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소치 허련(小癡 許鍊)
4. 소치 허련(小癡 許鍊)
  • 박동춘
  • 승인 2015.10.0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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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통해 ‘畵삼매’ 든 남종화의 대가

불교 禪家에 이어진 초묵법
초의 선사가 소치에게 전해
소치 허련, 한산전 머물면서
불화에 열중… 경지 이르러
“붓으로 삼매 경지에” 극찬

▲ 소치 허련의 ‘소치묵묘(小癡墨妙).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붓을 들어 삼매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 경지는 소치 한 사람뿐이다”라는 극찬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남종화를 대표했던 소치 허련(小癡許鍊1809~1893)은 모란을 잘 그려 ‘허모란’이라 불렸던 인물이다. 한때 헌종의 어전(御前)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명화를 함께 감상하는 영광을 누렸던 그였지만 시은(施恩)의 은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전에서 물러난 후 여전히 객지를 떠돌며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다.

그의 일생에서 환한 햇살이 비쳤던 시기는 초의와 추사를 만나 사제의 정을 나눈 때이다. 그의 재주를 한눈에 알아본 추사는 성의를 다해 그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고 지체 높은 사대부들과 폭넓은 교유 또한 추사의 영향이었다. 이런 배려로 서화에 높은 안목을 넓힌 그는 1838년 12월경에 화삼매에 도달했다. 이러한 사실은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서 확인되는데 내용은 이렇다.

허 소치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림의 격조가 날로 나아져 공재(윤두서)의 습기도 다 떨어져 버리고, 점차 대치(大痴)의 문중으로 들어가는 듯합니다. 병든 나는 이에 힘입어 (나의)번뇌를 녹여 없애게 합니다. 그대와 화삼매를 참증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許生佳生也 畵品日勝盡祛恭齋習氣 漸入大痴門中 病枕賴以銷破煩惱 恨不使老衲子參證畵三昧也)

소치가 추사 댁에 머문 것은 1838년 8월경이다. 4개월 만에 추사의 뜻대로 그림의 격조가 날로 높아졌을 뿐 아니라 대치가 이룩했던 격조에 다다랐다는 것인데 이는 소치의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의 호(號) 소치는 추사가 지어준 것으로 원말(元末) 사대가(四大家)로 칭송되는 대치 황공망(黃公望)처럼 대성하기를 바랐던 추사의 뜻이 담겨진 것이다. 따라서 소치의 괄목에 번뇌를 해소했다는 추사의 언표(言表)는 자신의 만족감을 드러낸 것이다.

궁벽한 섬, 진도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의 재주를 먼저 알아본 숙부는 “내 조카는 반드시 그림으로 일가를 이룰 것이라”고 용기를 주면서 〈오륜행실도〉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 하였다. 어렵게 책을 구한 그는 무더운 여름 동안 〈오륜행실도〉 4점을 모방했다고 하니 그의 열의는 이처럼 뜨거웠다.

그는 청장년기인 1835년경에 초의스님을 찾아갔다. 이 무렵 초의는 경향의 이름 있는 인사들과 널리 교유했으며 호남의 유생들 사이에서 ‘호남팔고(湖南八高)’로 칭송되었다. 더구나 다산의 하명(下命)으로 그린 〈다산도(茶山圖)〉, 〈백운동도(白雲洞圖)〉는 초의가 수행뿐 아니라 시문과 그림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을 확인시켰고 추사의 1839년 12월의 편지에는 초의가 그린 불화의 격조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나타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소식이 끊기고 막혔다가 마침 종자(從者)로부터 (그대가) 그린 관음진영을 얻어 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대를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마는 정말 뛰어난 호상(好像)이구려. 하지만 (관음진영을 그리는)필법이 언제 이런 단계까지 이르게 되었소. 경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대개 초묵법(焦墨法: 진한 먹을 사용하여 그리는 것)은 전하기 쉽지 않는 오묘한 진리인데, 우연히 허소치가 이어 드러냈으니 전해지고 전해진 초묵법이 또 그대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관음상권(觀音像卷)은 황산 김유근상서께서 소장하려하십니다. 황산 대감께서 그대가 그린 관음상의 하단에 찬탄하는 글을 손수 쓰고자 하시니 초의 그대는 선림예단(禪林藝圃)의 아름다운 얘깃거리입니다.(一以阻截 適從人獲見所?觀音眞影 何異見師 殊勝相也 但筆法何時到此地位歟 讚歎不能已 大?焦墨一法 爲不傳妙諦 偶因許癡發之 何料墨輪輪轉又及於師也 此像卷見爲黃山尙書所藏 尙書將欲手寫師所作讚語於其下 洵爲禪林藝圃一段佳話)

선가에 전해진 초묵법(焦墨法: 진한 먹을 사용하여 그리는 것)이 초의에게 전해졌고, 이를 소치가 이었다는 사실이 추사의 편지로 확인되었다.

 

▲ 미산의 소치 진영. 소치는 조선 남종화의 대가이면서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초의가 그린 관음상을 당시의 세도가인 김조순의 아들 황산 김유근이 소장하려고 했던 명화(名畵)이며 황산이 그 불화에 발문까지 쓰려고 했을 만큼 그림에 대한 초의의 명성은 높았다. 그러기에 그림에 열망을 지녔던 소치가 초의 스님을 찾은 것은 필연이었다.

그의 〈몽연록(夢緣錄)〉에는 당시의 상황을 “초의선사는 (나를)따뜻하게 대접해 주었고 방을 빌려주며 거처하도록 해 주었다(草衣款曲仍借榻留寓)”라고 회상하였다. 이후 소치는 대흥사 한산 전에 머물며 초의에게 불화를 배우는 한편 녹우당의 해남윤씨의 가장본 공재화첩과 〈고씨화보(高氏畵譜)〉, 그리고 공재 윤두서(恭齋尹斗緖)의 〈가전보희〉, 〈윤씨가보〉를 빌려 열람하는 등, 그림에 열중한다. 그가 윤 씨의 가전 본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은 꿈같은 일이었기에 “수일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감동을 받는다.

이는 모두 초의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초의의 이런 인맥은 다산의 문하에서 해남윤씨 후손인 윤종민, 윤종영, 윤종심, 윤종삼 등과 동문수학했던 인연 때문인데 이는 소치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의 〈몽연록(夢緣錄)〉에는 스승 초의와의 인연을 “아주 어릴 적에 초의선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멀리 돌아다닐 생각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이처럼 홀로 담담하고 고요하게 살았겠는가(早年不若草衣 何以遠遊之想 乃至今日而若是若孤淡寂也)”라고 하였다. 그에게 초의는 서화의 안목과 추사를 맺어준 은인이었다.

그가 “(초의선사와)수년을 왕래하다 보니 기질과 취미가 서로 동일하여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往來數載 氣味相同 至老不開)” 고 한 사실에서 가난 속에서도 담적(淡寂)할 수 있었던 속내는 초의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드러낸다.

불교와 가까웠던 그의 사유세계는 초의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는 그가 한산 전에 머물며 불화를 그렸던 사실이나 추사와 함께 ‘오백나한진영첩’을 참견(參見)하며 탁마했던 것에서도 그의 친불교적 경향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무튼 그의 일대사(一大事)에서 첫 행운은 초의를 만난 일이요, 두 번째 그의 인생행로를 새롭게 열어 준 이는 추사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가 추사를 만난 것은 1838년 8월경이다. 당시 금강산 유람 길에 오른 초의는 소치의 그림을 가져가 추사에게 보여 주었다. 추사는 한눈에 소치의 진면목을 간파하고 “압록강 이동에 소치만한 화가가 없다”고 평가한 후 초의에게 “허군의 그림 격조는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해 이미 격을 이루었다고 할 만합니다. 다만 보고 들은 것이 좁아 그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으니 빨리 한양으로 올라와 안목을 넓히는 것이 어떨지요(許君畵格 重見益妙 已足成格 特見聞有拘 不能快?驥足函令上來 以拓其眼如何)”라는 편지를 보내 소치의 상경을 종용하였다. 한양에 머물던 초의는 서둘러 이 사실을 소치에 전한다.

이 기별을 듣고 내종형과 함께 상경하던 소치는 소사 근처에서 초의를 만나 칠원점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다음 날 초의와 작별을 고한 후 스승이 써준 편지를 품에 안고 한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당시 진도에서 한양까지는 20여일이 족히 걸리는 먼 길이었다. 겨우 월성궁 추사 댁에 도착한 그는 “초의선사가 전하는 편지를 올리고 곧 추사선생에게 인사를 드렸다.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마치 옛날부터 서로 아는 것처럼 느꼈다. 추사 선생의 위대한 덕화가 사람을 감싸는 듯했다 그는 당시 상중이었다(所前納草師書封旋 卽邀入拜謁 初筵如舊相識 盛德浹人 公時自居憂)”고 하였다.

 

▲ 소치 허련의 배의관음도(박동춘 소장). 허련은 초의에게서 선가의 초묵법을 배웠다.

이 무렵 추사의 상중에 있었다. 그의 부친 김노경이 돌아갔기 때문이다. 추사의 문하에서 서화 공부에 몰두하던 1840년에 추사의 제주는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제주로 유배된 스승을 찾아 3번이나 대정을 오고갔던 그는 추사와 초의를 이어준 전령이었다. 여기에서 소치는 ‘오백나한진영’을 모사하며 불화의 세계에 몰입했던 듯한데 이는 1843년 7월에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 알 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소치는 매일 제 곁에서 많은 고화명첩을 보더니 지난해 겨울과 비교하면 또 얼마나 격조가 높아졌는지 그대와 함께 참증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오백나한진영’ 수십 권을 보고 있는데 만약 그대가 보면 분명 크게 욕심낼 겁니다. 허 소치와 함께 날마다 펴보는 이 즐거움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許痴日在傍側 多見古畵名帖 比之前冬 又長幾格 恨未令師參證耳 見有五百佛眞影數十冊 師若見之 必大生欲矣 與許痴日日對閱此樂何極)

소치의 그림 격조는 이 무렵 최상의 화격(畵格)을 이룬 듯하다. 이는 추사가 수집한 고화명첩을 토대로 자신의 그림 세계를 마음껏 확장하였다. 아울러 스승과 함께 ‘오백나한진영’을 참구하며 불화의 선미(禪味)도 이룬 때였다. 이 시절 그가 추사와 나눈 예술의 이상은 그의 서화에 밑거름이 되었고, 추사의 불교관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세월은 유한한 것이다. 그에게 추사의 죽음은 최상의 후견인을 잃은 것이며 예술을 담론할 스승을 잃은 것이었다. 고향 진도로 돌아가 운림산방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서화는 세상에서 호평을 받았는데 이는 정학연의 시를 통해 드러난다. 내용은 이렇다.

 

목단구(木丹邱)보다 그리는 법이 새로워라(若木丹邱腕法新)

동쪽 울타리 몇 송이 국화, 담담하기 그 사람 같네(東籬數朶淡如人)

국화 그림을 보더라도 다만 국화만이 아니니(縱看畵菊殊非菊)

이는 곧 소치가 (국화의)진수를 그린 것이라(便是痴生自寫眞)

소치의 그림 솜씨는 피사체의 골수를 그리는 능력을 타고났다. 정학연의 소치화첩 발문에 “마음속에 한 폭의 산수를 채비하여 늘 밝은 정신을 품어 세속을 초월하는 풍취가 있은 다음에야 붓을 들어 삼매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 경지는 소치 한 사람뿐이다(心窩裏準備一副邱壑 神明中常蘊 傲世絶俗之姿然後 落筆便入三昧 此世界小癡一人而已)”라고 극찬하였다. 남종화의 일격을 이룬 그의 그림은 그가 온축했던 예술의 이상 세계를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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