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교류사’ 거두 평가… ‘知音’의 상징

추사·초의 1815년 학림암서 만나
평생 거쳐 벗으로, 도반으로 지내
불교사상·예술 등 걸쳐 서로 영향
추사 유배길, 초의가 직접 배웅도
유배 당시 추사 차와 불교에 천착
<안반수경> 얻은 기쁨 편지 보내

조선 후기는 성리학이 주도했던 시기로 신분제도도 엄격했다. 이런 때에 유학자와 승려의 교유를 가장 활발하게 남긴 인물은 추사와 초의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은 1815년 겨울 학림암에서 만나 평생을 교우했다. 특히 추사는 첫 만남에서 초의와의 숙연(宿緣)을 짐작했던 지. 가까운 자신의 벗들을 초의에게 소개해 주었다. 1815년 10월 27일에 쓴 초의의 편지엔 이들과의 해후를 이렇게 드러냈다. 

하물며 정벽(유최진)선생께서는 화권(畵卷)을 주시고 형암(김훈)선생께서는 비를 무릅쓰고 찾아주셨으며 소유(박장암)선생께서는 맑은 가르침을 내려주시니 모두 천한 제가 감당할 바가 아니었습니다.(?貞碧先生之饋以畵卷 逈?先生之衡雨命駕 小?先生之賜以淸誨 俱非賤品所敢當)

바로 정벽 유최관(貞碧柳最寬)은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과 교유했던 인물이며 소유 박장암(小? 朴長?)은 박제가의 아들이었고 형암 김훈(逈? 金壎)은 천문학을 깊이 연구하고 관음상(觀音像)을 잘 그렸던 인물이다. 추사연구가 박철상 선생은 2011년에 열린 〈명선초의전〉 도록에서 ‘초의가 관음상을 잘 그리게 된 데에는 이때 만난 형암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초의가 만났던 장안의 문사들은 초의에게 유무의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된다. 이처럼 초의가 경향의 문사들을 만나 폭 넓은 교유를 맺었던 배경에는 추사가 있고 다산가의 유산 정학연이 있다. 특히 초의가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게 된 것이나 당시에 관심이 고조되었던 고증학을 접하게 된 계기 또한 추사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이들은 학문과 예술의 지향점이 같았던 지기(知己)로서 서로를 상보(相補)하던 도반이었던 셈이다.

특히 추사와 초의의 교유는 각별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추사가 정치적인 위기 속에서 유배길에 올라 남도의 마지막 땅 해남의 일지암을 찾았을 때 초의는 성의를 다해 따뜻한 차를 대접하며 어려운 처지의 벗을 성심으로 위로했다. 산차를 앞에 놓고 밤을 지새우며 혼란한 정국을 걱정했던 이들은 달마의 관심법과 혈맥론에 대해서도 깊이 담론했다.

다음 날 유배지 제주로 떠나는 추사를 위해 초의뿐 아니라 추사를 신망했던 몇몇 지인들이 동행하여 이진포 나루까지 배웅한다. 초의는 만리창파를 건너야할 추사를 위해 급히 〈제주화북진도〉를 그려 벗의 무사안녕을 기원했다. 실로 당시 그려진 이 그림은 추사의 호신부(護身符)였던 것이다.

따라서 〈제주화북진도〉의 제발(題跋)에 “평시에 공은 나와 더불어 신의가 중후하여 서로 사모하고 경애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는데 갑자기 유배 길에 머물게 되니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平時 公與我信義重厚 不忘相思相愛之道 橫路留得 幸於行耳)”라 하였다. 서로의 우정을 “서로 사모하고 경애하는 도리를 잊지 않는 사이”라 정의 하였다. 뜻을 아는 이들의 관계는 금란지교(金蘭之交)처럼 향기롭고 단단한 것이다.

특히 제주 유배시절, 추사는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승화시켰다. 아울러 차와 불교에 깊이 천착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늘 청에서 간행되는 신간 서적을 추사에게 가져다 준 인물은 이상적이었다. 그의 변치 않는 신의에 보답하고자 〈세한도〉를 그려 제자에게 주었으니 그의 속내는 사제지간의 은근한 존경과 의리, 인간애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추사는 어떤 경전을 연구하고 마음에 거울을 삼았던 것일까. 그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엔 〈안반수경〉를 얻은 기쁨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근래 〈안반수의경〉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선가에서도 보관하기 드문 책입니다. 선가에서는 흔히 현실성 없는 할과 갈로서(盲捧?喝) 어두운 산의 귀신 굴(黑山鬼窟)로 가서, 이러한 최상의 진리(妙諦)를 모르니 사람(의 마음)을 슬프고 비통하게 합니다. 그대와 천기(天機)의 맑고 오묘한 세계를 논증하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 〈유마경〉은 철선 스님이 끝내 빈말하고 마는군요. 요즘 그대와는 내왕이 없습니까(近得安般守意經 是禪藏之所希 有禪家每以盲捧?喝 做去黑山鬼窟 不知此無上妙諦 令人悲憫 恨不如與師天機淸妙者一爲對證可歎 維摩經鐵衲 遂食言耳 比與師無來往否)

▲ 초의 선사 동상<사진 왼쪽>과 추사 김정희 동상.<사진 오른쪽> 초의와 추사는 승속과 신분, 사상을 넘어 평생에 걸쳐 교류하며 서로의 학문, 예술 등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추사가 불교 교학에 밝은 것도 이런 교우관계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글은 1836년 새해에 초의에게 보낸 편지로 〈안분수의경〉을 구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안분수의경〉은 안세고의 번역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경전으로 초기 불교 수행의 오정심관(五停心觀) 중의 하나이다. 좌선 수행할 때에 들숨과 날숨(入出息)을 관(觀)하여 어지러운 마음을 고요히 안정시켜 집중케 하는 수행법을 초의와 함께 논증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그대와 천기(天機)의 맑고 오묘한 세계를 논증하지 못함이 한스럽습니다”고 한 것이다. 초의는 태식법(胎息法)에도 밝았다.

이 외에도 아암혜장의 제자 철선 스님과도 〈유마경〉에 대한 모종(某種)의 약속이 있었으나 이행되지 않았던가 보다. 오래 전부터 추사와 교류가 있었던 철선(鐵船1791~1858)은 수룡(袖龍1777~?)의 제자이며 다산의 전등계(傳燈契) 제자이기도 한데 글씨에 능했다. 수룡이 아암(1792~1811)의 고제(高弟)라는 점에서 이들과의 교유에는 아암의 역할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초의에게 “요즘 그대와는 내왕이 없습니까”라고 에둘러 물었던 것은 철선에 대한 추사의 관심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추사에게 있어 초의는 불교의 깊은 심원을 증험할 벗이었다. 이처럼 서로의 정신적 일체감을 돈독히 나누웠던 정황은 금강산을 유람하던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대가 (금강산)간 곳은 이 몸 또한 간 것이고 그대 가지 않은 곳은 나도 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상(名相: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으로 나를 찾고자 한다면 어떻게 나를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대목에서 확인된다. (금강산에서)돌아오는 길에 “설령 매우 춥다 하더라도 나를 보지 않고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라던 추사는 회유는 깊은 믿음으로 자리매김한 벗에게나 드러낼 수 있는 속내이다. 
 
한편 추사는 조선 후기 불교계에 벌어진 선리논쟁에 참여하여 초의의 입장을 옹호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변망증 15조〉이다. 추사와 백파 긍선(1767~1852)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이지만 불교적 관점은 조금 차이가 있었던 듯하다. 〈완당전집〉‘여초의’제11신에는 백파에 대한 추사의 생각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그대가 멀리(대둔사로)돌아갔으리라 여겼기에 그 동안 학림암에 있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교활한 백파노승에게 얽힌 것이로군요. 이 노인(백파)은 강설(講說)이 화려하고, 소초(疏?)에도 익숙하며 구변이 바다를 뒤집을 만하지만 선리에 대해서는 진정 그 깊이를 모르겠습니다. 지난날을 생각해보니 나의 병세가 깊어져 한 번도 만나질 못했으니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조카 같은 가까운) 그대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을 모르셨던가요. (백파) 그 노승이 글을 가지고 와서 한 두 번 보았을 뿐입니다. 이 사람은 (시와 문장에)재주가 뛰어나고, 도도하고 당당하며 경험한 것도 이미 많아서 일일이 견줄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선은 부처에서 연원된 것이고, 또 대둔사에서 연원한 것입니다. 이 외에 (참고할 만한)다른 선이 없는데, 어찌 행장을 꾸리지 않으십니까(意謂歸錫遠擧 不料間留鶴林 爲白坡老狡獪所纏繞也 此老 亦於說講爛 熟疏? 口海爛? 至於禪理 寔未知其淺深也 顧此病情際劇 未與一會 殊可? 咸生不知是何人歟 帶來其老師書一再見之而已 此等 錦心繡口 滔滔盈盈 所經歷已多 不可方物耳 師之禪在金仙 又在頭輪 外此更無禪耳 何當理裝)

 1838년경에 쓴 추사의 편지이다. 당시 초의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잠시 학림암에서 머물며 백파에게 의지해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추사는 “이 노인(백파)은 강설(講說)이 화려하고, 소초(疏?)에도 익숙하며 구변이 바다를 뒤집을 만하지만 선리에 대해서는 진정 그 깊이를 모르겠습니다”고 하면서 초의가 지향해야할 선의 연원은 대둔사(현 대흥사)에 있으니 “이 외에 (참고할 만한)다른 선이 없는데, 어찌 행장을 꾸리지 않으십니까”라고 채근한다.

이는 백파처럼 교활한 노승에 얽매이지 말라는 충고였다. 이처럼 백파와 추사는 서로의 입장이 팽팽하여 서로 싫어한 것 같지만 그 속내는 달랐다. 학문적 관점에서 드러낸 논의에서만 추사의 입처를 명백하게 드러낸 것뿐이며 정작 백파의 비문인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을 써줄 정도로 백파의 진면목을 이해했던 추사였다. 이는 아무리 학문적 견해가 다르더라도 백파에게 보인 그의 정중한 예의는 소홀함이 없었다.

한편 추사의 친불교적 요소는 승려들과의 교유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다른 한편으론 묘향산에 들어 갈 때에 〈금강경〉과 〈개원고경(開元古鏡)〉을 호신부(護身符)로 삼았다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는 그의 〈제천송금강경후(題川頌金剛經後)〉에 “내가 묘향산에 들어 갈 때 이 (금강)경과  〈개원고경(開元古鏡)〉을 산에 들어가는데 (몸에)지니는 호신부로 삼았다”고 한 것에서 확인된다.

더구나 〈불설사십이장경후(佛說四十二章經後)〉에서 “〈불설사십이장경후(佛說四十二章經後)〉은 모두 사실과 인과를 쫓아서 이야기를 만들었으니 〈능엄경〉, 〈화엄경〉 같은 여러 경전들이 아마 모두 이경으로부터 부연된 것 같다”고 하면서 “이 경전을 읽고 불교 역시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도록 권하고 악한 짓을 징계하도록 권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고 하였다.

“내전(內典:불교 경전)을 익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사십이장경후(四十二章經)〉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할 말할 정도로 불교에 밝았다. 특히 추사의 제주 유배시절엔 그의 명성을 따라 제주까지 먼 길을 달려온 승려들이 있었다. 〈완당전집〉‘여초의’ 제 20신에 “영순 스님이 갑자기 이 멀리까지 왔으며 그대의 편지를 보니 매우 위로가 된다”하면서 “영순 스님의 향학에 대한 뜻이 매우 가상합니다. 돌이켜보건대 나는 우매하여 어느 것 하나도 능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배를 잡고 웃음이 나는 것을 참지 못 하겠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영남의 스님이 이제 돌아간다는데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는지 모르겠다”고 한 것에서도 제주까지 추사를 찾아온 승려들의 정황이 확인된다. 그러기에 승려들 사이에서 추사의 박학한 불교에 대한 인식과 수준은 이미 불교계에 알려진 듯하다. 이는 승려들이 제주까지 찾아가 배우기를 청한 연유이다. 조선 후기 대유학자 추사는 친불교적인 인물로 유불교류사(儒佛交遊史)를 장식할 족적을 남긴 인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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