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붓아카데미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

인간, 생각의 분별로 세상을 봐
한 생각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 중도
탈이분법사고는 서양논리학과 달라
중도적 사고 필요성, 수학 ‘역설’로 증명

김성철 교수는 … 서울대학교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서 〈용수의 중관논리의 기원〉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앙승가대와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 강사를 거쳐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티벳장경연구소장, 불교사회문화연구원장, 계간지 〈불교평론〉 편집위원장을 역임했고 한국불교학회, 불교학연구회, 인도철학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항상 ‘생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즉 세상의 끝은 로켓을 타고 간다고 해서 만나는 것이 아닌 생각의 끝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관논리’다.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는 7월 24일 미붓아카데미 ‘21세기, 불교를 철학하다’ 강좌서 ‘중관논리와 역설’에 관해 강의했다. 김성철 교수는 “중관사상은 단순히 경전을 암기하는 것이 아닌 논리에 의해 풀이해내는 분류학”이라며 “중관사상은 흑백논리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폭로한다. 이분법적 구조에서 탈피한 이론”이라고 설명했다. 정리= 노덕현 기자

‘중관’사상의 논리학 ‘중도’
중관사상은 불교에서 가장 어려운 분야라 일컬어집니다. 불교학뿐만이 아닌 모든 철학분야에서 가장 심오하고 난해한 학문이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중관사상은 용수 스님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용수 스님의 별명이 제2의 부처입니다. 수많은 논쟁 속에서 갈라졌던 불교사상이 용수 스님으로 인해 하나의 사상으로 녹아듭니다. 바로 중관사상입니다. 이 중관사상은 이후 대승불교의 토대가 됩니다. 용수 스님이 ‘제2의 부처’, 혹은 ‘대승 불교의 아버지’ 등으로 불리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관 사상은 무엇일까요.
중관사상은 중도의 논리학입니다. 일반적인 학문 중에는 수학과 견줄 수 있습니다. 단순히 경전을 암기하는 것이 아닌 논리에 의해 풀이해내는 분류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머릿속으로 생각할 때 흑백논리에 빠져듭니다. 서양논리학에서는 흑백논리를 토대로 세상을 설명합니다. 중관사상은 이 흑백논리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폭로합니다. 우리는 이를 ‘공의 논리’라고도 부릅니다.

불교는 우리가 늙어 죽을 때까지 겪는 여러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합니다. 용수 스님은 부처님과 같이 중생이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철학적 의문을 품으면 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그에 대해 답을 내줍니다. 하지만 그 답은 철학과 종교마다 제각각입니다. 그런데 중관사상은 이 의문을 해결하는 방식이 독특합니다.

중관사상에서 ‘중관’(中觀)은 ‘중도를 관찰한다’는 말입니다. 용수 스님은 자신의 저서 <중론>에서 머리에서 생각된 모든 것은 ‘사상누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의 현상에 매진해 그것에 몰두하다보면 진리에서 멀어진다는 것이 용수 스님 중관사상의 주된 논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머리로 생각하는 걸 비판하는데, 그 비판 또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논쟁이 발생합니다. 이 <중론>에 대한 비판을 논리적으로 반박한 것이 <회쟁론>입니다. ‘회’(廻)는 ‘돌리다’는 뜻이며 ‘쟁(諍’)은 논쟁을 의미합니다. 다른 논리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한 문헌입니다. 중관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중론>과 <회쟁론> 이 두 가지 문헌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 현상은 모두 ‘중도’적 현상
일반 논리학에 따르면 우리는 보통 단어에 의지해 생각합니다. ‘개념’의 출발이 그것입니다. 이 ‘개념’은 하나만 가지고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엄마, 밥’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개념이 두 가지 이상이 모인 ‘밥 먹자’고 하면 말이 됩니다. 바로 판단론입니다. 여기에 추리가 더해집니다. 불이 보이지 않는데, 연기가 보이면 불이 났다고 순간적인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생각을 작동할 때 ‘개념’의 벽돌로 ‘판단’의 기둥을 올린 뒤 ‘추리’의 집을 짓습니다. 서양의 논리학에서는 이런 과정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해 설명합니다.

반면 중관의 논리에서는 이러한 논리구조에서 벗어납니다. 중관논리에서는 ‘모든 개념은 실체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눈, 코, 입 모두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무(無) 안이비설신의’라 합니다. 가령 우리가 ‘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눈을 본적이 있습니까? 거울에 보인 눈은 ‘눈’이 아닌 시각에 의한 대상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색성향미촉법’ 중 색(色)이라 합니다. 남의 눈이든지 거울에 비친 눈이든지 시각대상이지 시각작용이 아닙니다. 시각작용은 시각작용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눈은 없는 것입니다. 칼은 두부도 자르고 무도 자르지만 자르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그 자신의 칼날입니다. 손가락은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지만 자기 손가락 끝은 가리키지 못합니다. 그렇듯이 눈으로 모든 것을 보지만 못 보는 것이 바로 자신의 ‘눈’입니다. 그래서 눈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눈이 없기에 보이는 것에 대한 시각 대상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분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눈은 여기에 있고 이 눈으로 밖을 본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면서 온갖 가짜 생각을 만듭니다. 눈이 없고 시각대상이 증발한 상황에서는 진리만이 보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색즉시공’ 이라 하는 것입니다. 해탈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며 실제가 증발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겁니다. 일체, 세상만사가 다 증발하면 그때 ‘본래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구나’, 전부 내 생각이 만든 것이구나‘하고 아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바로 중관사상입니다. 위대한 학문이지요.

<중론>에서는 이러한 말이 쓰여 있습니다. ‘만일 길을 가는 사람을 간다고 청한다면 이는 맞지 않다. 간다는 작용이 없다면 어떻게 가는 이가 성립하겠는가.’

쉽게 말씀드리자면 사람이라는 존재의 의미 안에는 동물이라는 의미가 함께 있고, 이 안에는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인다는 의미가 있기에 길을 가는 이라고 칭하는 것은 의미가 중복 된다는 말입니다. 쉽게 다른 현상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흔히 우리는 ‘비가 내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비는 구름 속에서 수분이 모여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칭합니다. 이미 ‘비’라는 속성 속에 ‘내린다’는 것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비가 내리고 있다고 말을 하면 의미가 중복되는 것입니다. 모든 말이 그렇습니다. 의미가 중복되어 있는데 그걸 알아채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이런 식의 오류를 ‘증익방’ 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반대인 ‘손감방’입니다. 다시 ‘비가 내린다’로 돌아와 봅시다. 수분이 모이기 전에는 ‘비’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리지 않는 비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사실위배의 오류입니다. 다른 예로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에서 바람이 불어오기에 바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북서풍이 불어올 때 우리가 북서쪽으로 가면 그 곳에 북서풍을 불어오게 하는 바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이 생성되는 기압골에 들어가 있어도 바람 그 자체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이 또한 사실위배의 오류입니다.
그럼 이러한 존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바로 ‘중도’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비가 내리는 것은 우리의 이분법적 사유가 적용되지 않는 중도적 현상입니다. 비가 내려도 중도적 현상이고 바람이 불어도 중도적 현상이며 꽃이 피어도 중도적 현상입니다. 탈 이분법적인 현상인 것이지요.

수학의 ‘역설’과 중관사상
서양에서 가장 대표적인 학문이 ‘수학’입니다. 철학보다도 더 보편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은 2천년 이상 서양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최근에는 대수학을 능멸하다시피한 학문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수학 기초론’입니다. 수학기초론은 수학 분야 중 논리학과 증명이론 등을 통해 수학의 근본적인 기초, 근거를 찾기 위한 움직임입니다.

‘수학 기초론’은 버트런드 러셀이 ‘역설’을 발견하면서 만들어졌습니다. 러셀은 수학 또한 사유의 끝에 작동되는 학문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논리학을 연구한 러셀은 수학의 무모순성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논리학의 무모순성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러셀에 있어서 수학의 기둥은 논리학이었으므로 논리학에 먼저 모순이 있으면 안되었지요. 이들은 자기자신을 포함하는 집합이 정의될 때 생겨나는 역설을 없애고 싶어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든 명제는 거짓이다’는 명제 같은 것입니다. 이 명제는 모든 명제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도 명제이므로 명제가 참이면 모순이 되고, 명제가 거짓이라고 해도 모순이 됩니다.

러셀은 이 같은 연구결과를 모아 1902년 ‘역설’에 대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고심 끝에 수학을 논리적으로 푼 <수학의 원리>를 펴냅니다.

이 때 러셀은 역설을 피하기 위해 유형이론을 도입합니다. 유형이론은 어떤 문장이 의미하는 것에는 그 문장 자신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를 당연히 포함된다고 생각하기에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명제의 경우 유형이론에 따르면 모순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후대에 괴델이 이 역설의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 수학에 대입합니다. 그리고 수학의 불완전성 정리를 논증합니다.
사람들은 러셀의 ‘역설’을 통해 그동안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유체계가 사실은 주관적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역설’을 할 수 밖에 없을까요. 러셀은 이에 대한 대답으로 ‘셀프 리퍼런스’라고 답했습니다. 현상을 바라보기 전 생각의 분할이 먼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의 분할은 실제로는 나눠지지 않은 세상입니다.

다시 불교로 돌아와 봅시다. 불교는 ‘무주정법’ 즉, 머물지 말라고 합니다. 대상에 집착한다면 그 것에 매몰돼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볼 때 생각을 통해 봅니다. 세상의 끝은 로켓을 타고 가 만나는 것이 아닌 사유의 끝에서 만나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 생각에 있다는 것이 불교입니다. 만약 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를 환원시켜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이자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불교의 사유체계는 러셀의 ‘역설’과도 닿아있습니다. 역설에서 말하는 명제의 집합을 분리하는 것, 이 것이 중도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든 자신의 사유를 전개시키다보면 공을 만나는 것입니다.

간화선에서는 화두에 드는 방법으로 생각이 이분법에 빠지지 않도록 유도합니다. 가령 손가락을 튕길 때 이 손가락이 지금 튕기는 것인지, 손가락을 제외한 다른 것이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손가락을 튕긴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또 튕기는 부분을 과연 손가락이라 할 수 있는지를 큰 의심을 내고 참구하라 합니다. 이를 점점 확대해나가면 문득 깨달음이 온다는 것이지요.

평생 화두를 들며 수행할 경우에 사람 자체가 화두로 변합니다. 성철 스님의 경우 삶과 그 말이 모두 일치했습니다. 성철 스님의 삶은 역설이었으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역설이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러셀의 ‘역설’과 같이 논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이 세상이 사실은 아상에서 오는 것이란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자신은 상을 버린 삶을 보였습니다. 바로 중도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중관사상과 수학에서의 ‘역설’을 비교했습니다. 이 둘은 사유의 끝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이것을 체득하는 게 간화선입니다. 성철 스님이 돌아가시기 전 쓰신 열반송을 보며 오늘 이 시간 마치겠습니다.

生平欺男女群
彌天罪業過須彌
活陷阿鼻恨萬端
一輪吐紅掛碧山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였으니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넘는구나.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인데
둥근 바퀴 하나가 붉은 빛을 토하며
푸른 산에 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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