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힘없는 법거량… 佛·儒 모두 꿰뚫은 선비

조선시대는 흔히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시대로 잘 알려져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를 ‘유교’로 삼은 조선은 사대문 안에 승려가 출입할 수 없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승려는 당시 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식인이자 교양인이었다. 그래서 유교와 불교를 넘어 서로의 학문과 사상을 교류했던 유학자와 스님들은 상당수다. 본지는 억불의 시대 조선에서 불교를 만나 혜안을 넓히고 유·불의 지평을 키웠던 유학자들을 정리한다.  〈편집자 주〉

불교·금석학 등에 밝았던 유학자
초의 스님과 차·불경 담론한 지음
옹방강·소동파 ‘친불’에 영향
해붕 스님과의 법거량서도 드러나
〈금강경〉 空 사상의 일견 보여줘
학림암, 상경 승려 거점사찰 역할

추사 김정희의 진영. 추사는 숭유억불의 조선에서 불교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했던 대표적 유학자다.
추사 김정희(1786~1856)처럼 그 명성이 후대까지 회자되는 인물도 드물다. 이는 그의 사상과 예술의 지향점이 추사체로 완성되었고, 고증을 중시하는 그의 학문적 성향 또한 교유했던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게다. 이뿐만 아니라 성리학 일변도의 조선 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해를 통해 간난(艱難)한 제주 유배 시절을 견디며 그의 사유세계를 폭 넓게 구축했던 일이나 차를 통해 심신을 위로했던 그의 일상은 통상적인 유학자와는 다른 것이다.

특히 그는 해붕 전령(?~1826)과 백파 긍선(1767~1852)뿐 아니라 초의선사(1786~1866)이외에도 여러 승려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 서로의 혜안을 밝혀나갔다는 점에서도 그를 조선 후기 유불교유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는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그가 불교를 탐구하게 된 것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이에 앞서 그의 생애의 따라가 보면 증조(曾祖) 김한신(1720~1758)은 영조의 장녀 화순옹주에게 장가를 들어 월성위에 봉해졌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조부와 10촌 형제간이며 부친 김노경(1766~1837)은 이조판서 등,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후일 백부 김노영(1747~1797)의 양자로 피양(被養)되어 월성위의 봉사손(奉祀孫)된다. 따라서 그의 가문은 지체 높은 종척(宗戚)이었다.

한편 조선 사회는 양란(兩難:임란과 호란)이후 성리학은 명분만을 중시하여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폐단을 드러냈다. 예론 또한 형식을 강조한 허례(虛禮)가 조장되었고 족벌세가들의 전횡이 난무했던 시기이다. 이런 상황에 회의를 품었던 신예들은 청에서 일어난 고증학에 관심을 두었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론 사회적인 개혁을 시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를 주도한 것은 바로 북학파들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정조는 국정의 쇄신을 도모하고자 이들을 후원하여 점차 성장해 나아갔는데 이 무렵에 추사가 태어났다.

어린 시절, 천재적인 그의 재기(才氣)를 한 눈에 알아본 인물은 박제가다.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추사는 자연스럽게 북학에 눈을 떴을 것이니 그에게 미친 박제가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후일 그의 학문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옹방강(1733~1818)과 완원(1764~1849)을 만남도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추사는 박제가로부터 이들의 학문적 위상과 깊이를 익히 알고 있었다. 연경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추사의 천재적인 자질과 결기는 익히 소문이 나 있었던 듯한데 이는 연경을 출입했던 박제가나 추사의 벗들에 의해 퍼진 듯하다.

특히 추사가 고증학의 골수인 경학뿐 아니라 금석학에 대한 관심을 지녔던 배경엔 청의 문예를 이끈 옹방강과 원원이 있다. 수많은 장서와 해박한 학식을 겸비한 이들에 대한 존경과 학문적 충격은 컸을 것이다. 특히 추사는 차와 불교에 깊이 침잠된 이들의 품 넓은 학문의 포용성에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옹방강의 사경(寫經)에 대한 열의 또한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옹방강이 존경했던 소동파의 학문세계, 다시 말해 소동파의 불교적인 삶과 수행에 대한 깊은 식견은 추사의 학문적 시야를 넓힌 계기가 되었다.

후일 추사의 학문은 경학만큼이나 불교학의 비중도 크게 두었다. 그는 승려들과 폭 넓게 교유한 유학자이며 불경을 연구한 선비였다.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원각경〉, 〈안반수경〉 등 경전 뿐 아니라 〈법원주림〉, 어록, 전기 등을 섭렵하여 불교에 대한 안목이 높았다. 특히 초의 의순(1786~1866)과는 차뿐 아니라 불경에 대한 이론적 검증을 함께 담론한 지음(知音)이었다.

조선 중·후기의 불교계에서는 선 일변도의 침체된 분위기에서 새바람이 일어났으니 이는 화엄학에 대한 관심이었다. 편양 언기(1581~1644)의 법손 환성 지안(1664~1729)은 종풍을 드날렸다. 전라도 대흥사를 중심으로 화엄강회가 일어났는데 화엄종장으로 꼽히는 인물은 설파상언(1707~1791)이다. 이후 연담 유일(1720~1799), 묵암 최눌(1717~1790) 같은 학승들이 출현하였다. 특히 연담은 사기(私記)를 저술하여 자신의 선리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백파의 〈선문수경〉에 드러난 오류를 지적한 초의의 〈선문사변만어〉는 조선후기 불교계의 활발한 선리 논쟁을 이끈 동인(動因)이었다.

이 논쟁에는 추사와 신헌 같은 유학자도 참여하여 초의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점이다. 특히 추사의 〈변망증십오조〉는 백파의 오처(誤處)를 신랄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는 유학뿐 아니라 불교계에서도 활발한 논의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려는 과정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이외에도 사회적인 혼란이 극심했던 시기에 정쟁의 상처와 간난을 절감한 유학자들 중에는 불교에 심취하여 유불회통(儒佛會通)을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추사의 입장은 달랐다. 바로 유학과 불교가 지닌 특장을 깊이 인식한 학자였던 것이다.

학계에서 그의 친불 성향은 이미 예산의 영내 화암사 건립을 위시하여 집안의 친불 환경과 유배로 인한 굴곡된 삶이 작용하였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가 있지만 소동파의 외유내불(外儒內佛)의 학문적 경향이나 옹방강, 완원의 친불교적 입장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여겨진다. 물론 동파의 학문적 경향과 문인의 이상을 실천하려했던 삶의 방식은 조선 유학자들이 흠모했던 것이다. 특히 추사 또한 동파가 승려들과의 폭 넓은 교유를 통해 사유의 깊이를 심화했던 사실에 주목했던 듯하다. 이는 그가 1815년 겨울 학림암을 방문하여 해붕과 나눈 법거량(法去量)에서 드러나는데 이는 초의의 〈제해붕대사영정첩(題海鵬大師影幀帖)〉 발문(跋文)에서 확인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지난번 을해년(1815)에 노화상을 모시고 수락산 학림암에서 수행하고 있을 적에 하루는 추사가 눈을 헤집고 찾아와 해붕노사와 공각의 능소생에 대해 논했다. 하루를 묵고 돌아갈 적에 노사가 행축(行軸)에 게(偈)를 써 주었다(昔在乙亥 陪老和尙 結臘於水落山鶴林庵 一日阮堂披雪委訪 與老師大論空覺之能所生 經宿臨歸 書偈於老師行軸)”

수락산 학림암 전경. 이곳에서 추사는 선암사 승려 해붕을 만나 거량을 한다. 도성출입이 금지됐던 조선에서 학림암은 상경한 승려들의 거점 사찰로 활용됐다.
1815년은 초의에게 의미가 깊은 해이다. 이는 첫 상경 후 추사를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초의의 첫 상경의 연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다산의 장남인 유산 정학연(1783~1859)과의 언약이 있었던 듯하다.

이 당시 승려들은 도성을 출입할 수 없었기에 초의는 한강진에서 배를 타고 수종사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의가 당도하여 두릉의 다산 댁을 찾았지만 유산은 출타 중이었다. 난감해진 초의는 우선 수종사에 머문다. 당시 수종사의 수행 환경은 열악했다. 물자가 풍족하질 못했던 시절, 추운 겨울을 보낸다는 건 어려웠던 듯하다.

출타에서 돌아 온 유산은 이런 사정을 알고 다른 거처를 주선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학림암이다. 바로 학림암에서는 선암사 승려 해붕이 수행 중이었다. 초의는 이곳에서 해붕을 찾아온 추사를 극적으로 만난 셈이다. 더구나 추사는 연경에서 돌아온 후인데 수행이 깊었던 해붕과 공, 각의 소생을 논했던 것이다.

추사는 이미 〈금강경〉은 공 도리와 각처(覺處)에 대해 일견(一見)이 있었던 듯하다. 하루 밤을 묵은 다음 떠나는 추사를 위해 해붕은 게를 써 주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궁금하다. 후일 추사가 〈해붕선사영찬(海鵬先師影讚)〉을 쓴 인연은 공각의 법거량을 통해 서로의 그릇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이 영찬은 추사의 묵적(墨跡) 중에서도 귀한 글이다.

“해붕이 말하는 공은 오온개공의 공이 아니라 곧 공즉시색의 공이다. 혹자는 그것을 공종 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종에 있지 않다. 또한 혹자는 또 진공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런듯하다. 나는 또 진이 그 공을 얽맨다면 또한 해붕의 공이 아니다. 해붕의 공은 곧 해붕의 공이다. 공이 대각을 이룬다하니 이는 해붕이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해붕이 홀로 나아가 홀로 통했으니 또한 잘못 이해한 것이다(海鵬之空兮 非五蘊皆空之空 卽空卽是色之空 人或謂之空宗 非也 不在於宗 又或謂之眞空似然矣 吾又眞之累其空 又非鵬之空也 鵬之空 卽 鵬之空也 空生大覺 是鵬之錯解 鵬之獨造獨透 又在錯解中)”

이 글은 추사의 유작이나 진배없는 작품이다. 영찬(影讚)을 쓴 후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더구나 이는 추사와 승려들과의 교유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영찬은 해붕과 추사가 눈이 내린 학림암의 깊은 암자에서 공각(空覺)의 능소생(能所生)을 토론한 인연으로 세상에 남겨진 것이다. 대부분 공(空)사상에 대한 내용이다. 이들의 첫 만남에서 나눈 법거량은 그때까지도 추사에게는 미흡했던 것이었던가 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해붕이 관통한 공(空)은 진공(眞空)이라 하고 공종(空宗: 공의 교리를 종지로 하는 것)이라 하지만 추사의 견해로는 미진하다는 것이다. 바로 해붕의 잘못은 공이 대각을 이룬다고 료해(了解)한 점이었다.

추사가 내린 결론은 해붕이 홀로 공의 도리에 나아가 홀로 통했기 때문에 이런 착해(錯解)가 일어난 것이라 본 듯하다. 그럼 공사상에 정통했던 해붕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범해의 〈동사열전〉에 의하면 스님의 이름은 전령이고, 자는 천유이며 호는 해붕으로 순천사람이다.(師名展翎 字天遊 號海鵬 順天人) 선암사에서 출가하여 묵암 최납(?庵崔訥)선사의 법을 받았다.(出家於仙岩寺 受?庵崔訥先師之法印)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 중에 한 사람이다. 해붕은 문장을 잘했다고 전해진다고 하였다.

당시 호남의 칠고붕 중에 이삼만은 글씨에 능했던 인물로 초의와도 교유했으며 김각은 도가의 양생에 밝아 초의에게 호흡법을 가르쳐 준 선비다. 그와 초의가 나눈 시문이 수십편이 전해진다. 따라서 해붕은 호남에서 손꼽히는 학승으로 유학자들과의 교유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측하건대 이는 다산이 승려들과 학연을 맺었으며 교학했던 것도 호남지역의 유불교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밖에도 해붕이 선암사를 떠나 학림암에 머물며 수행했던 사실이나 백파가 이곳에서 수행했던 일로 미루어 볼 때 조선 후기에 학림암은 지방에서 상경한 승려들의 거점 사찰이었던 듯하다. 다시 말해 사대문을 출입할 수 없었던 승려들의 출입동선을 생각해 볼 때 학림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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