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밭의 독백’이 주는 교훈 -

세상의 단 맛이야 많을 테지만
깨달음의 단 맛에 견줄 수 없어

 

▲ 독재정권이 만든 3S 열풍과 최근 불고 있는 요리 열풍의공통점은 국민을 우민화하고 그 기저에는 대중주의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3S 열풍은 권력이 조장한 반면 요리 열풍은 대중이 자발적으로 일으켰다는 것이다. 사진은 ‘집밥 백선생’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미당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 전문이다. ‘사소(娑蘇) 단장(斷章)’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는 박혁거세의 어머니 ‘사소’가 꽃밭에서 독백하는 형식으로 구도의 염원을 노래한 것이다.
글 서두에 미당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을 인용한 까닭은 최근 방송계에 열풍이 불고 요리(혹은 셰프) 프로그램에 대해 몇 가지 의견을 개진하기 위해서이다.
‘집밥 백선생’, ‘한식대첩’, ‘삼시세끼’, ‘냉장고를 부탁해’ 등이 대표적인 인기 요리 프로그램이다. 물론, 세 프로그램 모두 장점은 있다.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진행하는 ‘집밥 백선생’은 누구나 쉽게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한식대첩’은 한국의 전통 음식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부한 맛이 있는지 일깨워준다. ‘삼시세끼’는 산간지역이나 바닷가 지역에서의 생활을 그림으로써 자연친화적인 삶의 가치를 높여 주고, ‘냉장고를 부탁해’는 스타들의 삶을 훔쳐보는 재미와 사소한 재료들로 요리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런 요리 프로그램들은 장점만큼이나 단점을 지니고 있다. 아니, 장점은 적고, 단점은 많다고 봐야 옳다.


김도언 작가는 최근 〈작가회의 통신〉 ‘열풍과 음식’이라는 글에서 “우리나라의 경우 열풍은 기괴하게도 정부나 언론 같은 제도권에서 조장하는 형식을 통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군부 독재정권 시절 위정자들은 국민의 관심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열풍의 대상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우민 정책을 썼다. 그것은 매우 공공연하게 선전되고 유포되었다. 우리가 흔한 사례로 드는 3S 정책 같은 것이 그것인데, 국민의 눈과 귀를 스포츠와 섹스와 스크린으로 쏠리게 한 뒤 국정을 농단하는 게 그들의 전략이었다. 〈중략〉 내가 볼 때 지금 우리 국민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가장 미쳐 있는 것은 음식과 요리인 것 같다. 바야흐로 음식, 요리 열풍이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것이다. 〈중략〉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성별도, 계층도, 세대도, 정치적 이념도, 지역도, 계급도 모두 백기투항하는 것이다. 〈중략〉 우리 국민의 정치적 환멸이 심해진 건 주지의 사실이다. 불행해진 국민은 정치적 환멸이나 기대감의 상실에 대한 욕망의 대리 투사 대상을 찾아야만 했는데, 내 생각에 우리 국민이 찾아낸 대상이 바로 가장 본능적인 감각에 충실한 음식이었던 것 같다. 가정적으로 불행하거나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집의 아이들보다 설탕과 소금에 집착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면 너무 과장된 논리일까?”라고 주장했다.


매우 일리 있는 주장이다. 김도언 작가의 글에서 알 수 있듯 독재정권이 만든 3S 열풍과 최근 불고 있는 요리 열풍은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공통점은 국민을 우민화하고 그 기저에는 대중주의가 깔려 있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3S 열풍은 권력이 조장한 반면 요리 열풍은 대중이 자발적으로 일으켰다는 것이다.
필자가 서두에 인용한 ‘꽃밭의 독백’은 최근 불고 있는 요리 열풍에 적지 않은 메시지를 준다.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라는 표현에서 노래는 아마도 시를 일컫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가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왔다’는 것은 아무리 최상의 노래인 시일지라도 육도윤회의 삶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는 표현도 세속적인 욕망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어서 시인은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고 표현한다. 육근(六根)의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지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고 주술사처럼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다. 여기서 꽃은 물론 깨달음의 상징일 것이다.
달고, 짜고, 시고, 쓰고, 맵고, 감칠맛이 돌고 이런 혀를 자극하는 맛들은 결국 단 맛이라는 하나의 맛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 단 맛은 ‘안수정등(岸樹井藤)’의 일화에서 벼랑 끝에 매달린 사내가 맛보는 꿀맛과 다르지 않다.
이 세상의 단 맛이야 많지만, 깨달음의 단 맛에 견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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