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

정자난자 수정부터 ‘불교 생명’ 간주
죽음 정의… 수명과 체온, 식의 소멸
지혜와 자비 실천은 불교의 생명윤리
큰 보시는 ‘장기기증’ 등 생명 주는 것

 

▲ 김재성 교수는 … 1988년 서울대학원 철학과 석사, 1995년 일본 동경대학원 인도철학불교학과 석사 졸업, 2000년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8년~2012년 조계종 전통사상서 간행위원회 선임연구원, 2013년 마하보디명상심리대학원 교수 등 맡은 바 있으며, 현재 불교생명윤리협회 집행위원, 삼보정사 상임법사, 불교상담개발원 연구위원, 한국명상지도자협회 이사 등 역임 중이다. 저서로는 <불교의 이해> <현대사회와 불교생명윤리> 등 펴냈다.

생명윤리의 실천은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에서 시작된다. 한국은 OECD국가 중 자살률, 임신중절수술 비율 등에서 상위를 차지하고 있어 올바른 생명윤리의 정착이 시급한 과제다. 부처님은 ‘생명존중사상’을 널리 설파하며 “자신과 타인, 나아가 모든 생명체의 목숨을 해치지 말라”고 가르치셨지만, 중생들은 그 뜻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학교 교수는 9월 7일 조계사 교육관에서 열린 제1기 불교생명학교(주최 불교생명윤리협회)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김 교수는 “지혜와 자비가 불교 생명윤리적 실천의 토대이자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핵심적인 두 덕목”이라며 “이는 생명에 대한 무의미한 집착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설명했다. 한편 불교생명윤리협회는 9월 1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주 화요일 오후 2시 조계사 교육관 2층 대강의실서 ‘제1기 불교생명학교’를 진행한다. 정리=박아름 기자

 

불교가 바라보는 ‘생명’
현대 사회에서 불교생명윤리를 정립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생물학과 생명공학의 발달로 인간 생명에 대한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아와 성체세포를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는 난치병 치료를 위해 추진되고 있으며, 또 의료기술 발달과 함께 임신중절, 뇌사 상태의 연장 등 생명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안락사와 존엄사도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으며, 현대사회 인권의식의 고양은 사형제도 철폐를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불교는 생명윤리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생명의 시작과 그 끝인 죽음이 언제부터라고 보고 있는지, 그리고 불교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생명윤리는 어떻게 정립해야 하는지 등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과 연구, 토론이 필요한 때입니다.

불교의 인간관은 미혹한 범부와 깨달은 성인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을 극복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전미개오(轉迷開悟)의 방향성을 기본으로 합니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인이라는 여섯 범부의 세계, 즉 윤회하는 세계인 어리석음의 세계(迷界)에서 성문(아라한), 연각, 보살, 붓다의 성인의 세계(悟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연기의 원리로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조건에 의해 생성, 지속, 변화 소멸하는 연기적인 세계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12연기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취·유·생·노사우비고뇌 라고 하여 중생들의 괴로움이 발생하는 구조와 소멸하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으며,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와 삼계에 사는 6가지 생명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의 세계관을 계승하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을 더욱 강조하였고, 초기대승경전인 화엄경에서 보여주는 법계연기는 모든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의 상호연관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의 깨달음 내용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12연기입니다. 사성제를 깨달아 아라한이 되고 12연기를 깨달아 연각이 되며, 10바라밀을 완성하면 붓다가 된다고 했습니다. 대승불교는 마음과 중생과 붓다가 차별이 없음을 깨닫는 것을 강조하며, 생사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가 조금도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이루면 불성(佛性), 법성(法性), 공성(空性)으로서의 인간 본성을 회복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외부에서 들어온 번뇌를 없애버리고 본래 청정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깨달은 것이라고 합니다. 대승불교의 입장에서는 번뇌가 바로 보리(깨달음)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중생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어떤 중생이라도 자신의 생명은 아끼고 사랑하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생명도 사랑해야 한다고 붓다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향한 자비와 타자를 향한 자비가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생명의 소중함
초기경전에서는 맹구우목(盲龜遇木)의 우화를 통해 삶의 소중함과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맹구우목이란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가 한 마리 살고 있는데, 이 거북이는 백 년에 한 번씩 물 위로 머리를 내놓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바다 한가운데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를 만나면 잠시 거기에 목을 넣고 쉰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판자를 만나지 못하면 거북이는 그냥 물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처럼 부처님께서는 “5취를 윤회하면서 잠깐이라도 사람의 몸을 받기는 저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고 말하셨습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특히 어렵다는 것을 말하며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더라도 정신적 성숙을 이루어 더 나은 인간이나 천인 또는 성자가 되기는 더욱 어려운 법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육도에 윤회하는 모든 중생이 될 가능성과 성자가 될 가능성까지 열려 있습니다. 그것은 수행하기에는 인간계가 제일 좋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육도로 다시 떨어 질수도 있지만 바르게 수행하며 덕을 쌓으면 얼마든지 더 좋은 세계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우리가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더욱 수행정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생명관은 오온설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질과 정신으로 구성된 중생의 다섯 가지 요소가 바로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입니다. 물질, 육체와 더불어 감각, 느낌(受)과 지각, 판단(想), 의지적 행위(行), 의식(識)을 지닌 존재가 바로 생명체가 됩니다. 하지만 오온은 끊임없이 조건에 의해 변화하고 있으며, 길게는 한 개체의 태어남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생이 유지되고 엄밀하게는 찰나적으로 생멸합니다. 오온은 실제 하지만 오온의 배후에 고정불변의 자아(영혼)는 없고 이 오온이 생사를 이어갑니다. 이 때 ‘식(識)’을 종자로 한다면 ‘번뇌’(무명, 갈애, 집착)는 수분, ‘업’은 토양이 돼 생명은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식이나 증유 또는 중음식은 고정불변의 실체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연기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 생명의 시작을 정자와 난자의 수정의 순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초기불교 이래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설 때 임신중절과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생명을 손상시키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은 독립된 생명체로서 오온의 파괴를 의미하는데 수명과 체온과 식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 이해는 뇌사 상태가 완전한 죽음 상태는 아니며 뇌사와 함께 심폐사가 되어야 죽음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중을 강조하기 때문에 사형제도는 제도적인 살인으로 보며, 아무리 극악무도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도 교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자살과 안락사도 역시 살인에 해당하며 안락사의 대안으로는 자연사에 해당하는 존엄사를 지지하는 입장에 서있습니다. 하지만 병고로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철저한 간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터미널 케어로서의 완화의료인 호스피스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와 자비’의 실천-생명윤리
불교는 중생의 입장에서 “모든 악을 행하지 않으며(諸惡莫作),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여(衆善奉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해야한다(自淨其意)”라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팔정도를 실천하여 출세간의 열반에 도달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윤리적인 도덕규범인 계를 토대로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선정’과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체험적으로 이해하는 ‘지혜’를 닦아 해탈에 이르는 과정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계정혜의 삼학은 팔정도로 세분화되고 서로 해탈을 위한 수행(自利行)인 상구보리와 함께 남의 해탈을 돕는 수행(利他行)인 하화중생으로 제시됩니다. 자리행은 지혜를 추구하는 수행이며 이타행은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입니다. 초기경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자리행의 핵심은 염처수행이며 이타행은 인내와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입니다. 바로 지혜와 자비가 불교 생명윤리적 실천의 토대이자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핵심적인 두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세간적인 가치를 넘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덕목이므로, 생명에 대한 무의미한 집착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의도적인 행위의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뇌사자가 되기 전에 자신의 의지로 장기기증을 천명하는 지혜를 발휘해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이타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존엄사도 생명의 가치와 한계를 아는 지혜로 맞이하는 자연스러운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윤리는 지혜와 자비의 실천입니다.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하는 경우에 본인의 장기기증 의사가 있었다면 그 뜻을 존중해주어야 할 보시의 정신으로 보고 있습니다. 보시 중에서 가장 큰 보시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신체 일부를 주는 것, 세 번째는 물질을 주는 보시입니다. 하지만 장기기증의 경우는 가족이 반대한다면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가족 중에 장기기증을 원하는 분이 있다면 본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 장기기증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야 한다는 측면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반대하는 일에 대해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기준에 대해서 어려운 부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스러운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무엇인가 라는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환자가 심폐정지가 온다면 병원에서는 당연히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실시할 것입니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가 악화되어 회복이 어려워 고통이 지속되고 있다면 본인의 의사로 심폐정지가 왔을 때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을 하지 않고 그대로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해서는 환자가 이미 죽음의 단계로 들어갔고 더 이상 살려낼 수 없는 단계에 들어갔을 때 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본인의 자각이 있을 때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또한 사형제는 제도적 살인으로 불교에서는 반대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사형수들의 인권만 있고 피해자의 인권은 없느냐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죽인다고 피해자의 인권이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교화를 해야 할 대상이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은 연기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 적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를 우리의 이 생명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임을 몇 번이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고양된 인권의식 만큼이나 생명윤리 의식이 불교를 통해 바르게 정립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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