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녀(俠女), 칼의 기억

홍이의 칼이 벤 것은 ‘오브제 프티 아’
“사감 버리고 대의 찾는 게 협의 길”
쿵푸와 공부는 정신수양에 목적 둬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는 영화를 보고 나면 세 인물 모두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협녀(俠女) : 칼의 기억’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무협(武俠)영화이다. 무협영화를 영어로는 쿵푸(kungfu)영화라고 한다. 이소룡, 성룡, 이연걸로 계승되는 히어로를 만든 홍콩의 무협영화는 쿵푸라는 무예를 제재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쿵푸의 한자는 공부(功夫)라는 사실이다. 학문을 닦는다는 의미의 공부(工夫)와 음이 같거니와 그 뜻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부(工夫)가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면 공부(功夫)는 무예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정신수양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그래서인지 무협 혹은 쿵푸 영화는 서사의 공식이 있는데, 영웅 신화와 유사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신화적인 영웅들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영웅은 왕과 왕비의 자식인데, 탄생 전에 이루어진 예언으로 인해서 태어나면 죽게 된다. 이 살해 기도는 부친의 발의에 의한 것도 많다. 아이는 신이 숨겨주어서 양부모 밑에서 자란다. 성인이 되면 영웅은 미래의 왕국을 향하고, 그 땅의 왕이나 거인 또는 악룡이나 괴수를 물리친다. 영웅은 왕녀와 결혼해서 왕이 된다. 그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그것은 가끔 산위에서이다. 이는 영웅의 출생, 왕위의 계승, 죽음에 관한 이야기의 3군으로 나뉘므로, 라그란은 탄생, 성인식, 장례라는 인생의 3대 의례와 관련성이 있다고 봤다. 반면 프로이트의 제자인 오토 랑크는 <영웅 탄생의 신화>를 통해 영웅신화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반영이라고 봤다.
쿵푸 영화도 지닌 장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인물들이 날아다니면서 칼을 휘두르는 활달한 액션이 주는 재미이고, 둘째는 자아정체성 찾기라는 교훈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협녀: 칼의 기억’도 비록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자아정체성 찾기라는 주제 면에서 돋보이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사형인 풍천을 배신한 유백(이병헌)과 유백을 사랑한 까닭에 사형을 배신하는 일에 본의아니게 일조한 것을 참회하면서 살아온 설랑(전도연)과 자신의 친 부모를 죽여야만 비극의 역사를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홍이(김고은) 등 3명이다.
영화는 두 번의 반전을 꾀하는데, 홍이가 자신의 부모를 죽인 것이 유백과 설랑이라는 사실을 아는 장면이 첫 번째 반전이고, 자신의 아버지는 풍천이 아니라 유백이라는 사실, 즉, 자신이 죽여야만 하는 인물이 실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아는 장면이 두 번째 반전이다.


자신의 부모를 죽여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점에서 홍이의 캐릭터는 오이디푸스 신화에 모티브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점은 오이디푸스는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하는 반면 홍이는 알면서도 아버지를 죽인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단점 중 하나가 자신의 부모를 죽여야 하는 홍이의 심리묘사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점은 홍이에게 복수심을 심어준 것이 설랑이므로 설랑의 심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홍이의 칼에 응징되는 것만이 풍천에게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설랑의 마음을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이 영화는 외려 대단히 새로운 지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이 영화 속에서 행해지는 홍이의 복수는 사적인 복수가 아닌 공적인 복수이고, 둘째, 그 복수를 통해서 진정한 자아찾기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설랑은 홍이에게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대의를 따르는 것이 협의 길”이라고 가르쳤고, 홍이는 어머니이기 전에 스승인 설랑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홍이는 복수의 날에 “풍천의 딸, 홍이가 왔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홍이가 죽이는 것은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외설적 아버지’, 즉, ‘오브제 프티 아(object little a)인 것이다. (라캉은 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눠 분석했다. 상상계는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서 자아를 구성하는 것과 같은 단계이다. 따라서 그 자아는 주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주체를 속이는 환영이다. 거울단계를 거친 어린아이는 다시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 단계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권위를 내면화한다. 상징계는 언어를 통해서 관계를 맺는 세계이다. 아버지란 이 질서의 대표자이자, 주체가 동일시하는 대타자이다. 욕망이 대상을 향하는 단계가 상상계이다. 그러나 그 대상을 얻는다고 욕망은 완성되지 않는다. 외려 어긋나 버린다. 이를 인식하는 게 상징계이다.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 발생하는 잉여쾌락에 의해 다시 욕망이 지속되는 것이 실재계이다. 이 잔여물을 ‘오브제 프티 아’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세 인물 모두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연민은 불교의 핵심 사상인 자비(慈悲)의 비(悲)에 해당한다.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애(慈)라면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연민(悲)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겨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관계의 바탕이 되는 숭고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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