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 스님

 

▲ 칼에 묻은 꿀 143×74cm 종이에 수묵채색 2001, 어쩌면 인간의 삶은 칼끝에 묻은 꿀 한 방울을 먹기 위한 현실인지 모른다.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스님 법문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말을 지워나갔다

마지막 남은 단어가 ‘무아’였다

2003년 5월 대학 선배이신 자운형이 비구니 스님 한 분을 모시고 찾아왔다. 대전에 있는 선방에서 수행중인 상경 스님이라 했다. 세 사람은 동양화과 선후배로 공통의 관심사가 많아 대화의 물꼬를 트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로부터 인간의 이상에 이르기까지 편안하게 대화했다. 대화 말미에 이르자 스님은 노란 서류봉투 속에서 오래된 흑백사진 몇 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전강 스님과 송담 스님 사진이었다.

나는 전강 스님과 송담 스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말했다. 그러자 스님은 경허, 만공, 전강, 송담 스님으로 이어지는 선맥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선’이 미술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 했다. 선의 법맥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이 크지 않았다. 그래서 전강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다만, 스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전강 스님이라는 분이 훌륭한 분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전강 스님은 본인보다 더 큰 상좌를 키웠고 송담 스님은 은사스님의 뒤를 잇기 위해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느 사회든 대선사가 불쑥 솟아 나오지만 그 스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의문이다. 스승의 맥을 이으며 현장을 지키는 제자보다 큰 스님의 이름을 앞세워 살아가는 제자가 많다는 게 솔직한 현실이다. 왜 우리 시대에는 육조 혜능 같은 대선사가 없는가? 이와 달리 송담 스님은 은사스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후학들을 다스리고 있으니 존경받아 마땅하다 생각했다.

상경 스님은 전강 스님과 송담 스님 법문 CD를 보냈다. 많은 양이었지만 나의 무지를 깨우쳐 주려 한 스님의 마음 씀씀이와 공력에 감사하여 귀하게 다루었다. 전강 스님의 법문은 사투리와 억양이 독특해 말의 의미를 알아듣기까지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몇 달이 지나 상경 스님이 또 찾아 왔다. 이번엔 송담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평소 달마도를 즐겨 그리시는 송담 스님께서 인물과 산수 등 정통 수묵화를 배우고 싶어 하신다며, 내게 시간을 내어 수묵화 그리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스님의 제안에 더 이상 말문을 열지 않았다. 나와 생각이 많이 달랐고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전강 스님의 진영에 대한 일은 이렇게 시작 되었지만 스님과의 인연은 그것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훗날 상경 스님이 병이 깊어 입적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2014년 용주사 박물관장이신 보승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강 스님과 송담 스님의 진영을 모실 계획인데 전통회화 방식으로 그린 진영과 서양화 기법으로 그린 진영은 무슨 특성과 차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는바 가감 없이 답했다. 장고 끝에 그 작업을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다시 물어 왔다. 나는 순간 전강 스님과 관련하여 상경 스님과 이루지 못 한 인연이 떠올랐다. 인연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전강 스님의 진영에 대한 인연은 길고도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강 스님 진영을 모실 장소인 해남 대흥사로 갔다. 보승 스님과 대흥사 선원장 정찬 스님의 안내를 받아 박물관 내에 모실 공간을 살펴보았다. 그 후 다시 보승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번엔 내가 그린 법정 스님의 진영을 보고 싶다 했다. 길상사 진영각에 들러 법정 스님의 진영을 보고 인천 용화사까지 동행했다. 스님은 용화사에 모셔있는 전강 스님 진영을 보여 주었다. 모두 유화로 그린 초상화였다. 한 점은 오래전에 그린 작품이었고 나머지 한 점은 원작을 기초로 새로 그린 그림이었다. 스님들은 새로 그린 이 진영이 스님의 모습과 다르다 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그리게 된 것이다.

며칠 뒤 용화사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진영 작업을 위한 계약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스님과 계약을 하면서 계약금은 받지 않았다. 대신 작품 제작 과정에 대한 엄밀성에 대해 말씀 드렸다. 작가로서 성심성의를 다해 과정에 최선을 다 하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보승 스님은 한번 그린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완성된 그림은 그 위에 더 그릴 수는 있지만 지울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한 번은 더 그려 보겠다고 했다. 만약 두 번째 그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고 물러나겠으니 좋은 작가를 다시 찾으라고 말했다. 스님은 그럴 경우 경비는 어떻게 지불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작품 제작 과정에서 발생한 일체의 경비에 대해서도 비용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계약서에는 이런 내용을 적시하였다.

나는 계약을 한 뒤 이천 은선사를 찾아갔다. 전강 스님의 제자이신 혜영 스님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혜영 스님은 은사스님을 그릴 화가가 찾아 왔다는 사실에 고마워했다. 그리고는 평생 수집한 전강 스님에 대한 일체의 자료를 넘겨주셨다.

그 뒤 다시 은선사를 찾았다. 이번엔 혜영 스님께 전강 스님의 대역 모델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전강 스님과 비슷한 체구를 연출하기 위해 속옷을 여러 벌 껴입는 등 방불하게 보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스님의 진영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준 스님의 노력에 감사한다.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전강 스님의 법문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스님을 알아 가기에는 그것 이외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덮었다. 스님의 모든 말을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까지 남아있는 단어가 ‘무아’였다.

무아(無我)는 유아와 상대적인 개념의 말이다. 무아는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 설정해 놓은 선과 악에 기초해 차별을 만들어 낸다. 원래 차별은 없다.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존재한다. 궁극의 대상일 뿐이다. 차별은 내가 만든 형상의 또 다른 해석이다.

성찰이 필요했다. 선, 명상, 기도 어떤 것이든 공부해서 무아의 단계에 진입해 보기로 했다. 무아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과정이 필요할까? 수만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우선 생각을 절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생각을 줄이고 절제하여 더 이상 줄이거나 보탤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면 분별과 차별의 단계가 사라질 것이라 보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했다. 무아는 공부의 출발이었다. 그러면서 극점이었다.

전강 스님이 법상에 올라 법문을 하신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 소리를 듣던 날 130×96cm 종이에 수묵채색 2001, 성찰은 버려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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