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子 이란 여여원장ㆍ이재성 교사

가정 법회 20여년 이끈 어머니
이웃과 나누는 보시행 ‘귀감’
참고 기다리는 ‘堪忍待’ 모자의 화두


15년전 난소암 판정 받고도
군입대 앞둔 아들에게 말 안해
“불법 만나 죽음 두렵지 않았어요”

교대 졸업후 교사의 길 걸으며
찬불가 작사·작곡·지휘
“어머니의 삶 존경하고 감사해”

 

▲ 어머니와 아들 가정 법회를 20여 년 이끌어 온 이란 여여원장(왼쪽)과 찬불동요 작곡가 및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 이재성 씨. 뒤에 보이는 현판 안심료는 당호. ‘안심하고 찾아오는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란 원장(법명 수덕화, 修德華)은 (사)대한불교법사회 법사, (사) 한국여성소비자연합 이사, 사임당ㆍ율곡 장학재단 이사, 시문회 회원이다. 아들 이재성 씨는 서울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 교사로 서울초중등컴퓨터음악교육연구회장, 한국동요작곡가협회 양악 교육팀장, (사)한국동요문화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란 여여원장은 재가불자로서 20여년 가정법회를 이끌어왔다. 그는 자신의 집을 법당으로 개방해 이웃의 가족들을 법회로 초대했고 또 법사스님을 모시고 법회를 열면서 신행활동을 이끌었다. 이런 어머니 덕분일까. 그의 큰아들 이재성 씨(서울교육대부설초등학교 교사)는 찬불 작곡가와 사찰 어린이합창단 지휘자 등으로 활동하며 불음을 전파하는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지중한 인연으로 만나 부처님 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까지 이란 원장(66)과 아들 이재성(42) 모자의 인연의 향기를 소개한다.     
 

▲ 방이동 시절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다담을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재성 씨, 우담 거사, 이란 원장, 막내 재준 씨
안심하고 찾아오는 집 ‘안심료’
8월 13일 무더위와 소나기가 오가는 여름날 광진구에 위치한 이란 여여원장의 자택을 찾았다. 아파트 11층에 위치한 이 원장의 자택에 들어서자 왼쪽 통창으로 여여하게 흐르는 한강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으로는 피아노 위 ‘안심료(安心寮)’라는 당호가 새겨진 현판이 들어왔다. 안심하고 찾아오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당호는 해인사 전계사 종진 스님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오고 가며 불법을 익혔을 이곳은 선원에 온듯 여여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 원장이 우려내는 차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듯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불자로서 오랜 시간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해왔고 그런 어머니를 어린시절부터 지켜보았던 아들. 그 긴 인연의 시간을 어디서부터 꺼내 놓아야할까.
우선 20여년 전 이 원장이 난소암에 걸리고 난후 어머니가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군에 갔던 그때의 이야기부터 들었다. 이 원장은 15년전 당시의 기억을 담담히 이야기 해나간다. “둘째 아들이 고3이었고 큰아들은 군에 가기 전이었는데 난소암 판정을 받았어요. 불교공부를 한 탓인지 암에 걸렸다고 해도 크게 두렵지가 않았어요.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거죠. 그저 큰 일을 앞두고 아이들이 충격을 받는 게 걱정이 됐죠. 그래서 수술 날짜도 큰아들 군대에 간 이후로 잡았어요. 그리고 아들이 군에 있는 3년 내내 내가 병에 걸렸다는 걸 알리지 않았죠. 군생활을 안정적으로 하라는 배려에서였어요.”


제대를 하고 난 뒤에야 어머니의 병을 알았다는 재성 씨는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많이 놀랐고 믿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군복무 중에 도반 보살님들과 음식을 준비해와서 면회도 오시고하셨지만 수술을 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대하고 난 뒤에야 그 사실을 알고 많이 놀랐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어려움을 잘 극복하신 어머니의 지혜와 인내에 고개를 숙일 뿐입니다. 또 아들의 입장을 고려한 배려에 감사할 뿐이죠. 그 모두가 오랜 시간 수행으로 스스로를 잘 다스려 온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원장은 원래 천주교 신자였다. 결혼을 하면서 시댁의 종교를 따라 불교를 믿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불교가 복을 비는 기복종교인 줄만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이 회사 업무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주말 부부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심적으로 많이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그때 불교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한다. 


“남편 친구 모임이 있어 부부 동반으로 남한산성에 놀러 갔다가 성불사 도원 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어요. 산다는 것은 참고 기다리는 일이라는 요지의 법문을 하셨는데 그 법문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가슴에 와 닿았죠. 얼마 후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성불사를 찾아갔어요. 스님께 그 말씀을 다시 듣고 싶다고 청했죠.”
묵묵히 계시던 도원 스님은 한지에 붓글씨로 ‘감인대(堪忍待)라는 글씨를 써 주었다. 이후 감인대는 이 원장의 화두가 되었다. 이 화두는 이란 원장에게 사바세계는 묵묵히 견디며 살아야하는 인토(忍土)임을 알게 해주었고 인생은 기다림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봉은사에 나가 불교 서적을 읽으며 지은대로 받고 행동한 대로 윤회한다는 가르침에 눈이 번쩍 뜨였어요. 나로 인해 모든 것이 생기는구나, 나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를 탓할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닦으면 되겠구나라는 가르침을 얻었죠. 다행히 좋은 것을 빨리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었기에 바로 발심을 하게 되었고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죠. 이후 태고종 전 종정이셨던 덕암 스님에게 수덕화라는 법명을 받으며 신행 생활을 이어나갔죠.”

어머니가 제시해 준 길을 따르다
재성 씨에게 어머니는 늘 인생의 길을 제시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해주었다. 그가 오늘날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된 데에도 어머니의 의견이 큰 작용을 했다고.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았어요. 큰아이는 동생 데려다 놓고 가르치는 것을 잘 하더라구요. 둘째 아들은 병원 놀이를 재미있어 하구요. 그래서 큰 아이는 교사로 키우고 둘째 아들은 의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그렇게 방향을 잡아갈 수 있도록 이끌었는데 모두가 생각하는 대로 되어주었죠.”
재성 씨는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교육대학으로 진로를 정했다. “처음 어머니가 지방의 교육대학을 권했을 때는 저도 남들처럼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기도 했어요. 음악에도 관심이 있어 음악 관련학과를 가고 싶기도 했구요.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권유가 정말 현명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사가 된 이후에도 음악도 지도하고 또 작곡 관련 공부도 하고 있으니 말이죠.”


아들에게 가장 맞는 길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이 원장은 혜안이 있는 몇 분의 스님들에게 조언을 구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심성이 고와서 중고등학교 아이들 가르치는 것보다는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판단을 했어요. 여러 상황을 고려해 춘천교육대학으로 원서를 썼어요. 그 당시는 모험이었죠. 아이를 혼자 지방에 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시험을 쳐놓고 합격자 발표를 보러가니 장학생으로 붙은 거예요. 그저 불보살님의 가피라 생각하고 장학금 받은 만큼을 108개의 약과 상자를 만들어 주변 분들한테 나누어주었죠.”


물론 지방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 당시 스무살이던 재성 씨에게도 이 원장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춘천교대 앞에 아들을 남겨두고 가면서 이 원장은 많이 울었다고 한다. 아들 재성 씨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저를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서울로 가시며 많이 우셨어요. 가슴이 먹먹했죠. 저 역시 생전 처음 가족과 떨어진데다 여럿이 함께 묵는 하숙집에서 살아보는 것은 처음인지라 적응이 쉽지는 않았죠. 힘들 때는 불자였던 하숙집 아주머니를 따라 청평에 있는 절에 가서 위로를 받고 왔어요. 어머니는 제가 집에 없는 동안 늘 식사 때마다 부엌 한 켠에 제 밥을 떠놓고 숟가락 젓가락을 놓아두셨다고 해요.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저 가슴이 뭉클할 뿐입니다.”
교육자가 된 재성 씨는 지금도 어머니의 교육방식과 철학이 참으로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말 한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늘 책을 읽으셨어요. 저도 그 옆에서 책을 읽었죠. 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부처님전에 삼 배의 예를 갖추시죠. 불자로서 어머니로서 늘 정진하시며 자식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이 바로 저희 어머니이십니다. 이렇게 자애로운 교육방식과 철학을 어떤 이론서보다도 실천으로 보여주셨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기다림의 교육, 믿음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느낍니다. 그래서 저도 늘 아이들을 지켜보고 몸으로 행하는 바를 먼저 보여주는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지난해 불교방송이 주최하는 ‘제5회 어린이·청소년 창작 찬불 동요제’에서 이재성 씨(맨 왼쪽 두번째)가 이끄는 일곱빛깔 중창단의 ‘산사로 오세요’가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찬불동요로 불음을 전파
재성 씨는 책 읽고 글 쓰는 어머니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아 동시를 쓴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악기 다루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동요를 작사작곡하는 것은 물론 학교에서도 어린이관현악단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현재, 한국동요작곡가협회 운영위원, 한국동요문화협회 회원, 한국서정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재성 씨는 경남 MBC 고향의 봄 창작동요제에서 ‘어린이 세상’으로 은상을, 울산 MBC 서덕출 창작동요제에서 ‘행복한 우리 가족’으로 금상을 수상하는 등 다수의 동요제에서 수상을 한 실력파 작곡가이기도 하다. 
또한 찬불동요를 작곡하는 것은 물론 사찰의 어린이 합창단 지휘를 맡는 등 불자로서도 그의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불교방송이 주최하는 ‘제5회 어린이·청소년 창작 찬불 동요제’에서 그가 이끄는 일곱빛깔 중창단의 ‘산사로 오세요’(작곡 이재성·작사 배정순)가 대상의 영광을 안았다. 대상 수상곡인 ‘산사로 오세요’는 풍성한 자연이 함께하는 산사로 오라는 내용을 밝고 경쾌하게 담아낸 곡이다. 이는 2012년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부처님께 가는 길’로 같은 대회에서 인기상을 받은 이후 찬불동요로는 두 번째 수상이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행 활동은 꾸준히 해왔는데 대학 때는 우리는 선우 청년부에서 활동했죠. 당시 도반들이 캠프송을 만들어 보라고 권해서 캠프송을 만든 것이 제 첫 작곡이에요. 2012년 불교방송에서 인기상을 받은 ‘부처님께 가는길’은 제가 많은 애착을 가진 곡이기도 해요. 오색 연등 따라 부처님께 가는 길을 통해 내 마음이 밝아진다는 내용을 담고 있죠. 늘 어머니 따라서 절에 가던 기억을 떠올리며 만든 노래죠. 당시 아쉽게도 인기상에 머물렀지만 제 추억이 담겨 있는 의미 있는 곡입니다.”
그는 최근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로 부른 ‘아침 연기’를 작곡 ‘2015 창작 국악 동요제’ 본선 진출을 앞두고 있다. 이른 아침 산골 마을에 피어나는 연기를 통해서 옹기종기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연기는 어머니가 밥 짓는 모습을 연상 시키고 이를 통해 어머니의 사랑을 안고 일터로 향하는 내용을 굿거리 장단으로 흥겹게 담아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아들을 위해 이란 원장은 음악 교육에 신경을 썼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어요. 피아노는 기본이고 바이올린 가야금 성악까지 공부를 했죠. 제가 굳이 찬불 동요를 만들라고 권한 적은 없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한 것들이 그대로 노래 속에 들어 있는 듯합니다.”


▲ 인도 쿠시나가르, 이란 원장과 여여원 회원들이 성지순례 중 참배를 하고 있다.
가족을 도반으로
두 모자의 공통점은 평생 공부하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머니 이란 원장은 오십이 넘어 동국대 불교학과에 만학도로 입학해 공부를 했고 불교서울전문강당에서도 불교 공부를 이어갔다. 아들 재성 씨는 한양대대학원 영어교육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수원대 일반대학원 합창지휘과에 들어가 현재 음악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남편 우담 거사와 함께 모자는 문경 관음사의 지유 스님을 찾아 매달 초발심자경문 법문를 듣고 있기도 하다. 이 원장이 가정법회를 이끄는데에 가족과 도반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저는 일찍이 수덕화라는 법명을 받았고 1996년 남편과 두 아들은 해인사에서 계를 받았는데 남편은 우담, 큰아들은 호경, 작은 아들은 삼현이죠. 가족들은 가정법회를 이끄는 저를 방이동 포교 국장이라 부르며 응원해 주었어요. 또한 지도 법사를 맡아주신 종진 스님, 또 함께 법회를 이끌어준 도반들도 큰 힘이 되어 주었죠.”


이 원장은 사찰을 찾아 다양한 보시행을 펼쳤는데 운주사 연흥사 거조암 등의 사찰 불사, 여러 선방 대중공양은 물론 경전이 필요한 사찰에 한글대장경, 티베트대장경 등을 봉헌하고 불교서적 1만 여권 이상을 법보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남편 우담 거사의 적극적인 지원도 한 몫을 했다고. 이 원장은 “신심 깊은 도반들이 없었다면 이렇듯 오래 가정법회를 지속적으로 해올 수 없었습니다. 은행통장은 숫자로 보이지만 공덕 통장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공덕 통장이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삶 아니겠어요?”
이런 어머니의 삶은 재성 씨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늘 공부하시는 어머니와 그 도반님들을 보면서 참 좋았어요. 어머니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셨고 순간 순간을 의미있게 살아오셨어요. 그래서 저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늘 어머니의 가르침을 생각해요.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선택하게 되죠. 어머니는 저에게 ‘네 마음을 지휘하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러면서 알게 되었어요. 불법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란 것이 내 인생에는 큰 복이구나 하고요.”


이란 원장은 2013년 여름 다시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행복과 불행이 한쌍임을 아는 이 원장은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또한 잘 극복해 냈다. 불법을 삶의 지표로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오늘처럼 여여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란 보살과 아들 이재성 모자는 서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불제자의 길을 함께가는 도반이다. 이란, 이재성 모자는 행복의 보금자리를 싹틔우는 가족으로 또 도반으로 오늘도 불법의 향기를 세상 속에 꽃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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