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스님

만해는 저자거리에 있지만 위대해
스님 시의 핵심은 역설과 모순
현실 돌파해 나가는 예술 보여줘

▲ 탁주에 발을 씻다. 64×94cm.종이에 수묵. 2013(부분도)한용운님의 ‘파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현실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이해관계에 달려 있다. 그것이 현실이고 우리사회의 병폐다. 만해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최근 한국 전통의 한지를 찾기 위해 전주 완주 임실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나는 전통한지의 원형을 찾고자 30년 이상 한지 제작현장을 방문했고 지장들의 생산품을 수집해 왔다. 그러나 이번 답사는 달랐다. 내 개인의 지적 호기심 차원이 아니라 행정자치부의 전통문화 복원과 현실화에 대한 관심에 의해 실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자문은 현 정부가 전통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행정부처가 한국문화에 대한 전통성과 문명사적 가치에 주목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다만 이런 관심이 진작 문화재청에서 관심을 갖고 추진했어야 할 일인데 그렇지 못한 점은 안타까웠다. 현장 방문은 한지를 만드는 전 과정을 이해하고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전통문화의 현주소와 미래상을 생각하게 했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현실도 목도해야 했다.
전통문화는 자기철학 자기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통한지 제작 현장에서 만난 장인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긍지도 약했고 가치도 몰랐다. 나아가 전통 한지원형 복원과 재현에 대한 의지도 거의 없었다.
전통한지 제작 현장에서 확인되고 있는 정통성은 미약해 보였다. 한국고유의 방식이 아닌 외래적 요소가 다분했다. 그리고 한지의 최고 가치인 서화용 종이보다 문종이 생산에 그치고 있다. 전국 어디에서도 천년 한지의 빛나는 광택은 찾기 어려웠다. 참담했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아직도 한국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져 있는 가짜 전통이다. 한지를 만드는 재료와 도구 그리고 후처리 방식 모두가 국적이 모호하다. 식민지 시대부터 변화한 일본방식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우리 고유의 재료에 대한 연구는 물론 산지와 분포 그리고 생산 가능한 양 조차 파악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를 제대로 관리 감독할 공무원과 연구자도 거의 없다.
일제 강점기 이후 파행으로 치달았던 전통 원형이 최소한 일본 지배 이전의 방식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단언하기 싫지만 한지 제작현장은 분명 일본 문화의 또 다른 이식 현장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나는 한지 답사 현장에서 불현듯 만해가 생각났다. 수입산 닥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파리 떼를 보면서 만해가 그토록 목숨처럼 지키려 했던 살아있는 한국의 정신과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부끄러운 현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시는 언어의 정수다.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것을 소통시킨다. 표현 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한다.
시는 사상의 핵심이다. 아니 사상보다 더 위대하다. 그래서 시인은 세상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동물 등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깊은 세계는 마음의 심층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는 당대의 윤리. 제도를 훌쩍 뛰어 넘는다. 양심의 소리로 바라본다. 그래서 시인은 진리와 진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만해 한용운, 분명 그는 우리시대의 돌올(突兀)한 선각자이다.
자기 진리를 위해 변절하지 않았고 자기의 삶과 시를 일치시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 사람이다. 그의 시는 시대에 갇히지 않고 시대를 뛰어 넘는다. 지금시대에도 낡아 보이지 않는다. 당대에 소환된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제시한다. 살아 있다. 예술의 생명력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그를 종교시인으로 가두어서 안 된다.
만해 시의 핵심은 역설과 모순이다. 이 역설과 모순을 어떻게 해석하고 바라보고 있는가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바로미터이다. 만해는 시를 통해 대립하는 통일을 역설하고 있다.
새로운 미학은 전통만으로 안 된다. 오늘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전통이 없다.
현실을 돌파해 나가는 것이 예술이고 예술가다. 만해는 저자거리에 있지만 위대하다. 만해의 상기된 붉은 눈초리가 늘, 어디서나 필요한 이유다.

 

파 리   

한용운


이 적고 더럽고 밉살스런 파리야.
너는 썩은 쥐인지 만두(饅頭)인지 분간을 못하는 더러운 파리다.
너의 흰옷에는 검은 똥칠을 하고검은 옷에는 흰 똥칠을 한다.
너는 더위에 시달려서 자는 사람의 단꿈을 깨워 놓는다.
너는 이 세상에 없어도 조금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다.
너는 한 눈 깜짝할 새에 파리채에 피 칠하는 작은 생명이다.
그렇다. 나는 적고 더럽고 밉살스런 파리요, 너는 고귀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어엽분 여왕의 입술에 똥칠을 한다.
나는 황금을 짓밟고 탁주에 발을 씻는다.
세상에 보검(寶劒)이 산같이 있어도 나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한다.
나는 설렁탕 집으로 궁중연회(宮中宴會)에까지
상빈(上賓)이 되어서 술도먹고 노래도 부른다.
세상 사람은 나를 위하여 궁전도 짓고 음식도 만든다.
사람은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물론하고 파리를 위하여 생긴 것이다.
너희는 나를 더럽다고 하지마는너희들의 마음이야말로
나보다도 더욱 더러운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마음이 없는 죽은 사람을 좋아한다.

▲ 길고 긴 잠. 186×94cm. 종이에 수묵 담채. 2015만해의 눈은 항상 빨갛다. 사람의 고통이 있는 곳에 항상 만해의 붉은 눈초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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