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일요특강 - 윤청광 작가

‘무소유(無所有)’의 진정한 의미는 ‘물질 그 자체를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닌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생전 무소유에 대해 “가난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가진 것을 이타적으로 쓰면 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셨다. 윤청광 작가는 8월 30일 서울 성북동 길상사 일요법회서 40여년을 이어온 법정 스님과 인연을 소개하며 ‘법정, 마음에 꽃 피우다’ 강연을 진행했다. 윤 작가는 “1960년 대 군사정권을 비판하다 어려움을 겪은 시기에 법정 스님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며 “법정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크셨다. 스님은 이 세상에서 시줏밥을 얻어먹었으니 밥값은 해야 한다며 맑고 향기롭게 사는 법을 실천하기 시작하셨다”고 회고했다.
한편 길상사는 법정 스님 올해 입적 5주기를 맞아 법정 스님과 인연 있는 불자들을 초청해 법정 스님의 사상과 정신을 되돌아보는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윤청광 작가는 … 前 맑고향기롭게살아가기운동 본부장을 역임하고, MBC문화방송에서 ‘오발탄’ ‘신문고’ ‘전설따라 삼천리’ ‘세계 속의 한국인’ 등을 집필했다. 저서로는 〈불교를 알면 평생이 즐겁다〉 〈불경과 성경 왜 이렇게 같을까〉 〈회색고무신〉 등을 펴냈다. 현재 동국출판사 대표, 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이사, 인사클럽 회장 등 맡고 있다.

 

군사정권시절 법정 스님과 인연
‘맑고 향기롭게’ 사는 법 연구 당부
“이제 제대로 살라”며 본부장 맡겨
가진것 이타적으로 써야 ‘무소유’

 

법정 스님과 ‘맑고 향기롭게’
저는 1965년부터 문화방송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군사독재 아래 암울했던 시절, 그것이 법정 스님과 저의 인연이 됐습니다. 5ㆍ16군사정변 이후에 제가 다니던 동국대학교에 군 장성들이 권총을 차고 학내로 들어왔습니다. 순식간에 학교 캠퍼스는 군부대로 변했고 학교 총장실에는 군인들이 들어차 총장과 학장에게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쏟아 부었습니다. 군인들은 데모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당시 능력 있는 많은 교수님이 자리에서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칙을 엄하게 제정해 데모하는 학생들을 관리하도록 시켰습니다.

당시 저는 학생 기자였습니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가 군에 빼앗긴 모습이 너무 화가 나서 기사를 썼습니다. 당시의 정부를 비방하는 내용이었는데 남대문에 있던 인쇄소에서 발행 전 모두 모두 압수되었습니다. 그 신문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저는 동국대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사연이 당시 동국대 불교대학에 알려져 법정 스님과 만남으로 이어졌습니다. 저는 ‘동서문화원’이라는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동국대 김영한 교수님께서 법정 스님을 제게 소개시켜주셨습니다. 김영한 교수님은 다방에서 법정 스님에게 “스님 책 한 권 내셔야죠”하며 저를 소개해 줬습니다. 법정 스님 또한 당시 정부와 마찰음을 일으키고 있던 때입니다.

그때 우리나라가 월남전에 참전하게 됐는데 총무원에서 전국 각 사찰에다가 ‘무훈장구(武勳長久) 기도회’를 열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자 법정 스님이 불교신문에 글을 기재했습니다. “장병들이 무사히 회향할 수 있도록 올리는 기도면 모르겠지만 사람을 많이 죽이고 오라는 기도는 불교의 불살생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할 수 없다”라는 글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법정 스님에 대해 정부의 감시가 시작됐습니다. 당시의 저도 법정 스님처럼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매질을 당하기도 하고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법정 스님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부분이 통하여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법정 스님은 1972년 12월 〈영혼의 모음〉이라는 첫 책을 내셨습니다. 수필집이었지만 제목이 너무 어려워서인지 책은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내용은 똑같고 제목만 달리하여 〈무소유〉 책이 발간됐습니다.

1995년부터 저는 문화방송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맡으며 방송인으로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저는 방송국에서도 쫓겨나게 됐습니다. 제가 했던 프로그램은 ‘오발탄’ ‘신문고’ 등으로 정부에서 듣기 싫은 소리만 했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이 모두 폐지되고 저는 또 갈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풍토가 남아있는데 당시에는 조금만 반정부적인 태도를 보여도 속히 ‘빨갱이’라고 치부해버렸습니다. 사실 부처님이나 예수님도 살아계실 적에는 모두 빨갱이 취급을 당했습니다. 사회체제를 비판하고 평등과 사랑을 주장했으니 어느 사회 기득권이 그들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처형당했으며, 부처님은 여러 암살시도를 겪으셨습니다. 이처럼 권력층에 반대하면 무조건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 때문에 저는 일을 새로 구하기 힘들었고 다시 출판협회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법정 스님의 연락을 받고 법륜사로 갔습니다. 그날 저 말고도 몇 분이 더 모여 계셨습니다.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철이 들라고 하는지 밥값을 해야겠다” 하시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시주 밥을 먹었으니 밥값을 하고 가야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없고 한 가지 생각이 나서 이 자리를 만들게 됐다”는 뜻이셨습니다. 그러더니 ‘맑고 향기롭게’라 적힌 말을 저희에게 보여주며 이것을 어떻게 해야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하셨습니다. 스님은 돈을 몇 배로 준다며 법문을 요청해도 움직이지 않으실 만큼 번거로운 것, 사람 만나는 것 모두 싫어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어느 날 불현듯 자발적으로 사회운동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후 저는 스님이 내주신 숙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오래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스님이 한번은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연구는 해봤냐’는 스님 말씀에 ‘마음을 향기롭게, 세상을 향기롭게, 자연을 향기롭게’ 이 세 가지를 말씀드렸더니 스님께서 무릎을 치시며 ‘바로 이거다’ 하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맑고 향기롭게’ 본부의 실천덕목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이것을 다 실천한다면 세상은 분명 맑고 향기로워질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맑고 향기롭게’ 실천본부가 만들어져 조직을 구성하게 됐습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부서를 만들 때였는데 스님께서 저를 본부장으로 지목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술, 담배도 많이 하고 절대 맑고 향기롭게 살아오지 못했다며 한사코 고사 했지만 스님께서 “그동안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제 제대로 살아”라는 말씀에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17년 동안 엉터리 본부장을 맡아왔습니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
저는 수십 수백억을 두고 재벌가에서나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법정 스님처럼 엄청난 금액의 보시가 들어와도 거절하는 모습은 평생 처음 봤습니다. 어느 날 스님의 〈무소유〉를 감명 깊게 읽었다며 김영한 보살이 법정 스님을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김영한 보살은 “제가 성북동에 요정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스님께 시주하고 싶습니다. 받아주십시오”라고 청했지만 스님께선 다른 좋은 분께 시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로 “받으십시오”하면 “못 받겠다” 하는 김영한 보살님과 법정 스님의 싸움이 10년 간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결국 그 때 요정이 있던 자리가 지금 바로 길상사 터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와 마음은 우리의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가질수록 행복하다 느끼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나만 잘돼야 한다, 우리 식구 잘돼야 한다’는 이기심에서 옵니다. 반면에 모든 행복은 남을 생각하는 이타심에서 옵니다. 법정 스님은 생전 법문을 설하실 때 ‘욕심은 More & More(점점 더 많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욕심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입니다. 자유경제주의를 택한 나라마다 점점 피폐해지고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길상사의 상징은 법정 스님이고 법정 스님의 상징은 무소유입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말씀하셨지만 가난하게 살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 정당하게 번 돈을 좋은 곳에 이타적으로 쓰면 되는 것입니다. 가난을 핑계 삼아 무소유를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담배를 하루에 두 갑을 넘게 태웠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속히 ‘줄담배’라 할 만큼 엄청나게 많이 피웠습니다. 담배를 많이 피우게 되면 당연히 냄새가 많이 나는데 저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스님을 차로 모시면 스님은 언제나 조수석에 타셨는데 담배 냄새가 스님을 괴롭게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죄스러워 눈물이 다 날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시력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 가게 됐습니다.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이 “망막에 염증이 생겼는데 담배 끊으셔야 합니다”라며 담배를 끊어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담배와 제 눈을 바꿀 수는 없어 그때부터 금연 하게 됐습니다. 담배를 끊게 되자 제일 좋아하셨던 것은 법정 스님이었습니다. 진작 끊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스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쌓아두기 말고 단순하게
법정 스님은 사실 예전엔 괴팍하기도 하고 괴짜 같은 면도 있으셨습니다. 어느 날은 한 신도가 책을 가져오며 “스님 한 말씀만 적어주세요”라고 했는데 정말 책에다 “한 말씀” 세 글자를 적어주기도 했습니다. 또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셔서 잘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맑고 향기롭게’ 활동을 하면서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원래 스님은 다른 절은 말할 것도 없고 송광사에서조차 법회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강화 선원사의 주지 스님이 선원사를 다시 복원하며 법정 스님께 법문을 청해보면 안되겠느냐고 제게 부탁을 했습니다. 강화 선원사는 고려 시대 때 본원이었던 절로 폐허가 돼버려 다 쓰러져 가는 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선원사 주지 스님께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간곡히 부탁하시기에 ‘맑고 향기롭게’ 회의 때 한번 찾아와 스님께 직접 말씀 드려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법정 스님은 두말없이 허락하셨습니다. 저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람과 동시에 기뻐하며 스님을 선원사로 모시고 갈 준비를 했습니다. 소문을 듣고 강화뿐 아니라 서울, 인천 등지에서 많은 신도가 몰려들었습니다. 기념촬영 또한 흔쾌히 허락하셔서 그날 오셨던 분들 모두다 스님과 사진을 찍었을 정도로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날 “나 많이 변했지?” 하면서 제게 묻기도 했습니다. 저는 불교의 가르침이 무상 아니겠냐며 변하셔야 한다고 스님께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스스로도 많이 변했다고 느끼셨던 스님은 실제로 예전보다 농담도 많이 하시고 많이 부드러워지셨습니다. 식사자리에 생선이나 고기가 올라와 신도들이 난감할 때도 있었는데 스님께서는 오히려 곡차까지 시켜주시며 저희와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전생에 곡차와 고기도 많이 드셨다며 전생에 못 먹어본 저희 많이 먹으라고 권하시곤 하셨습니다. 저희들을 위한 법정 스님의 배려이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저희에게 법문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말씀을 통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특히 “쌓아두지 마라, 단순하게 살아라”라는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또한 행복하게 사는 삶에 대해서는 “남을 헐뜯는 사람은 불행하고, 칭찬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언행이 일치하는 삶도 힘든데 법정 스님은 언어와 행동, 그리고 글까지 모두 일치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법정 스님이 40년 전에 집필하신 〈미리 쓰는 유언〉 이란 책이 있는데, 스님은 그 책의 내용 그대로 변함없는 모습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분을 포함해서 저 또한 법정 스님 덕택에 정말 좋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어지럽고 험한 세상이지만 길상사 이 맑고 향기로운 가람에서 좋은 인연, 좋은 공부 많이 하시고 나날이 맑고 향기로워지길 소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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