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상대성 원리가 어디에서부터 생겼습니까?
나로부터 입니다. 그러니까 내 탓으로 돌려야죠.

▲ 그림 최주현
칠석과 백종이 다가왔습니다
질문  처음 절에 1년 2년 다닐 때는 내 자신의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이루기 위해서가 전부였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가고 생을 마무리해야 되는 시기가 되면서는 매년 시기별로 지내는 행사들이 요식행위가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이 밝아지고 더불어 조상이 함께 벗어나는 길이다라는 것을 새록새록 느끼게 됩니다. 올해도 무더위가 물러나는가 싶더니 벌써 칠석과 백종이 다가왔습니다. 스님,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칠석을 어떻게 받들어야 저의 수행과 둘 아니게 챙겨 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백종에는 또 어떻게 마음을 내야 조상님들의 마음에 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답변  우리가 칠석날은 견우와 직녀를 많이 상상하시죠. 옛날이야기든 뭐든 이치가 담겨 있지 않은 말은 없을 겁니다. 옛말에도 까치는 산 사람들을 위해서 인연을 이어 주고, 까마귀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전달을 해 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 둘 것은 전체가 인연 아닌 것이 없지만 칠석이라고 하는 자체는 우리가 태어남을 뜻합니다. 모두가 태어나는 길을 말합니다.
우리가 탄생하는 날을 기해서 칠성이라고 하는데, 불성을 만나는 인연이라고 했습니다. 정자 난자가 만나서, 불성이 둘 아니게 인연이 되는 그런 인연의 소치를 말하는 거죠. 마치 우리가 산 사람들을 위해서 촛불을 켜는 거나 똑같죠. 백중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있는 거고, 산 사람들을 위해서는 칠성, 말하자면 칠석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근본은 칠성입니다. 그러나 칠석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그 자체는 바로 이 칠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칠석이라고 하고 칠성부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동시에 미래로 자꾸자꾸 가는 겁니다. 우리는 과거를 연방 뒤로 하면서 미래를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미래로 전진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촛불을 켜고 칠석을 맞이합니다.
다시 말해 불성이 밝으면 모두 다 밝아진다는 뜻입니다. 사는 사람들이 다 밝게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따가 죽는다 하더라도 개의치 마세요. 뭐 꿈을 꾸었는데 꼭 죽을 꿈이라고 헐레벌떡 뛰어오시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꿈이 잘못돼서 금방 죽는다 하더라도 그냥 놓고 ‘죽이는 것도 너 살리는 것도 너니까, 그렇게 만들어서 꿈을 꾸게 한 것도 너니깐 너만이 잘못되지 않게도 할 수 있다.’ 하고선 관하고 그만둘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능력만 갖는다면 그게 다 훌렁 뒤집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칠석과 백중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칠석날 마음을 밝게 해서 백중에 모든 조상의 영령들을 위해서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뜻도 됩니다. 하늘이 없으면 땅이 없고, 땅이 없으면 인간이 없듯이, 우리가 부모가 없다면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나서 이렇게 다닐 수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곤충 같은 것도 자기의 부모를 위해서 다리가 찢기고 목이 떨어져도 달려드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자신의 삶도 원만하게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 모든 곡식들에게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지수화풍의 도리를 믿고 감사하게 생각을 해야만이 만물만생이 우리와 더불어 같이 돌아갑니다. 그러니 감사하게 생각하면 은혜가 아니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기에 먹고 살지 않습니까.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옷을 입고 있죠. 또 음식을 가공해서 먹게 만들어 놓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으니 모두가 더불어 같이 사는 겁니다.
그래서 공생·공용·공체·공심·공식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라 이겁니다. 다섯 가지 문제를 총동원해서 한마음으로 더불어 살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여래이며 부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손이 그 도리를 알게 되면 그대로 한 종자의 한 종류니까 살아서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죽은 사람들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둘이 아니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백중날은 내 마음이 자식의 도리로서 조상님들에 대한 생각을 통틀어 하면서, 조상의 은혜를 생각하며 ‘모든 것이 다 제 마음과 같이 둘 아니게 한자리를 하소서.’ 하고선 한량없는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는 아리따운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 어머니! 살아 계실 때 용돈 한번 제대로 못 드렸고, 맛있는 거 한번 제대로 못 사 드렸고, 공양 한번 따뜻하게 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살기 위해서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깐 그랬고, 철을 몰라서 그랬고, 철들어서는 부모가 안 계시니 이 불효를 어떡합니까?’ 하고 지극히 정성을 담아서 부처님 전에 올리는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 마음이 꽃송이처럼 향기가 퍼져서 온 천지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 영령들의 마음이 ‘어이구, 우리 아들의 마음이 이렇게 하늘에까지 향기가 퍼지는구나.’ 하고 그 퍼지는 걸 느끼면서 그냥 와서 친견을 합니다. 친견할 때 모습이 없으면 친견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꽃을 놓거나 위패를 놓습니다, 거기에 응접하시라고. 그래서 꽃잎마다 응접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응접을 해서 ‘내 아들, 장하구나.’ 그러다가 어느덧 그 조상이 그 도리를 알게 되어 자식의 마음, 공부한 자식의 마음속으로 탁 들어가 보면 ‘아하, 내 자식이 따로 없구나. 돌아가면서 부모 자식 노릇 하기에 더불어 같이, 이 끝없는 자비가 아니라면 어찌 살 수 있겠나.’ 하는 그런 마음이 들면서 한자리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조상들이 이런 법을 알아서 정말 한자리 하게 되기를 원하는 자식들의 그 마음이 아주 끝 간 데 없이 간절해야 됩니다. 그러니 흔히, 천도재도 하고 다 했는데 왜 백중이고 추석이고 따로 또 해야 하느냐고 묻는데, 우리가 밥 한 번 먹고 더 이상 안 먹습니까? 그런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이 몸이 없어졌다고 다 끝나고 없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살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배워야 하고, 지속적으로 그 뜻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영혼에 대해서
질문  부처님께서는 영혼의 존재를 묻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지 않으심으로써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마음만을 강조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에 윤회니 업보니 하는 말을 듣다 보면 은연중에 영혼의 존재를 믿고 말하게 됩니다. 영혼에 대해서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영혼이라고 하는 것도 이름일 뿐이고, 마음이라는 것도 이름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양면 가운데서, 바로 마음의 작용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 영혼과 마음이 둘이 아닙니다. 동시에 작용을 하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이 없다면 바로 실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영(靈)과 마음이 둘이 아니다. 둘이 아닌 까닭은 바로 마음 내기 이전 그 자체에 마음과 영혼이 둘이 아니게 결부돼서 돌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마음이 나오는 겁니다. 마음을 낼 수 있게끔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음과 영혼을 각각 보지 마시라 이겁니다. 영혼이 있기 때문에 마음 또한 같이 돌아가고,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 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내기 이전은 그대로 근본이 돼 있죠. 그대로 근본이 돼 있기 때문에 뭐 영혼이다, 마음이다 이럴 필요가 없죠. 그래서 그 근본과 마음 내는 거와 육체가 움죽거리는 그 자체가,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하나가 된다 함은 무슨 뜻인지요
질문  일체가 주인공의 나툼이라면 모두가 주인공의 모습일진대 하나가 된다 함은 무슨 뜻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댁의 마음 내는 사람과 마음을 내고 움죽거리는 사람이 둘입니까? 하나죠. 하나니깐 그 하나 속에서 자기를 발현해 내려고 앨 쓰는 겁니다, 지금. 그런데 모두들 사는데 모습이 자기인 줄 알고 또 정신계의 보이지도 않고 쥘 수도 없고 가눌 수도 없는 그런 데는 생각질 않거든요. 그 보이지도 않고 쥘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데서 자기를 리드해 나가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와 나와 둘 아니게 이렇게 상봉한다면 서로 이렇게 뜻으로 통해서 공부를 하게 되죠.


그래서 언젠가 내가 이런 말을 했죠. 길을 가는데 “이 길은 길이 아니니라.” 그래서 “어떤 게 길입니까?” 하니 아주 천야만야한 산중을 길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때는 너무 몰랐으니까, 몰랐으니깐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듣고 믿고, 그걸 길이라고 한다고 갔습니다. 믿고 가질 않았으면 그것도 길이 아니라는 거를 몰랐죠. 그럴 텐데 갔기 때문에 길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길이 따로 없다는 걸 알았고, 이 허공도 아닌 허공을, 즉 말하자면 속도가 빠르게 그, 다닐 수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러니깐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그 말을 듣고 행하는 내가 시자인 것입니다. 심부름꾼이에요. 그 자기 심부름꾼을 진짜로 공부 가르쳐서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자꾸 비난을 하게 되죠. ‘아이고, 뭐 그까짓 것, 이렇게 이렇게….’ 그렇게 되면 둘이 아니 될 수가 없죠. 항상 둘이 되죠. 그러니깐 문제는 그런 데서 ‘이 세상을 다 한데 합쳐도 하나로 구성된다. 하나로 돌아간다. 나중엔 그 하나도 없다.’ 이게 나오질 않죠.


그래 지금 모두 많이들 벌어지는 일들이 생기는 게 이 마음이에요. 이 마음이라고 그런다면 그냥그냥 속세에서, 지금 물질세계에서, 마음이 아니라 정신세계를 몰라라 하니 같이 이어지질 않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고 길을 제대로 걷게 되질 못하죠.
이 지금, 전 세계에 지진이 일어나고 있고 일어난다 하는 것도 그렇고, 모두 사람들이 곤경에 빠지고 아픈 일들이 많이 생기고 그런다 해도 이걸 병원에 가지 않는 게 옳으냐 병원에 가는 게 옳으냐 이거를 문제 삼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병원에 안 가도 괜찮다 하고 병원에 안 가는 분들은 오직 그 주장자가 완벽하게 섰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서지 않는 분들은 서지 않은 대로, 병원에 가든 안 가든 그걸 떠나서 진실히 저 나무가 자기 뿌리 믿고 살듯이 그냥 진실히 그렇게 해야만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려면
질문  차를 타고 가다가 스님 법문 중에 “천년만년이 가도 나를 뛰어넘지 못한 채 중생으로 살아간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이 마음에서 응어리처럼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억겁의 중생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는지요.
답변  나라는 존재는 모두가 시자일 뿐입니다. 내 마음의 주인의 시자일 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부처를 구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을 구합니다. 마음을 구해야 부처님의 마음도 알 수 있고 역대 조사들의 마음도 알 수 있으며 일체 중생들의 마음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내 마음으로 나를 뛰어넘고 다스려라 하는 것은 몸뚱이 속에 수십억의 의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중생입니다. “중생이 병이 나아야 내 병이 낫겠노라.” 하고 유마힐 거사가 말했듯이 부처님께서도 “너의 자생 중생을 먼저 제도해야 네가 해탈을 할 수 있느니라.” 하셨는데 똑같은 얘기죠.


그래 어떻게 해야 내 자생 중생을 제도하나? 우리가 지금 지구에 매달려 살면서 지구가 어디로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사는 것처럼, 몸뚱이 속의 중생들은 우리가 어디로 돌아다니는지도 모를 뿐더러 좋고 나쁜 거를 스스로 판단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마음먹는 대로, 강도질을 하려고 한다면 강도질하는 대로 그냥 좇아 주고 착한 일을 하려고 한다면 착한 일로 좇아 줍니다. 우리 마음먹은 대로 몸이 움직이면 손이 쫓아다니듯 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니 어찌 마음으로써 다스리란 말을 안 하겠습니까?
그래서 행자들에게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행자뿐만 아니죠. 속가에서 사는 여러분이 다 부처이자 법신이니까요. 항상 부처님의 법에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되고, 가르치는 스님네들한테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되고, 자기에게 누가 되게 해서도 아니 된단 얘깁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모든 게 자기 탓입니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상대성 원리가 어디에서부터 생겼습니까? 나로부터입니다. 그러니까 내 탓으로 돌려야죠. 모든 거는 내 탓으로 돌린다.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부딪침도 있고 상대도 생겼고 세상도 벌어졌고 우주도 벌어졌습니다. 내 탓으로 돌리게 되면 화목을 도모할 수도 있고, 절대로 의리와 도의를 허망하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저절로 말입니다. 그리고 부드러운 행동과 부드러운 말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항상 자기 탓으로 돌리면서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돌아가는 것을 이름해서 계향(戒香)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내면에 자기 자성 선을 세우고, 즉 말하자면 선이 중심이 되고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공해서 돌아가니까 공입니다. 그래서 각자 여러분이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름은 여러 가지겠죠. 하지만 대체적으로 사회에서도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팎으로 나쁘게 생각이 나오고 나쁘게 닥치고 이러는 것은 나쁘게 나오는 것도 너니까 좋게 돌려서 나오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자기 주인공에 놓고, 안에서도 좋은 마음이 생기고, 바깥에서도 좋은 행을 하고,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하고 이럴 땐 거기에 감사하게 놓으면서 그 깊은 내면세계를 떠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이름해서 정향(定香)이라고 난 생각합니다. 계향 정향만 잘해도 공덕이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느 수좌 스님이 동짓날 팥죽을 쑤다가, 이 얘기 다 아실 겁니다. 팥죽 방울이 끓어오르니까 “요것도 문수! 요것도 문수!” 하고 쳤답니다. 여러분 몸뚱이가 팥죽 솥이라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 팥죽 솥에서 팥죽 방울이 나오는 거지 딴 데서 오는 것도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망상도, 또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바로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그러니 거기에 속지 말라 이런 겁니다. 속지 말고 그냥 놔라. 미리 ‘어, 이것도 팥죽 솥에서 나오는 거니까 이것도 너로구나!’ 하고 탁 눌러 놓고, 이것도 눌러 놓고 저것도 눌러 놓고 그러시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몸뚱이 속의 의식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거니까, 그 업식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나오는 거니까 나오는 대로 거기다 되놓는 것이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림이요, 바로 번뇌와 망상, 생사, 윤회 그 모든 거를 거기다가 녹이는 겁니다. 용광로에다가 헌 쇠든지 새 쇠든지 오락지든지 넣으면 다 녹는 것처럼 말이죠. 그 작업만 한다면 다 녹아서 저절로 생산이 돼서 나가는 거거든요. 그러니 나중에 어떻게 될까? 잘될까 말까? 이런 거추장스러운 생각을 마시고 진실히 믿고, 용광로에 쇠를 넣듯이 모든 것은 네놈이 하는 것이니까, ‘안 되게 할 수 있는 것이 네놈이니까 되게 하는 것도 너다.’ 하고 놓아서 구정물이 나올 땐 맑은 물로 바꿔서 써라 이런 겁니다.

사회를 생각하는 觀이 되려면
질문  사실 요즘은 과거보다도 상당히 생활이 많이 편리해졌고 풍요로워졌습니다.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마음이 조급하고 여유 없이 그냥 급박하게 살아가는 경향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회적으로 대형 사고라든지 이런 게 빈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님들께서도 큰마음 한번 내 주시고 저희 선원 가족 모두, 저를 포함해 가지고 좀 더 우리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관(觀)이 아닌, 우리 사회를 생각할 수 있는 관도 포함시켜서 관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씀 올립니다.
답변   그런데 나도 해 둬야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관(觀)하면 일체 과거 생이나 현재 생이나 미래 생을 포함해서 삼심(三心)을 일심(一心)으로 귀합을 시켜서 지금 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찌 현 사회의 모든 게 없겠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에 의해서 관해야 할 일들이 지금 급하게 닥친다고 봐도 됩니다.
첫째는 우리 정치인들이 대통령과 더불어 폭넓게 그릇이 크게 만들어져야 세계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겠고, 받아들였으면 바로 세계적으로 내보내야 할 지혜로움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게 통하게끔, 통해서 그렇게 되게끔 이렇게 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학교 문제 때문에, 시험 때문에 자기의 기상이 다 그냥 메말라 버리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뭐라고 그럴까요? 원력을 상실한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그거 하나 때문에 전체로 자기가 해 나갈 수 있는 어떠한 용도를 다 상실한다고 할 수밖에 없죠. 그리고 모든 거를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대로도 못하고요. 그러니까 학교에 들어갈 때는 넓게끔 하고 나갈 때는 시험을 봐서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하도록 관하시면 어떤가.


또 셋째, 지금 사업가들이 사업을 제대로 못하고 가는 형편이라고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나라 사람이 좀 더 마음이 넓지 못한 까닭인지 몰라도 모두가 제한이 돼 있습니다. 그 제한을 조금 풀어 줬으면, 외화도 어떠한 문제점만 거론해서 딱 자유롭게 할 수 있게끔 넓혀 주면 사업이 넓어지지 않을까. 또는 조그만 사업들을 하는 구성체를 그 큰 사업가들이 좀 똘똘 뭉쳐서 돌봐주는 마음과, 정부에서 좀 돌봐주는 마음이 한 나라에 한마음으로써 구성이 된다면 그것도 앞으로 발전이 돼서 우리나라에 경제혼란이나 또는 어떤 타격이라도 넘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거고요.
또 넷째, 사람들이 모두 정신계를 추구하고 가야 할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물질계에서 헤매고 온통 물질계로만 이론을 가지고 나간다면 절대로 이것은 성립을 못한다. 왜 못하는 것이 나타나느냐? 모든 젊은이들이 늙으나 젊으나 막론하고, 여자든 남자든 막론하고 자기를 돌볼 줄을 모른다. 자기를 들여다볼 줄 모른다. 자기가 어떻게 걷고 있는지 모른다. 자기 모습이 화려하고 아주 특이하게 발전을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에 발전을 할 수 없는 처지니 이 마음의 공부를 모두 할 수 있게끔 되면 좋지 않은가. 즉 말하자면 물질계에서 정신계로, 정신계에서 물질계로 이렇게 둘 아니게, 선(禪)과 교(敎)가 어떠한 것을 막론하고 둘 아니게 이 도리를, 진리로 구성된 전체의 귀합이라고 생각하고 모두 이런 공부를 하게 했으면 좋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우리 선원에 다니지 않더라도 그런 거를 모두 관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바깥으로 찾는 거보다도, 배를 젓고 가면서 바깥으로 살려 달라고 하지 말고 안으로 ‘너 가만히 있거라.’ 하고 다스려서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해 나가는 공부를 제대로 하게끔 하면은, 도둑이나 사기나 또는 강도나 어떠한 불상사도 아마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에 있다면 꼭 그렇게 해서 지켜보시도록 하세요. 모두 그런 마음으로써 지켜보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게 우리 사회도 우리 국가도 잘 살 수 있는 그런 기반이 다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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