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한다 하는 것은 쉴 사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 그대로 관하는 거지,
관하는 장소가 따로 있고 기도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 그림 최주현
어떤 관법으로 공부를 이끌고 계신지요
질문 큰스님께서는 수없는 세월을 통해서 저희 불자들을 이끌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 안에서도 수없이 많은 차원의 신도들이 있기에 그들의 근기에 따른 수행의 방법도 또한 천차만별로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스님께서는 관법을 통해서 중생들을 제도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관법인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답변 예, 행주좌와 관법(行住坐臥觀法)으로…. 우리가 말입니다, 부처님 법 아닌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왜 행주좌와 관법이냐 하면 자기의 관법이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상대가 있는 거고 세상이 벌어진 거지, 자기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무효지. 안 그래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모두가 벌어지니까 자기부터 알아야 하는데, 자기의 이 생산된 육체가 바로 화두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화두를 잡아서 해도 돌아갔지만, 그게 먹혀들어 갔지만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왜냐? 겉돌아서요. 왜 겉도느냐? 세계를 안방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움죽거리는 모든 걸 안방에서 볼 수 있는데다가 핑핑핑핑 돌아가는 그 머리 때문입니다. 육체가 탄생한 것도 화두이고,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하는 것도 화두인데, 그 화두에다가 관법을 또 받아 가지고 하니까 겉돌 수밖에요. 행주좌와 관법은 시대가 요하는 겁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문명이 발전하고 그럴 때는 반드시 시대에 순응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뒤를 쫓아가라는 게 아닙니다, 앞장서란 거지. 불을 밝혀서 앞장서란 거지. 그렇기 때문에 행주좌와 관법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지금 쉬지 않고 지구가 돌아가는가 하면 우주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있는 게 없어요. 그런데다가 내 이 육체 속의 자생 중생들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 육체가 쉬면서 돌아갑니까? 이거 보세요. 자는 것도 자는 게 아니고 눈을 뜬 것도 뜬 게 아니에요. 보는 거, 듣는 거, 먹는 거, 하는 거, 만나는 거, 가고 오는 것이 어느 하나도 고정된 게 없어요. 그랬으니 공했지. 내가 한 게 따로 없으니 물 한 컵을 마셔도 더불어 같이 마신 거기 때문에 공식(共食)이에요. 보세요. 공생(共生)·공심(共心)·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 하고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거 먹을 때, 어떤 거 할 때, 어떤 거 봤을 때, 어떤 거 움죽거렸을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정한 겁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모두 같이 한마음으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여래지, 개별적인 하나가 깨달았다고 해서 여래가 아니에요. 개별적인 하나가 깨달으면 전체가 다 들려야만이 그것이…. 깨달은 사람이 수만 명이다 할지라도 깨달은 그 한마음 처에 같이하기 때문에 여래인 겁니다.
여러분이 배울 때 잘 배워야지, 예를 들어 처음에 피아노 배울 때 처음 배우는 거라고 아무렇게나 생각해서, ‘삐뚤게 앉아서 해도 괜찮지. 요다음에 배워서 잘하지.’ 이럭하면 안 됩니다. 앉음앉음이 굳어져서요, 제대로 배울 수가 없죠. 그와 같이 인간도 마음의 오계(五戒)에, 오계향(五戒香)에 첫째, 내 마음으로부터 다져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 우선이죠. 모든 게 나로 인해서 생긴 거니까. 소가 언덕이 있어서 비비는 거지 언덕이 없다면 비빌 수가 없고 소가 없다면 비벼지지도 않죠. 그와 같이 인간도 내가 있어서 상대가 있기 때문에, 잘했든 못했든 내 탓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잘했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못했으면 ‘못한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잘하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다!’ 하고 거기 놔라 이러는 겁니다. 이렇게 모든 생활에서 관한다 하는 것은 쉴 사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 그대로 관하는 거지, 관하는 장소가 따로 있고 기도하는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기도라는 말을 안 합니다. 관이라고 그러죠. 기도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기도라는 말을 안 합니다. 그래서 이 법당에 오더라도 부처님 앞에 삼배를 올리든 일배를 올리든, 내가 부처님 앞에 한마음으로 넣고 일배를 올려도 올리고, 일어날 때는 한마음으로 나와 같이 하고서 일어나라 이겁니다. 그러면 이리로 가도 하나요 저리로 가도 하나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깨달을 수도 없거니와 이 진리를 파악할 수도 없습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버스간에 몽땅 타고 앉아서 버스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살기 위해서 잡아먹는 게 아닌지요
질문 동물의 세계를 보게 되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우리 인간 세상도 똑같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인간의 세상도 동물들처럼,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단지 잡아먹는 게 아닐까요?
답변 내가 항상 그렇게 말하죠. 미생물에서부터 진화되면서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쫓고 쫓기면서 잡아먹고 잡아먹히고 이러면서 인간까지 등장했다 이거죠. 그래서 그 짐승은, 내가 그것을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되게끔 벌써 그렇게 정해졌어요. 그래 가지곤 서로 잡아먹게 돼 있어요. 근데 인간은 꺼풀을 살짝 씌워 놨어요. 이 지금 인간으로 꺼풀을 살짝 씌워 놨거든요.


동물하고 똑같은데, 동물 마음이 지금 이 속에는 막 우글우글한데 사람으로 싹 씌워 놨거든요. 그래 놓고는 사람들끼리 서로 진짜 이렇게 잡아먹지는 않지만 그러나 마음으로는 잡아먹고 살아요. 마음으로는 잡아먹고 죽이고 살리고 쫓고 쫓기면서 살거든요. 이것도 전쟁입니다. 그러니 이 쫓고 쫓기는 세상 속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얘기예요. 이 인간 세상까지 벗어나야만이 부처의 도리를 다 알 수 있고 또 그 중생들을 다 살릴 수가 있다 이겁니다. 건질 수가 있다. 그러니까 그 중생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이 지금 꺼풀 씌워 놓은 그 속에 있는 수많은 중생들을 벗어나야 그 중생들을 건질 수가 있거든요. 그 중생들하고 같이 그냥 복닥거리면 항아리 속에서 항아리를 어떻게 굴릴 수 있겠느냐? 그 항아리를 벗어나야 내 몸뚱이 항아리를 굴릴 수 있다 이겁니다. 마음대로 굴릴 수가 있다. 천차만별의 그 마음들을 마음대로 굴릴 수가 있다. 그래 내가 벗어나야, 이걸 굴릴 수 있어야, 즉 말하자면 화신으로서, 전부 응신으로서 털구멍을 통해서 그냥 들고 나면서 모두 사람들을 건지는 게 보살이다 이 얘기죠.


그러니까 누가 보살이라고 이름을 안 지어 줘도 보살행을 하면 됐지, 보살이라고 이름을 안 불러 준다고 그것도 생각지 말라 이겁니다. 무슨 누가 보살이라고 생각을 안 해 주면 어떻고 불러 주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나만 즐겁게 웃으면서 응신이 돼서 건져 주면 됐지. 내 아픔과 똑같은데. 울면 나도 우는데. 그런데 내가 울지 않고 정말 즐겁게 웃으면서 길을 걷는데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생활하면서 그대로 생활이 실상이고 실상이 바로 참선이고 마음이 편안하면 좌선이니 그렇게 굴지 말라 이겁니다. 네 몸뚱이를 동여매 놓고, 선방에다 꿇어앉혀 놓고 그래 가지곤 몸뚱이에 병이 들게 하고 그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의 마음을 괴롭게 만들고, 이렇게 하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러는 것은 외려 중생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거니까. 자기의 몸뚱이를 괴롭히고 자기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을 괴롭히고 그러는 거니까. 이거를 모두가 알면 좋을 텐데, 모두 글쎄, 그냥 부처님 경전에 관념이, 착이 딱 붙어 가지고, “아이고, 경전의 부처님 말씀만이 제일이지.” 이러지 말고 자기부터 봐라 이겁니다. 자기부터. 자기부터 봐야 부처님 말씀도 훤하다 이겁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부처님의 마음을 어찌 알겠습니까.

깨치는 과정에 대해서
질문 깨치는 과정을 보면 어떤 분은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서 밝아지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어떤 계기로 해서 확 깨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답변 아, 이런 예도 있죠. 예전에도 얘기했지마는 경허 스님도 아주 대 강백으로 유명하게 이름을 날렸던 분입니다. 경전이라는 경전은 무불통지하고요. 그랬는데, 호열자가 돌아다니는 마을에 들어섰는데 그거를 알아도 어쩌지 못했단 얘기입니다. 하룻밤 자고 가자니까, 죽으니까 빨리 달아나라고 그러거든요. 이 집 가도 그러고 저 집 가도 그러고. 그러니까 인심이 고약한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호열자가 돌아다녀서 사람이 전부 쓰러졌더라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살려고 그 고을을 벗어나서, 나무 밑에 앉아서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더라는 얘기죠. 세상에 자기도 죽을까 봐 뛰어나왔거니와 그 사람네들을 하나도 어쩌지 못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 여직껏 배우고 여직껏 강의한 게 무슨 소용 있느냐 이래서, 다시 돌아와서 강당을 그냥 문 닫아걸고서 다 해체를 시켰단 얘기죠. 그러고 자기 공부를 시작하고 책을 다 태웠다는 얘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이 선에는, 즉 말하자면 견성, 이거는 내면세계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견성을 해 가지고도 거기다 다시 뭉쳐 놓지 않는다면 미해진다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왜 미해지느냐. 흩어지니까. 그걸 갖다가 자기가 견성했다고 온통 자기라고 내세웠을 때 벌써 착이 붙고 욕심이 붙고 아만이 생기고, 삼독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견성을 했어도. 그래서 다시 뭉쳐 놨을 때에 둘이 아닌 도리를 그때 홀연히 알게 되죠. 그래서 견성을 하고 성불을 해야 그다음에 열반경지에 들어서서 자유인이 된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 둘이 아니게 나툴 줄 알게끔 됐을 때에 비로소 그 원 하나 탁 놓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봉우라지 하나 탁 올려놓는, 그것이 돈오다 이겁니다. 그것도 그렇게 이름을 해서 돈오지 그걸 어떻게 돈오라고 이름을 붙이겠습니까, 그 경지에.
그러니 이 죽은 세상 즉, 보이지 않는 세상을 접하는 때라 견성을 하고 나면 그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때 대 의정이 생기고 그때에 시공이 초월된 것도 거기서 배우게 되고, 찰나찰나도 거기서 배우게 되고요, 둘이 아닌 도리 배울 때. 그러니까 나 하나의 마음이 수천수만으로, 입자로 인해서 분자가 돼 가지고 화신으로 화해 가지고 이 털구멍으로 들고 나면서 그냥 전부 응신이 돼 주는 그런 보살이 된다 이거죠. 그랬을 때에 그것이 모두가 보살 아닌 게 없고 또 나 아님이 없고, 이 도리가 나오고 그러는 거지, 그 도리를 거치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죽은 세상의 죽은 사람도, 보이지 않는 영혼도 보이는 영혼도 또는 생각이 없는 영혼도 생각이 있는 영혼도 모두 그냥 다 건질 수 있는 아주 광대무변한 그런 도리. 부처라는 건 어느 게 부처인지 모르는…, 아니,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까요? 말을 붙일 수가 없어요. 어느 게 찰나찰나 아니 되는 게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내 한마음이 이 우주를 전체 덮고 전체 굴리고 전체 딛고 그러기 때문에, 어떤 걸 어떻게 갈라서 말할 건덕지가 하나도, 말할 아무것도 없다 이겁니다. 이름 붙일 수가 없다 이겁니다.

스님과 한자리를 할 수 있겠는지요
질문 저희들과 같은 중생의 차원에서도 스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만 공부하면 세 단계 없는 세 단계를 무난히 넘어서서 스님과 한자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답변 예. 실천을 지금 가르치는 건데 왜 안되겠습니까? 나는 그러한 것을 말로만 해 놓고 만약에 그것이 한데 떨어진다면 이런 말을 안 한다고 아주 다짐하고 이 세상을 살아왔으니까요. 여러분한테 한마디라도 거짓된 말을 해서, 안되는 말을 해서 여러분이 해를 본다면 나 또한 여러분과 같이 해를 볼 겁니다. 왜냐하면 망을 본 놈도 도둑놈이요, 가서 훔친 놈도 도둑놈이요, 가지고 가는 놈도 도둑놈이니까. 붙잡히게 되면 다 같이 붙잡히게 됩니다, 도둑놈으로. 그러니 내가 한마디 했을 때에 내가 어찌 그것을 한만히 말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진실된 말이 아니고 진실되게 우리가 살림하는 행이 아니라면…. 그대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그런 실상의 실현과 실행이 되는데 어찌 그걸 거짓으로 돌리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익 하게 사시라고 하는 얘기죠. 여러분은 그저 어떠한 악이 들어오더라도, 아까도 전화가 왔어요. 누가 어디 붙잡혀 갔답니다. 나라의 제일 큰 데로. 허허허. 그랬는데 벌써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니까 정성을 한번 들여 놓고 여기다가 턱 맡겨 놓고는 있으니까 그게 그냥 스르르 풀려서, 어떻게 됐든지 하여튼 문 밖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게 내가 실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거지, 내가 죽어서 천당에 가려고 믿습니까? 오늘 없는 내일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모자라는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고 해서 모자라는 게 자라집니까? 죽으면, 이 몸뚱이가 없으면 부딪칠 게 없어서 공부도 못 합니다. 그걸 아셔야죠. 그러니까 죽기 전에 공부 열심히 해라 이거죠. 악한 거, 모든 걸 빼 버려라. 악하지 않더라도 경우를 따지지 마라. 이게 옳고 이게 그르고 이런 거 따진다면 벌써 이 공부 하는 데는 팡입니다.

마음과 주인공의 차이
질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을 할 때 그 ‘마음’과 주인공이라고 하는 그 ‘참나’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마음이라는 말이 워낙 미묘한 표현인지라 일상생활에서 흔히 마음을 말하면서도, 솔직히 말씀드려 마음의 정체를 꼭 집어내듯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가르침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답변 마음이라는 것은 한 물체가 (물컵을 가리키시며)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고, 물체가 움죽거리는 거는 공(空)이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주인(主人)은 마음이요, 마음을 내는 것은 공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건 이름이죠. 이렇게 그냥 섰을 뿐이고 (찻숟가락을 세워 들어 보이시며) 이게 돌아갔을 때는 (찻숟가락을 돌려 보이시며) 바로 공이에요. 그러니까 바로 마음이라는 것은 그냥 그 능력을 말하고, 그 능력을 배출함에 있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 거를 공이다 했으니, 마음과 공한 것이 어떻게 둘입니까? 그러니까 주인이 마음이라면 공은 바로 돌아가는 거다. 그러니까 마음과 돌아가는 것을 그냥 한데 합쳐서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했던 거죠. 그러니까 달리 보지 마십시오.

불성과 무명에 대해서
질문 우리 인간에 대해 한편으로는 불성을 지닌 인간이라고 그러고, 또 한편으로는 무명에 휩싸인 그런 인간이라고 그러는데요, 그 두 가지의 개념이 잘 조화가 안되는 것 같습니다.
답변 조화가 왜 안돼요? 요런 걸로 비유해 봅시다. 나무가 큰 나무가 있고 작은 나무가 있죠? 왜 작은 나무라고 했고 왜 큰 나무라고 했을까요? 왜 고목이라고 했고. 왜 그런 단어가 나왔고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 그리고 산은 높고 낮다고, 얕은 산이 있다고 왜 그런 말이 나왔습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은 바로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이 없다면 얕은 산이라는 그 언어도 나오지 않았을 거고, 또 얕은 산이 없다면 높은 산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넓게 따지고 본다면 ‘얕은 산도 얕은 산이 아니요 높은 산도 높은 산이 아니니라.’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사생의 천차만별의 생명들이, 생명이 있는 거는 다 불성이 있는 법인데 어째서, 어째서 그것이 어우러지지가 않습니까? 지금 당장 봐도요, 저 풀도 길고 짧고 길고 짧고 그럽디다, 저게. 똑같이 잘라 놨는데도 먼저 쓱 나오는 게 있고 그래요. 그런 것도 어우러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깐 우리가 이 진리를 탐구하는 데는 얕다 높다, 동이다 서다, 여자다 남자다, 잘못한다 잘한다, 모른다 안다 이런 거를 몽땅 놓는 것이 바로 선맥을 이어 나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만한 거 하나 다 나한테서 나온 거니깐 바로 나한테서 해결하고 나한테서 잘된 거니까 나한테다 감사하고, 내가 갔으니까 남을 원망할 게 아니라 내 탓이고, 이렇게만 한군데로 뭉쳐 놓는다면 이 세상을 다 가질 것도 없고, 또 그 한군데로 뭉쳐 놓는다면 나중에는 자기를 홀연히 발견하게 되고 그때서는 ‘아이고, 알고 보니까 하나도 버릴 게 없구나. 나 아님이 없구나. 아, 어저께 오늘이 따로 없고 하나가 따로 없고 만이 따로 없구나.’ 이렇게 알게 됨으로써 부처님이 행하시는 중용처럼, 실상처럼 그냥 이걸로도 나투시고 저걸로도 나투시고 한 찰나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저 보살의 마음속에 한 찰나에 들었다 한 찰나에 그 좋은, 귀중한 설법을 하고 나시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게 삼천 년 전도 지금도 꾸준히 이렇게 평등하게 물이 흐르고 있는데도 안된다고요? 그렇게는 생각지 마세요. 하다못해 기어가는 버러지도 생명이 있는 거는 다 불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도요, 만약에 옛날의 선조들, 선사들 같으면, 나라에 싸움이 일어난다거나 그런다면 이 꽃 이파리 한 이파리 한 이파리를 군사로 만들어서 보낼 수도 있다고 그랬어요. 그것이 바로 이보경계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급하니까 마음을 내는 게 이보예요. 한 발 내려딛는 거를 말해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나라의 국민을 다 죽게 만드는 그런 이치가 있다면 땅속에 있는 무기들도 전부 녹이 슬게 딱 만들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법이고요 중단시키는 것도, 사람의 마음을 다 내 부처님의 마음이 돼서 보살이 돼 가지고 다 그 마음으로 다듬어서 그런 마음이 생기게 해서 일을 만들어 놓고 행하게 만드는 겁니다. 또 너무 국민들한테 나쁘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저지르고 자기가 손발 들고 나가게 만드시고 그러는 거지, 누가 말을 하고 때리고 갖다 가두고 이러는 게 없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법을, 이렇게 광대무변한 법을 어째서 우리는 외면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왜 외면을 합니까? 제일 중한, 자기 아픔을 거두어 주는 그 자기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저기 나가시다 엎드러져 보세요. 무르팍이 깨져 보세요. 벌써 거기 손 가는 건 남의 손이 가는 게 아니라 “어이쿠!” 그러고선 “아파!” 하곤 그 손이, 바로 십대 제자가 거기 갑니다. 허허허.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이 십대 제자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무명의 근원지가 어딘지요?” 또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한마디를 하면 봇장이 울려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니깐 또 그런 질문도 나옵니다만, 우리가 지수화풍이라는 그 소리를 부처님께서 왜 자꾸 하셨고 우리도 자꾸 하는지, 이게 지금 천체가 지수화풍 아닌 게 없습니다. 근데 그 지수화풍이, 즉 말하자면 바람과 흙과 물이 한데 합쳐서 혼합이 되니까 온기가 생겼어요, 불이. 온기가 생겨서 그것이 바로 생명의 근원지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러니 딴 데 가서 찾지 말고, 그 근원지가 됐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몸으로 낳게 만들었거든. 그리고 ‘몸속의, 너희가 역대에 거쳐서 진화돼서 올라온 그 자체의 근원지를 봐라.’ 하고 인연에 따라선 그 근원지에, 미생물이나 모든 모습도 갖가지로 그 몸속에 다 두고 있어요. 그리고 나올 때 물주머니로 나오게 만들었죠? 어떻습니까? 지수화풍의 근원지라 이겁니다.
또 지수화풍의 근원지면 우리는 지수화풍의 근원지를 가졌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살아요.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이 세계가 발달할 수도 없고 연구할 수도 없거니와 과학이라는 그 소리도 안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끝 간 데 없는 진리가 될 수도 없거니와 풀 한 포기만 살아도 불교가 그대로 있다는 그 사실을 아마 모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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