

또 오늘도 말을 하래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마는, 그 말한 게 여러분과 나와 둘 아니게 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전구가 (천정의 전구를 가리키시고) 이렇게 쭈욱 이렇게 있죠? 너 나가 이렇게 모습은 다 이렇게 달리,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고 다 있지만 전력은 다 똑같다는 얘기 만날 하죠? 그러니까 둘 아닌 까닭에 우리가 말을 해도 이것이 ‘내 말이다, 네 말이다’ 하지 말고 ‘바로 나한테 있는 사실이요. 바로 내가 지금 그렇게 듣고 있고 내가 말을 하고 있고 내가 지금 이럭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한번 다스려 나가면서 믿어 보면서, 실험하면서 체험하면서 이렇게 나가는 것이 참선입니다.

지금 가만히 보면요, 기독교 믿는 사람, 가톨릭교 믿는 사람은 조상들의 제사도 안 지내고 그런다 이러는데 이거는 있을 수가 없죠. 이건 의리도 도의도 없는 사람들이야! 응? 자기를 낳아서 길러서 사회에 나가기까지 그렇게 해주었는데, 그 의리로 봐도 그렇고 도의로 봐도 그렇고 아, 어떻게 그럭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향 켜 놓고, 촛불 하나 켜 놓고, 물 하나 떠 놓고 생수 떠 놓고 참, 떡 한 조각이라도, 그 찹쌀떡이라도 하나 놓고 딱 앉아서 그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면서 ‘모두가 둘 아닌 자리에 함께 하소서.’ 하고 그냥 하면은, 그것이 제사라고. 그리고 “오늘 어르신네 기제가 있어서 이렇게 음식을 조금 사 왔느니라. 이것들 모두 먹어라.” 이러고 먹이는 것이 바로 그 어른을 대접하는 거라고. 응?

내가 항상 그런 얘기 잘하죠. 작년에 수박을 심어서 수박씨가 그 속에서 나왔는데, 이번에 그 수박씨를 또 심었어요. 그래서 또 수박이 열렸다고요. 그랬는데 작년 수박씨 다르고 올 수박씨 다릅니까? 그러니까 그 부모들한테 기제를 지낼 때는 그렇게 간소하게 그렇게 해도, 불을 켜 놓고…. 그 마음의 불을 켜는 거거든. 그렇게 해 놓고선 음식을 조금, 식구들이 잘 먹는 걸 사다가 나누어 주면서 그렇게 하면은, 그 씨가 그 씨요 그 씨가 그 씨니까, 하하하, 바꿔진 거뿐이니까. 아이, 그거 다 그날을 생각하면서 위의 묵은 빚을 갚을 수 있고, 햇빛도 또 줄 수 있잖아요? ‘부모님이 저렇게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잘 이렇게 하는 걸 보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고려장 지낼 때 지게를 도로 지고 가니까 “왜 가지고 가느냐.” 하니, “아버지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니까 고만 자기 어머니를 도로 업고 가더라는 셈으로 말입니다. 이거는 은연중에 그 자식들이 그냥 본받게 돼 있습니다.

이 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어 이 털구멍을 통해서 그냥 수없이 나갔다 수없이 들고 그럽니다. 이거 모르시죠. 악하게 마음을 갖고 누구를 예를 들어서 밉게 생각을 한다, 저것 증오한다 이러면은 벌써 이게 마음이 말입니다, 털구멍을 통해서 그쪽으로 갑니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더 증오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털구멍을 통해서 나고 들면서 ‘참, 둘이 아닌데 너도 둘이 아니게 여기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거기다 놓을 때는 바로 거기도 밝게 불이 들어와서 ‘아, 모든 게 잘못된 것도 내 잘못이구나!’ 하고서, 자기 마음을 자기가 다스리면서 이렇게 잘 돌아가면서 나중에는 “아이고 형님, 내가 잘못했어! 모든 게 내 탓이야!” 하면서 회개를 할 수가 있죠, 형님뿐이 아니라.

그러니깐 가족 중에서도 여러분이 의절을 하고 안 다니는 집들도 있죠? 그런 일이 없도록, 남자나 여자나 다 그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 모습들을 가지고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 모두 등이 져야 하고 원망을 해야 하고 그 증오를 해야 합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종교를 진실히 믿는다면은 어디 국한돼 있는 것이 종교가 아니라, 여러분이 살림하고 살아나가는 이 진리가 그대로, 이 세상이 그대로 종교입니다. 응? 그러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서 촛농이 이리저리 흐르지 않도록, 초 심지를 다스리면서 잘해 보십시오.

오늘 질문 듣겠습니다. ‘뭐 별것도 아닌데 별것도 아닌 말을 하고 있어.’ 이러지 마세요. 별것도 아닌 데서부터 크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림하는 게, 내 몸과 자식들과 부모와 부부가 다 이렇게 하는 게 얼마나 지금 시급한 일입니까?

질문자1(남) 오늘 설법을 통해서 완전히 믿음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소위 하나님을 믿습니다. 신을 믿는데, 우리는 과학적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믿음과 신과의 구별이 어떠하신지 좀 알고 싶고, 우리 주인공도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큰스님 이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요, 그것이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요, 자기 하나의 ‘님’입니다. 자기로부터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부터 찾아라, 하나! 하나의 자기부터 세워라. 지팡이를 세워라.’ 이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타의에 있다고 생각하고들 찾는 것은 모두 편집이 잘못됐다고 봅니다, 그 성전에. 그러니까 그렇게 나가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나갈 리가 없죠. 예수도 “나를 믿어라.” 이랬지 언제 타의의 모든 것을 믿어라 이랬습니까? 나를 믿어라 한 것은 그때 그 시절에 그분은 ‘모두 각자 나를 믿어라.’ 했던 건데, 모두 모르고 ‘자기를 믿어라.’ 이러니까 모두 한군데로 몰려서 ‘예수를 믿으랬다.’ 이렇게 아마 잘못된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잘못된 것을 잘 반성하고 고쳐 나가면서 이루어야 우리 지구도 성공적으로 가꾸어 갈 수 있다는 겁니다.

질문자1(남) 그리고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죄를 짓고도 우리 주인공을 찾을 때 우리 주인공이 나를 돌봐 줄 수 있는 건지, 그게 아니면 청정한 마음이 생겼을 때 우리 주인공과 접할 수 있는 건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큰스님 하하하. 이 안에는 자기 자신의 그 업식들, 수십억 개의 의식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목록이 이렇게 다가오는 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걸로 인해서 잘못되고, 잘못하는 사람들은 그 업식 때문에 잘못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잘못하는 거를 잘 가게 하기 위해서, 반성하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를 칩니다, 자기 업식들이. 즉 말하자면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자기가 즉 신장(神將)이 됩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그렇게 잘못할 때는 신장이 되고 잘할 때는 보살이 되고 또 더 잘할 때는 부처가 되고 법신이 되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 잘못하니까 신장이 될 수밖에. 신장이 돼서 자기가 자기를 칩니다.

그러니까 그냥 어디 갔다가도 그냥 탁 치니까 넘어져서 잘못 다치기도 하고 이러는 수가 많죠. 그런데 본인은 그거를 모릅니다. 그거를 빨리 깨달아야 할 텐데 ‘아하, 이거 타의에 끄달려서 이렇구나.’ 하는 거를 발딱 깨쳐서, 잘못하고 가는구나 하는 거를 다시 가다듬어서, 그 누적이 된 거는 잘라 버리면서 이렇게 똑바로, 아까 초 심지 잘 일으켜 세우듯 세워서 이렇게 해 나가야 이게 빨리 수습이 되는데, 그렇지 않고선 그냥 ‘아이고, 이런 내 팔자야. 이게 이게 나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는데….’ 아주 자기 잘못하는 건 쑥 빼고 ‘이렇게 하지도 않았는데 이게 무슨 팔자야? 왜 이런 게 와?’ 이러고선 합니다. 그러니까 이게 점점 업은 두터워지죠. 그러니까 자기가 이 공부를 하다 보면, 잘못했으면 자기가 자기를 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누가 나쁘게 해서 치고 때리고 또 좋게 주고 이러는 게 없습니다. 누가 갖다 주고 뺏어 가고, 잘못했다고 때리고 잘했다고 상 주고 이러는 게 없습니다.

질문자1(남) 믿음을 다시 돈독히 하기 위해서 어떤 기도가 필요한지요? 또한 아울러서 열정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요.

큰스님 여직껏 말씀드렸죠? 기도라는 거, 나는 아주 그 이름 자체도 없애고 싶다고요. 관(觀)이지! 자기를 자기가 관하는 거지, 기도가 아니다. 기도는 상대를 놓고 기도를 하기 때문에 ‘기도가 아니다’ 이런 겁니다. 그러면 상대를 놓고 기도를 해서 그 신심이 돋아진다 이러는 건 공덕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건 이익도 없고, 공덕도 없고, 남을 이익 하게 할 수도 없고, 나를 이익 하게 할 수도 없는 경우다 이겁니다. 그런 걸, 오신통에 대해 이런 말이 있죠. ‘다른 거를 다 알아도 도가 아니다. 목마를 때 물을 줄 수 있고, 생수를 줄 수 있고 내가 목마를 때 먹을 수 있어야 이게 도다. 이게 누진(漏盡)이다.’ 이렇게 말한 거와 같습니다.

※위 법문은 1992년 10월 18일 정기법회에서 설법하신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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