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지장재일법회 도암 스님

▲ 도암 스님은 … 1991년 통도사에서 월파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통도사 승가대학, 동국대 철학과, 불교학과, 봉선사 능엄학림을 졸업했다. 백양사 강주를 지냈으며 송광사 강주로 후학을 양성한 바 있다.

 

지장보살은 전생에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지옥여행을 떠나게 된다. 지옥에 이른 지장보살은 그곳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중생이 무량한 윤회 속에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매가 아니었던 인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전까지는 절대 성불하지 않겠다”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서원을 세운다. 이에 대해 〈지장경〉에서는 ‘대자대비’의 시작은 부처님 법(佛法)에 대해 찬탄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도암 스님은 8월 31일 통도사 지장재일법회서 〈지장경〉이 주는 ‘효’의 가르침에 대해 설법했다. 도암 스님은 “전생으로 이어가다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 내 자식의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라 부처님은 말씀하셨다”며 “이러한 가르침을 찬탄해 세상 모든 이를 존중으로 대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그러면 부모자식 간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가 원만해질 수 있다”고 설했다. 정리=박아름 기자

 

마야부인위해 〈지장경〉 설법
‘효경’이라 일컫기도 해
찬탄하며 다가가야 ‘귀의’ 가능
일체마음 내려놓은 ‘대반야’ 자리
‘대지혜’ 발휘해 비우고 채워내야

지장경의 키워드 ‘孝’
달력을 보면 관음재일, 미타재일, 지장재일, 약사재일 등 여러 재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음력 7월 지장재일입니다. 지장재일은 지장보살님의 공덕과 자비, 지혜 그리고 지장보살님의 수행방법에 따라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 자신의 삶을 과거보단 현재, 현재보단 미래가 훨씬 더 좋아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지장경〉은 어떤 경일까요? 지장경은 부처님이 도리천(?利天)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하여 설법한 것을 모은 경전입니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낳으시고 7일 만에 세상을 떠나 천상세계인 도리천에 올라가게 되는데 부처님께서는 도를 이루고 나서 중생을 구제하시던 중에 먼저 세상을 떠난 모친까지도 교화의 대상으로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으로 어렵지 않게 도리천에 올라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을 하시는데 그 모습은 중생에게 법을 설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보면 아들이 모친에게 효도하는 모습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장경을 ‘효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을 하는 자리에 효(孝)와 관련된 많은 인연이 자리에 함께 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는 지장보살님과의 인연이 가장 많이 찾아왔다고 전해지는데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장보살님은 전생에 장자의 몸으로 태어나기도 했고 바라문 가문의 딸로 태어나기도 했습니다. 바라문녀로 살았던 지장보살은 대단한 효녀였습니다. 모친이 살아있을 때는 잘 모시려 했고 부처님 법으로 인도해서 좋은 원인에 좋은 결과를 맺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지장보살의 어머니는 그런 딸의 마음을 잘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지장보살의 노력으로 어머니의 불심이 조금 생기는가 싶으면 다시 되돌아가고를 반복하던 중에 지장보살의 어머니가 죽게 됐습니다. 그 후 지장보살은 진심을 다해 공양을 바쳐 각화정자재왕여래(覺華定自在王如來)의 힘으로 어머니를 찾아 지옥 여행을 하게 됐습니다.

불교의 경전 중에 효경은 부모은중경과 지장경이 있습니다. 〈부모은중경〉에 보면 전생의 전생으로 계속 올라가다보면 우리 인연 중에 내 부모, 내 형제, 자매가 아닌 인연이 없다고 말합니다. 지옥여행을 하던 지장보살은 당시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고 당연히 부모은중경의 내용도 깨닫고 있었습니다. 지장보살께서는 모친을 찾으러 지옥에 갔다가 무량한 세월 동안 자신과 맺었던 수많은 인연들이 지옥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지옥 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절대로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불법 의지해 공덕·복덕 닦기
〈지장경〉 앞부분을 보면 우리가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해야 할지 부처님께서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미소를 보이니 무량한 대광명운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대광명운이란 부처님이 지니신 지혜의 빛이라는 뜻으로 ‘광명’은 부처님이 갖추신 덕이 셀 수 없이 많다는 의미이고, ‘운(雲)’을 붙인 것은 많고 풍성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대광명운은 부처님이 지닌 광명의 크기가 우리의 인식의 한계로는 셀 수 없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지장경 앞에 보면

 

대원만 광명운 대자비 광명운 대지혜 광명운 대반야 광명운 대삼매 광명운 대길상 광명운 대복덕 광명운 대공덕 광명운 대귀의 광명운 대찬탄 광명운

 

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화엄산림 법문을 듣다 보면 ‘원만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말로 조금 바꿔 말하면 ‘완전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경전 등을 통해서 공부를 하지만 부처님과 같은 경지, 즉 ‘부처님의 신업, 구업, 의업 삼업을 닮아 나도 성불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게 된다면 그 자리에 징조가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 징조는 바로 자비스러운 모습입니다. ‘대자비 광명운’이라 하는데 자비는 어떻게 나오게 될까요? 그 모습은 ‘대반야 광명운’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반야’ 라는 말이 ‘지혜’라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금강경 중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已生起心)’ 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평소 말, 행동, 감정 등에서 습관에 빠져 한 상태에 머물러 있곤 합니다. 그에 대한 생각조차 그만하자고 하면서도 그 생각조차 계속하게 됩니다. 그것은 나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히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은 그만두고 싶지만 계속 되고 있는 상태에서 모든 일체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자리를 ‘대반야’라 합니다. 대반야의 자리에 들면 마음이 허공처럼 깨끗해집니다. 대반야를 ‘빈집’으로 표현한다면, 대지혜는 그 빈집에 신통력으로 가구를 언제든 들이고 치울 수 있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라도 언제든 쓸 수 있고 치울 수 있으며, 어떤 습관이라도 쓰고 싶을 때 꺼내 쓸 수 있고 쓰고 싶지 않을 때 원래 없었던 것처럼 지울 수 있다는 말니다.

우리가 법문을 듣다보면 ‘길상(吉祥)’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길상의 의미는 잘 모르실 것 같습니다. 〈지장경〉에 보면 ‘대길상 광명운’을 대복덕 광명운, 대공덕 광명운 이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수행을 할 때는 복덕과 공덕을 따로 닦습니다. 그런데 공덕과 복덕이 하나로 통일되는 자리가 대길상 광명운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또한 대지혜 광명운은 대삼매 광명운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가 화를 내는 순간을 생각해 봅시다. 화가 나는 그 분명한 순간에 우리는 똑똑하다고 느낄까요? 아니면 어리석다고 느낄까요? 그 순간에 우리는 자신이 분명하게 옳다고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화가 풀리고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후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화를 내며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볼 때 왜 어리석음을 모를까 하는 생각도 한번쯤 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 불교 수행자가 닦아야 할 기본적인 세 가지 공부 방법)을 반드시 닦아야 하는데 계(戒)를 닦는 것은 신업(身業)·구업(口業)·의업(意業)을 안정되게 만들기 위함을 목표로 합니다. 양심을 지키는 것 또한 계법의 일부입니다. 양심을 잘 지킬 때 우리는 불안하지 않지만 양심을 지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안절부절 하고 불안을 느낍니다.

계를 지켜서 선정을 희생하고 대삼매 광명운을 이뤄야 대반야 광명운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삼매를 닦기 위해선 복과 덕을 같이 닦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로 잘 완성된 모습이 바로 길상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복덕과 공덕을 닦을 때 우리는 어디에 의지해 정진해 나가야 할까요? 배를 타고 항구를 출발 했는데 어디로 갈지 모른다면 이것은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표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어디로 끌고 가야 할지, 혹은 내 인생 목표를 어디에 두고 어떤 방법으로 목표를 이루어야 할까 고민해야합니다. 세상에 여러 가지 좋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 제일 좋은 인생의 방법은 부처님 말씀입니다. 여기서 ‘대귀의 광명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님 법은 삼보에 귀의하며 배워야 하고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우는 마음은 ‘대찬탄 광명운’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보다 불법에 감복하고 찬탄하는 사람이 더 불법과 인연이 가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法 찬탄으로 ‘귀의’하다
부처님 법을 통해 우리는 부모님께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어른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효(孝)를 잘 모른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이 효도하고 싶어도 다가가기 어려운 현실도 있습니다. 또 요즘은 자녀를 많이 낳지 않습니다. 외동아들이나 외동딸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상황에 혹시라도 부모자식 사이가 좋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자식들이 효도할 수 있게 키우려면 어른들도 자식들이 다가오기 쉽도록 업(業)을 조정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아왔으니 너희들은 내게 무조건 잘해줘라’는 식으로 말했다면 부모자식 간 장벽은 더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초보자입니다. 나이가 적으나 많으나 운전을 처음 배우면 모두가 초보 운전자입니다. 처음 아이를 낳으면 초보 엄마가 되고 초보 아빠, 초보 할아버지, 첫 취직을 하면 초보 직장인으로 사회에 첫 걸음을 내딛게 됩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도 없이 많은 ‘초보’ 과정을 겪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당연히 수많은 배움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알만큼 알고 있으니 나를 가르칠 생각마라 할 것이 아니라 새로 배우는 마음 자세를 일상생활에까지 확대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떻게 배워야하는지 배움의 자세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두 속에 작은 돌이 하나가 들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이 들려 있습니다. 이렇게 길을 가게 된다면 양손에 들린 짐이 힘들까요? 구두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돌이 더 거치적거릴까요? 부모님들 중에선 구두 속 작은 돌처럼 자식을 대할 때 마다 작은 돌멩이 같은 습관들이 있을 겁니다.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주변이 모두 인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때 부처님의 삼보를 찬탄하게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 경전을 찬탄하다보면 경전의 말씀이 받아들여져 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부모, 형제, 자매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을 깨달아 아랫사람이라도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공경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내 습관을 바꿀 준비도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내 습관을 고쳤을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다 좋아질 것입니다.

〈지장경〉의 첫 시작은 찬탄하는 자리입니다. 법에 가까워지려면 법을 찬탄하고 아내와 가까워지려면 아내를 찬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귀의(吉祥)라는 말은 불법에 ‘기대다, 의지한다’는 의미로서 찬탄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불법에 기대어 생활하다 보면 공덕과 복덕을 닦는 자세가 나오게 되고 공덕과 복덕이 무르익어 하나로 통일되는 자리가 삼매(三昧, 한 가지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일심불란一心不亂의 경지)입니다. 삼매는 반야를 이룰 수 있는 힘이 되며 지혜는 반야를 방편으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현실에 실천 되었을 때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완벽한 모습과 같다고 말합니다.

불자님 모두 한 마음 모아서 내 가족의 행복과 지역사회, 국가, 세계를 위하는 큰마음을 내는 지장보살님과 같은 서원 세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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