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광고등학교 인성부장 김호준 교사

▲ 김호준 선생님은…1969년 5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 체벌의 경험으로 방황하다 1999년 임용고시에 합격해 양산 보광고등학교에 재직중이다. 현재 국어를 가르치며 인성부장을 맡아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2000년 첫 담임을 시작한 이후 문집 제작과 인터넷 카페, 배구동호회 등을 통해 학생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으며 자신의 신행경 경험을 바탕으로 쓴 수기가 2015년 조계종 대상을 수상 하기도 했다.

벽 허물고 학생들과 진정한 소통 시도
문집제작ㆍ배구동호회 등 다양한 지도
통도사 걷기 등 불교프로그램도 적극 활용
본인 학창시절 중단 아픔, 불교로 극복

경남 통도사 아래에 위치한 보광 고등학교. 이곳에는 2015년 조계종 신행수기 대상을 받은 인성부장 김호준 선생님(48)이 근무하고 있다. 과거 학생부장으로 불렸던 인성부장은 현재 학생들 사이에서의 폭력을 예방하고 학교 부적응, 왕따, 흡연 등 학교 내 가장 어렵고 예민한 문제를 다루는 위치다. 그의 위치는 학부모와 아이들 사이에 지혜가 더욱 요구된다.
김호준 선생님은 신행수기에서 자신의 청소년기를 돌아보며 인생역경과 그 당시 만난 부처님을 통한 성찰이 교사생활의 답이 됐다고 한다. 영축산 가을의 단풍이 함께 익어가는 9월 24일, 보광고등학교에서 김호준 선생님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었다.

부처님의 지혜 섞인 인성교육 강조

강하게 울려 퍼지는 파이팅 소리, 네트를 넘은 배구공은 상대 진영에 강하게 내려 꽂힌다. 보기만 해도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 반복해서 공은 올라가고 학생들의 수비와 공격 연습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어느 누구하나 지쳐보이는 표정이 없다. 핸드폰과 게임 등 중독성 강한 매체에 끌려 다니는 요즘 아이들의 어두운 표정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김호준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찾은 보광고등학교에서는 긍정과 밝음의 밝은 에너지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학생들의 동호회입니다. 아이들이 좋아해 스스로 찾고 연습합니다. 운동을 통해 긴장도 풀고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공통 화제도 생기는 것이 운동이 주는 긍정적 효과입니다. 그렇게 다시 공부에 매진 할 힘도 얻게 되죠.”

보광고등학교의 배구 동호회는 제9회 경남도교육감배 학교스포츠클럽 배구경기에서 3위를 차지했다. 취미로만 활동한 그들의 실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보광고 체육관에서 처음 만난 김호준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배구부 코치와 같았다. 어느 강력계의 형사와 같은 카리스마조차 흘러나왔다. 김호준 선생님은 “선생이라고 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했다.

▲ 학생들과 함께한 영축산 등반대회. 아래쪽 맨 오른쪽이 김호준 선생님

하지만 학생들이 그를 대하는 모습에는 미소가 만연하다. 먼저 웃고 본다. 무서워보였던 김호준 선생님의 얼굴이 학생을 마주하자 금방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변한다. 마치 옆집의 편안한 형처럼 변한 그를 보며 학생들이 엄지를 세우고 “최고입니다”라고 말한다.

학생들이 스스럼 없이 선생님들 대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 김호준 선생은 그 비결에 대해 ‘소통’을 꼽았다.
“몇 년 전, 35세를 맞아 학교 아이들에게 배구를 가르치기 위해 사회인 배구동호회에 갔습니다. 평소에 운동을 잘한다고 자부할 만한 실력은 아니여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지도하고 잘 이끌어 주기 위해 운동이 좋다는 말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죠.”
▲ 교내 배구동호회 활동 후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 줄 왼쪽서 다섯번째가 김호준 교사)

김호준 선생님이 배구를 늦깍이로 배우게 된 이유는 바로 학생들 때문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는 방법을 찾는 것이 김호준 선생님의 화두였다. 학생들과 소통을 위한 노력의 흔적은 곳곳에서 보였다.
“학교에서 부적응 청소년이라고 낙인 찍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감정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 대화를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부모님을 일찍 여의거나 환경이 어려운 학생 일수록 대화를 잘하지 않습니다.”
학생들과 배구 동호회를 시작하고 나서 그를 대하는 학생들의 시선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그는 여기에 또 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바로 학급 문집 제작이었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다. 김호준 선생님은 학교 인성교육부를 통해 부적응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문집을 내고 있다. 그의 가방에서 나온 문집들은 학생들의 이야기로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문집 제작도 일종의 대화하는 방법입니다. 학생들이 주어진 주제에 대해 잠시라도 생각하고 그것을 적어나가는 동안 생각이 정리됩니다.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도 그리고 방법도 스스로 터득하게 되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마음을 여는 시작입니다.”

‘유능제강(柔能制剛)’이란 제목이 쓰여져 있는 문집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 ‘복싱’, ‘시야 놀자’, ‘바리스타 배우기’, ‘인생에는 왕도가 없다’, 통도사 무풍한송로 걷기 등 다양한 내용이 섞여 있었다.

“학생들을 지도할 때 긍정적 메시지를 주고 꿈과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자칫 학생들이 강한 것에 대한 인식을 잘못 생각하고 누군가를 제압하거나 폭력적인 면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실수를 할 때가 있습니다. 자칫 잘못한 그 선택은 지금 중요한 청소년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인생을 좌지우지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좋은 생각을 이끌고 발전하는 방향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미래도 제시하고 부모님의 마음을 돌아보는 글도 넣고 대화법을 설명하는 글을 가져와 읽게 하고 스스로 답을 적게 합니다. 바리스타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직접 직업을 체험하고 미래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도록 돕기 위해 문집에 넣었습니다. 꿈을 가지면 삶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지지 않겠습니까?”

진심이 전달된 것일까? 졸업 후 그를 찾는 졸업생들과 군대 입대 후 그에게 편지를 보내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현재 48세인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제자들의 주례 부탁도 줄을 잇고 있다.
“주례를 맡기에 어리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중대사에 저를 믿고 찾아와 부탁을 하니 거절을 못하네요.”
김호준 선생님은 이런 소통의 중심에 ‘불교’가 있다고 했다.

불교는 지혜의 원천

김호준 선생님은 인터뷰 내내 “미리 평가하고 판단하지 말고 관찰하라”는 말을 항상 유념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가치관이 불교의 ‘알아차림(사띠)’ 수행에서 얻은 지혜라고 했다.

“알아차림은 있는 그대로 보는 불교의 수행법입니다. 이것은 학생들의 불손한 태도를 접하거나 학부모님들과 상담 할 때도 큰 도움이 됩니다. 불손한 태도로 보이는 행동이 보이지만 일단 먼저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나 자신이 느끼는 불쾌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학생의 태도와 잘못에 대해 일단 먼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며 모든 학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학생에 대해 갖게 되는 과거의 편견을 걷어내고 무슨 잘못을 했을 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 학생에게 집중하면 그 대상도 진심을 자연스럽게 보이게 된다.

“학교에서의 문제는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그들의 학부모도 선생 조차도 모두 피해자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서로가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이해하기까지 중간에서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합니다. 학부모님들의 이야기 뿐 아니라 학생들의 이야기도 말입니다. 어제의 가해자라고 낙인찍힌 아이는 내일에는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항상 잘못만 하는 아이는 없으며 항상 모범적인 학생은 없습니다. 그 순간 어떤 판단을 했고 실수를 했는지 확인하고 적절한 대응과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서라도 편견만큼은 버려야 하죠.”

김호준 선생님의 집무실 책상은 <반야심경>, <금강경>, 그리고 성철 스님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매일 마다 아침이면 108배로 시작해 경전 독송 그리고 명상 까지 그의 삶은 불교로 시작한다. 교과목 외에 인성교육을 해야 하는 순간이면 프로그램으로 불교의 경구를 인용하기도 하고 통도사 무풍한송로 산책 및 절하기 등 불교 프로그램을 적절히 배치하기도 한다. 불교가 주는 마음공부의 탁월함과 치유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 학생들과 수학여행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김호준 교사(아래쪽 왼쪽서 세번째)

상처는 곧 회복으로, 치유자로

김 선생님이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은 본인이 그런 아픔을 불교를 통해 극복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당시 김 선생님은 체벌로 인해 정신적 충격을 받아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3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업시간에 당시 선생님이 조용히 하라고 하셨는데 뒤돌아 보던 제가 시범 케이스로 걸린 것이었죠. 당시는 체벌이 수위가 높아도 대부분 이해하고 넘어가던 때였습니다. 저도 다섯 대 정도는 맞겠구나하며 앞으로 나갔어요.”

당시 16세였던 김호준 선생님의 얼굴에는 손바닥이 날라왔다. 1대, 2대, 3대…끝이 날 줄 알았지만 김 선생님이 맞은 것은 58대에 달했다. 김 선생님은 당시 그 충격으로 모든 꿈이 산산이 부서졌다고 했다.

“동물을 너무 좋아해 서울대 축산과를 꿈꿨습니다. 수재라는 말도 듣고 했으니 주변의 기대가 높았죠. 그런데 학교에서 그 충격은 이후 저의 피를 말렸습니다.”
김 선생님은 모든 학업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꿈도 의욕도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가는 것은 고통이였으며 밤마다 들리는 환청에 악몽을 꿔야 했다.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2학년 때는 180cm의 키에 몸무게는 60kg이 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지옥 같았습니다. 당시 불자가 아니셨던 어머님이 저를 위해 절을 다니기 시작하실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어머님이 조용히 저를 데리고 한 사찰로 가시더군요. 고성 운흥사였습니다. 그곳에서 절을 하라는 어머님의 말씀대로 포단에 엎드렸습니다. 저를 인자하게 내려다 보시는 부처님의 모습에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엉엉 울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사찰에서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부처님께 안겨 세상을 향해 드러냈던 반항과 살기도 어느 순간 사라졌음을 감추었다고 했다. 박 선생님은 어머님이 우시는 모습을 보고 함께 입학한 동기들과 졸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삶의 이끄는 기둥 불교로, 언제나 불교 가까이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기억을 이겨낸 그는 그 이후 불교를 떠나지 않았다.
“그 날 이후에는 항상 어머님을 모시고 절을 다녔습니다. 어머님의 기도, 천수경 외는 소리를 아침마다 들으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108배를 하시던 어머님을 바라보며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절을 가실 때는 노모를 모시고 절에 같이 오르곤 했지요. 그렇게 저도 함께 수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신행 생활은 그의 군대 생활 그리고 이후 사회생활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가는 길 마다 절의 위치를 파악하고 안식처로 삼았다.

“제가 있었던 군대에는 쌍호정사라는 군법당이 있었습니다. 군대에서는 그곳에서 절을 올리며 마음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 임용을 준비하며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직장 근처에 있던 절을 찾아 청년 활동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곤 했습니다. 매일 출퇴근마다 절을 찾아 수행 하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직장을 다니며 임용을 준비하고 꿈을 찾아 힘겨운 사투를 벌일 때에 그는 더욱 부처님께 매달렸다. 학생들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고 했다. 자신들의 가치가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지 말해주고 싶었다고 한다. 임용고시에 합격하고 보광고등학교를 이력서를 제출한 날 꿈에서 그는 성철 스님을 만났다.

“꿈에서 성철 스님께서 누더기 장삼을 입으시고 저희 집으로 들어오시는 겁니다. 17년이 지
났지만 지금도 꿈 속에 스님의 음성이 또렷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성철 스님께 저희 집은 어떻게 오셨는지 물어보며 제 소개를 했지요. 일을 하러 가는 길에 조그만한 절에서 선생하고 싶다고 부처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성철 스님께서는 부처님만 배우면 되지 해인사 꼭 와야 되나? 라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나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교사가 된 후 그는 해인사 성철 스님의 부도탑을 찾았다. 비가 내리던 늦가을 성철 스님의 부도탑 바닥에는 빗물이 있었지만 신을 벗었다고 한다. 그리고 빗물을 맞아가며 그는 스님께 절을 올렸다.

“그렇게 스님께 선생 노릇 잘하겠다고 다짐을 올렸습니다. 그 후 통도사 근처인 이 곳 학교에 온 것도 보통 인연은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매일 아침이면 시간에 맞춰 불교 방송을 틀어 예불을 올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말이면 통도사 암자를 다니며 기도를 하고 긍강경 강의를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로 불지종가 아래에서 교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초심이 흔들릴 때면 부처님 전에서 염원들을 실천하는 교사로 살고 있는지 다시 물어봅니다.”

그는 과거 청소년기부터 현재 교사 생활을 하는 지금의 모습까지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했다. 방황을 끝내고 아이들이 자신을 찾아가는 그 시작점을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해주셨듯이 그들에게도 해주실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문제아라고 낙인찍힌 학생들에게 그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요? 어떤 지도가 그들에게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까? 어렵고 힘듭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시기를 겪으면서 그 만큼 가장 힘든 시기입니다. 조용히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앉아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그 어떤 지도보다 탁월한 효과를 줍니다. 그들이 그 어떤 말을 해도 부처님은 그 어떤 판단도 지도도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들어주시며 안아주십니다. 자신을 그렇게 포용하며 안아주는 마음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 시작을 알려주고자 합니다.”

가장 어렵다는 인성 지도 교사 역할. 그는 사랑이 답이라고 했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운 이들에게 허물없이 다가가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학생들이 잃어버린 자신들을 찾아가도록 돕는 것,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했다. 그는 잃어버린 청소년의 시간을 그렇게 찾아갈 것이라 했다.

 

▲ 조계종 신행수기 공모서 대상을 수상하고 난 뒤 플랜카드 앞에서 포즈를 취한 김호준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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