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사 일요법회 혜담 스님(불광사 선덕)

일체 불법의 지도원리 이자 그 자체
반야바라밀 목적 있으면 순수하지 않아
一念으로 염송하면 우리 삶 밝고 행복
육바라밀 중 나머지 다섯 가이드 역할

 

▲ 혜담 스님은 … 1969년 광덕 스님을 은사로 범어사에서 출가해 동국대 승가학과 1기생으로 입학했다. 지리산 칠불암 해인사 퇴설당 등에서 가행정진하다 군승 10기로 임관, 해병대에서 군법사 직을 수행했다. 1986년 일본 유학에 나서 반야심경을 연구,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1992년 〈대품마하반야바라밀다경〉을 번역해 펴냈다. 이후 반야사상을 바탕으로 신행법을 살펴보는 〈반야불교 신행론〉 〈신(新) 반야심경 강의〉 〈방거사 어록 강설〉 등을 펴냈다.

 혜담 스님은 반야바라밀 염송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야바라밀 그 자체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그 자체로 온전한 깨달음이며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이다. 진리를 멀리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진리 자체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스님의 7월 불광사 일요법회 법문을 통해 ‘반야바라밀’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본다.   

눈 뜨면 모두가 부처
불교를 믿는 데에는 두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교의 믿음이 개인의 해탈이나 개인의 성공 개인의 행복이 성취되는 원리로서 믿게 되는데, 나중에는 개인의 해탈에 머물지 않고 일체 중생이 모두가 완벽하다는 것에 이르게 됩니다. 한동안 반야심경을 공부하면서 ‘구경열반’이라는 말에 대해서 많은 의심이 갔습니다. 해석을 할 때 모든 반야심경 강의에는 구경열반이라는 것을 ‘마침내 해탈이다, 열반이다’ 하고 한글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여기서 ‘마침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하고 많은 의심이 갔습니다. 나중에 보니 ‘마침내’ 라는 것이 실제로는 모든 사람들이 본래 해탈한 존재라는 겁니다. 우리는 현재 범부로서 무능하고 능력이 없고 죄악에 묻혀 있고 그런 존재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처님의 경지에서 보면 결국에는 우리가 전부 열반 자체 즉 해탈 자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열반이라는 거지요. 본래 죄악에 물들 수도 없이 본래 완벽하고, 한량없는 위신력을 지닌 그런 존재가 ‘구경열반’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범부가 아니고 눈을 뜨면 개개인 전부가 열반 상태에 있다, 어떤 존재도 열반 자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여의고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구경열반입니다.


그래서 깨닫게 되면 바로 자기가 부처라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오늘 제목이 ‘반야바라밀은 일체 불법의 지도원리며 동시에 불법 그 자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야바라밀이 바로 불법이고 반야바라밀이 바로 진리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경에서는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물을 보는데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의 사람은 물을 보면 물이구나 생각하지만 물고기들은 ‘우리 집이다’ 이렇게 봅니다. 한 사물을 대했을 때 자기 생각대로 단정해버리고 이것이 맞다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본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불법의 지도원리
그럼 왜 이런 차이가 나느냐.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대하는 각자의 자세가 다른데 이것은 무엇이냐. 이는 자신이 고정관념에 빠져있어 올바른 견해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진리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진리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군법사로 있을 당시는 법당이 없고 교회에서 사무실을 하나 얻어 법사노릇을 했는데 그때 기독교 월간지를 가끔 봤어요. 거기에 이런 광고가 실려 있었어요. ‘목사님의 안수와 기도로 정성스럽게 기른 흑염소를 달여 개소주를 만들었으니 성도 여러분은 안심하고 드십시오’하는 내용의 광고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는 정견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견, 올바른 견해가 있을 때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우리가 고통의 바다에서 헤매게 되는 것은 정견 올바른 견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이야말로 일체 불법의 지도원리이며 동시에 불법 그 자체인 것이 바로 반야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반야경이 어떤 경이냐, 육백부 반야라고 합니다. 육백 권이나 되는 반야경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법문에 3분의 1이 반야바라밀 법문이라 되어있습니다.
600부나 되는 반야경의 중심사상이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일체 불법의 지도원리고 동시에 불법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등 이 다섯 가지 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없으면 제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즉 불법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반야바라밀의 안내를 받았을 때만이 불법이 되는 것입니다. 보시바라밀의 예를 들어보면 이는 보시라는 말과 바라밀의 합성어입니다. 보시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이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법을 주든 물질을 주든 무엇을 주는 것이 보시인데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보시 그 자체로 끝나서 완성이 되지 못합니다.


업보사상은 내가 얻은 것을 보시하면 그것이 내일이든 다음 생이든 아니면 그 다음 생이든 틀림없이 나에게 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윤회사상, 업보사상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내가 돈 백 만원을 누구에게 그냥 줬다고 하면 반드시 공덕이 돼서 내게 오게 되어있는 것이 업보입니다. 이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업보로서 그저 주고받고 그것에 국한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러한 업보의 논리를 벗어나서 이것이 반야바라밀로 보시의 완성이 되게 하려면 삼륜청정이 돼야 합니다.


삼륜청정은 물건을 주었을 때 물건을 주는 자신이 있고 물건을 받는 상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고받는 물건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는 나도 없고 받는 너도 없고 그 주고받는 물건 자체도 원래 공이라는 것이 삼륜청정입니다. 그렇게 된 것을 보시의 완성이라 합니다. 보시의 완성은 반야바라밀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보시는 바라밀이 되지 못하고 보시 자체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과 계를 지키는 완성이라 하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계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내가 술을 먹지 않겠다.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 하는 것은 그 자체를 계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계는 완성이 아닙니다. 계가 완성 되려면 계를 지키고 안 지키고를 떠나야 합니다.
즉 계 자체만 돼 있으면 계를 어기는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계 자체의 본래면목, 근본자리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계를 파한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멀리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를 지키는 자체가 바로 사람 사는 그 자체라고 하는 맥락에서 논해졌을 때 비로소 지계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지계바라밀 자체가 무엇이냐면 공의 위치, 계를 지키는 것도 본래 없는 그 자리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신도들 가운데서 육식을 하면 죄가 되냐는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육식을 하는 사자와 호랑이는 죄를 지은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고정관념입니다. 동물들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그냥 삶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계를 범하려 해도 범할 수 없는 자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자리에 갔을 때 지계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육식하는 동물들을 나쁜 놈이라 생각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의 원리에 입각했을 때 비로소 지계도 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인욕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참는 것이 인욕인데,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화가 납니다. 화가 나는데 그 화가 나는 것은 무엇이냐면 내가 인욕수행을 하면서도 인욕이 무엇인가 하는 그 자체를 모르는 겁니다. 반야바라밀의 인도를 받았을 때 비로소 우리들은 인욕을 한다고 하면서 인욕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저절로 인욕이 되는 것입니다.

정진한다는 마음 자체도 버려야 
요즘 사람들은 보통 정진을 노력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직장생활 하는 그 자체도 얼마나 큰 정진입니까?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면서 하루 종일 일해야 되고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상사에게 핍박을 받아야 되고 그런 가운데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 자체는 바라밀이 아닙니다. 정진바라밀이 되기 위해서는 그 노력이 내 삶 자체에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그 길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내 노력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야겠다, 생사를 벗어나겠다. 해탈을 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을 정진바라밀이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정진을 하지만 정진 자체도 없는 그 자리에 가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지금 노력을 한다고 생각하며 정진하면 힘이 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지금 일을 하고 있어. 내가 지금 정진하고 있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물들이 다른 동물을 잡아먹을 때 ‘내가 살아가면서 내가 지금 노력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겁니다. 그냥 사는 것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삶 그 자체는 즐거운 것입니다. 근데 우리는 왜 즐거움을 못 느낄까요. 삶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잘 때까지 노력하는 그 자체가 삶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내가 지금 원하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사실은 우리 삶이 얻는 것인데, 그래서 우리가 정진을 통해서 이 도리를 알았을 때 내 삶 자체가 행복해지는 것이고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선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요하게 있는 것이 선정인데, 그 선정도 바라밀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선정을 닦는다는 생각이 없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지금 참선을 한다, 그래서 다른 외부의 말을 안 듣는다, 오직 참선만 한다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이것은 함이 있는 선정입니다. 함이 없는 선정이 돼야 선정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인도를 받았을 때 모든 불법은 불법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지도를 받지 못하면 업을 굴리는 것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업을 벗어나는 것이며 해탈하는 것이 수행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일체 불법의 인도자, 지도자라고 하는 겁니다. 반야 자체가 진리입니다. 우리가 반야바라밀을 염송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 진리를 염송한다는 것입니다. 진리 자체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무엇을 이루기 위해 염송하는 것이 아니라 반야바라밀 그 자체에 도달하기 위해 염송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그 자체로 온전한 깨달음인 것입니다. 바로 ‘아뇩다라삼막삼보리’입니다. 진리를 멀리서 구하는 것이 아닌 내 스스로가 진리 자체, 내 생명 자체가 진리 자체인 그 자리에 도달하는 겁니다.
만약에 반야바라밀이 다른 어떤 목적 목표점이 있다면 그것은 순수한 의미의 반야바라밀이 아닌 것입니다. 반야바라밀 그 자체가 바로 부처님이라 했을 때 우리는 부처님의 일부를 만나는 것이고 이것이 수행의 근본입니다.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염송했을 때 우리 삶은 지금보다 더 밝아지고 행복해지고 보람 있는 그런 삶이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생각을 여의지 말고 항상 반야바라밀을 염송해서 여러분의 삶 자체가 항상 기쁘고 즐겁고 보람 있는 그런 날이 되기를 바라면서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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