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불교 70대 뉴스

해방 이후 일제 청산 최우선
정화운동 발현… 조계·태고 분리
10.27법난·종교편향 등 아픔
신도 조직 정비 등 제도 완비
TV, 방송 등 불교 미디어 발전
2000년대부터 사회운동서 두각

1945년 8월15일 오후 2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 항복 선언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 있던 한국에게 광복의 기쁨과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줬다.

해방공간 안에서 불교는 일제 청산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 1945년 8월 20일 곧바로 조선불교 중앙총무원 조직했고 9월22일과 23일 열린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사찰령과 31본말사법을 폐지키로 결의했다.

당시 불교계는 일제 청산을 통한 개혁과 함께 한국불교 전통성과 수행 가풍을 바로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1946년 10월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100명의 수행자들이 모였다.

1947년에는 현대불교사의 족적을 남긴 봉암사 결사가 시작된다. 성철, 청담, 자운 스님 등은 문경 봉암사에서 오로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공주(共住)규약’을 정하고 이를 따라 실천하는 스님들만 방부를 같이 정진했다. 처음은 성철, 자운, 보문, 우봉, 청담 스님으로 시작해 향곡, 월산, 혜암, 법전, 성수, 종수, 지관 스님 등 20여 명으로 늘었고, 비구니 묘엄, 묘찬, 지영, 재영 스님 등은 백련암에서 참여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민족 상잔의 6.25전쟁이 끝나면서 불교는 ‘정화’라는 큰 격랑을 맞이한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승을 축출하라는 불교정화 지지 담화가 발표되며 정화운동이 시작됐다. 이후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하기까지 약 8년에 걸쳐 진행된다.

선학원을 중심으로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 전국비구승대회가 개최되고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만들려는 종헌 제정, 공포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에 대응적인 교단의 다수 구성원인 대처승들은 이 같은 정화에 반대했다.

1960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이뤄지고 군사 정부가 만들어진다. 당시 정부는 불교가 자율적으로 교단을 재건할 것을 주문했고, 이에 따라 비구, 대처 양측은 합의를 이뤄 1962년 통합종단을 출범한다. 하지만 종회의원 비율을 놓고 양측의 갈등은 다시 촉발됐고, 결국 1970년 대처승을 중심으로 한 한국불교태고종이 창종되면서 갈등은 마무리된다.

불교 현대화를 위한 노정
정화를 거치고 교단이 안정되면서 불교계는 현대적 제도 정비와 포교 사업 등에 매진했다. 통합종단 출범 이후 조계종이 도제양성·포교·역경을 3대 지표로 정한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1956년 조계종 전국신도회가 창립됐고 1963년 9월 22일에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창립총회를 열고 대학생 포교에 시작을 알렸다. 대학생 불자들은 신행뿐만 아니라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한축을 담당하며 민중불교의 주역으로 나섰다. 대한불교청년회도 1963년 10월 26일 창립하며 계층 포교의 틀이 만들어졌다.

종단의 3대 지표에 따라 1964년 7월 21일 동국역경원이 설치됐다. 제대로 된 한글 경전이 없었던 만큼 역경원의 출범은 주목할만한 성과였다. 역경원은 2001년 4월 25일 총318권의 한글대장경 불사를 회향했다. 이는 불교 대중화를 위한 초석으로 평가된다.

승가 교육을 위해서 해인사에 해인총림이 만들어졌으며(1967), 이듬해에는 송광사에 조계총림이 설치됐다. 1979년에는 중앙승가학원(중앙승가대학 전신)이 설립됐다.

불교계 문화·학술 등 각 분야의 발전을 위한 초석들이 만들어진 것도 1970~80년대이다. 불교미술 진흥을 위한 불교미술공모전이 1970년 처음 시작됐고, 한국불교학회가 1973년 9월 7일 창립했다.

1975년 1월 14일에는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으로 제정된다. 당시 불교계는 서옹 대종사를 위원장으로 추진위가 구성돼 사업을 추진했으며, 특히 용태영 변호사가 적극 나서 공휴일 지정을 이끌어냈다.

(재)대한불교진흥원은 1975년 (주)동국제강의 창업주이자 불교 대중화를 위해 헌신한 대원 장경호 거사가 30억원 헌납을 통해 만들어진다. 지금도 대한불교진흥원은 불교 대중화를 위한 지원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시련·개혁 속 변화 움직임
1980년은 불교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시작됐다. 1980년에 들어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 10월 27일 새벽에 전국 3천여 사찰에 계엄군이 진입해 강압적인 수색을 하고 총무원장을 비롯한 주요 사찰 소임자 스님들을 불법 구금하는 10.27법난이 일어났다. 당시 군부는 무차별 폭력과 고문이 자행됐고 일부는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기도 했다. 현재 2008년 3월 ‘10·27법난에대한피해자의명예회복등에관한법률’이 공포되면서 피해자 명예회복과 보상 절차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10.27법난은 권력과의 유착을 비롯해 불교 현실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됐고, 젊은 스님과 청년 불자들을 중심으로 민중불교운동이 시작된다. 민중불교연합이 1985년 5월 4일 출범했고, 1986년 6월 5일 정토구현승가회가 창립됐다.

1986년 9월 7일 해인사승려대회에서는 2000여 스님들이 불교관계 악법 철폐, 사원의 관광유원지화 중지, 성고문 사건 진상규명, 수입개방 압력 거부, 10.27법난 해명 등을 촉구했다.

조계종이 현재와 같은 현대적 시스템을 갖춰나간 것은 1994년 개혁 이후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총무원장 의현 스님이 3선 연임을 강행하자 대중의 반발이 일어나 종정과 총무원장이 같이 퇴진하고 종단제도개혁이 추진됐다.

당시 종헌과 종법이 대대적으로 개정되어 총무원장 선출을 선거인단의 간선제로 하고, 교육과 포교를 전담하기 위해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으로 두어 3원 체제로 변화하게 됐다. 또한, 지방자치시대에 발맞춰 교구자치제도를 도입하여 교구장을 직선제로 선출도록 했다.

불교, 이제는 사회 속으로
1990년대 이후 시민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불교계 사회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특히 2000년대 불교계 NGO를 중심으로 한 환경운동은 한국환경운동사의 한 확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경 스님은 새만금을 살리기위해 전국토를 3보1배로 순례했고, 지율 스님은 천성산 습지를 위한 100일 단식을 이어갔다.

신문과 잡지 등 인쇄 매체에 의지하던 불교 미디어가 TV, 라디오로 확장된 것도 이 시기다. BBS불교방송(1990)과 BTN불교TV(1995)에 각각 개국하고 현재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복지 사업을 위해 1995년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이 설립되고 2008년에는 불교계 최고 공익기부법인인 ‘아름다운동행’이 출범했다. 현재 불교계 복지 사업은 국내 복지뿐만 아니라 국제 구호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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