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 모성애 다룬 영화 ‘마돈나’

 자신 위해 아이 버리는 어머니
자기희생으로 아이 살리는 어머니
미나와 해림 통해 보살사상 역설
“생의 공허함을 채우고 싶다면
욕망의 엔트로피 따르는 게 아니라
상처 입은 ‘타인의 얼굴’을 보라”

▲ 영화 ‘마돈나’는 미나와 해림을 통해 사회적 타자로서의 여성의 삶을 그리고 있다.
올해 상반기 영화계의 최고 화두는 ‘부성(父性)’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영화에서는 한 실향민의 삶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그린 〈국제시장〉이 대표적이고, 외국 영화에서는 물리학적인 상상력으로 충만한 〈인터스텔라(Interstellar)〉가 대표적이다. 다만, 부성애를 다룬 방식은 각기 다른 스펙트럼의 빛깔을 띠고 있다.

〈국제시장〉은 가족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버지라는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아버지의 자리가 국가의 위치로 환치된다는 점에서 파시즘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우주적인 시공간의 휴머니즘으로 승화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Madonna)〉는 앞서 소개한 작품들과 정반대로 모성애를 다루고 있다. 사회적 타자로서의 여성을 삶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전형적인 여성주의(Feminism), 그중에서도 젠더(Gender) 영화에 해당한다.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자.

한 병원의 간호조무사 해림(서영희)과 의사 혁규(변요한)는 심장 이식이 필요한 전신마비 환자 철오를 담당하게 된다. 철오의 아들 상우(김영민)가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아버지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상우가 철오의 생명을 연장하는 이유는 철오가 살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매달 10억의 수익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 철오가 죽게 되면 상우는 상속금을 받지 못한다. 철오가 이미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이런 설정이 현실적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정체불명의 사고 환자 미나(권소현)가 실려 오게 된다. 상우는 해림에게 그녀의 가족을 찾아 장기기증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한다. 상황이 어려웠던 해림은 제안을 수락하고, 미나의 과거를 추적해간다. 해림이 미나의 과거를 밟으면서 발견하는 것은 상처받은 한 여성의 삶과 그 상처를 위무하는 모성애이다.

영화제목인 ‘마돈나’는 미나의 닉네임이기도 하다. 미나가 이런 닉네임을 가진 이유는 가슴이 크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다산과 풍요의 여신인 이탈리아의 마돈나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풍만한 미나의 육체가 다산성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외려 그녀는 결핍 혹은 결락의 상징적인 인물로 비쳐진다. 그 이유는 미나는 자본사회의 계급에서 하위 계층이기 때문이다. 미나에게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유일한 가족이다. 보험 전화상담 영업사원, 화장품 공장 공원 등 그녀의 직업은 잉여쾌락 사회에서 타자적 위치에 해당한다. 이후 미나는 화장품 공장 박 기사에게서 강간을 당한 뒤 홍등가로 향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 속 인물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서는 서 있는 자와 무릎 꿇은 자가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구강 성행위를 하는 미나와 강제로 양주를 받아 마셔야 하는 혁규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오버 랩 된다.

그런가 하면, 영화 속에는 두 개의 여성성이 있다. 자기가 살기 위해 아이를 버리는 어머니(해림)가 있는가 하면, 자기를 희생해서 아이를 살리는 어머니(미나)가 있다. 이 두 개의 모성은 영화 말미에 합일하게 된다. 해림이 바닷가에 버린 가방을 미나가 열고 그 속에서 아이를 꺼내는 장면은 숭고하다.

꿈속에서 해림은 미나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해림은 “왜 아이를 지우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미나는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자신을 아이가 사랑해줬다.”고 말한다. 해림과 미나의 만남은 레비나스가 말한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상처 입은 ‘타인의 얼굴’을 보듬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사상의 다름 아니다.

보살사상에서 중생 구제의 지향은 실천적 휴머니즘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실천율은 6바라밀의 보시바라밀과 인욕바라밀에 해당할 것이다.

영화 〈마돈나〉는 동정심을 싸구려로 치부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의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욕망의 엔트로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타인의 얼굴’을 보는 것임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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