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바로 자기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되지
자기 뿌리를 믿지 않고 타의의 형상을 믿거나
허공의 이름을 믿거나 그런다면 그건 공덕이 하나도 없느니라!

▲ 그림 최주현
내가 있기에 세상이 있다는 의미
질문  제가 존재하는 모습을 보면 무량하고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아주 무의미하다고밖에 할 수가 없는데, 큰스님의 『뜻으로 푼 금강경』을 읽다가 “일체 중생들이 나로 하여 세상이 있는 것을 안다면 무량 공덕을 얻느니라.”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의 소견으로 볼 때, 어떻게 객관 세계가 저로 하여 있다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생활하는 가운데서 참선법을 배우려고 애를 쓰는 여러분들을 보면 참 기쁩니다. 마음공부 하는 데는 참 도리가 있어야 하고, 생활에도 도리가 있어서 중심과 중도, 중용이 있듯이 부처님 법을 진짜로 전수받고 정각을 이루려면 어떠한 노력을 해야만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을 해 보셔야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안 되니까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일체 만물만생이 태어났다 죽고 죽었다 태어나는가 하면,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고, 사계절을 통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봄이 되면 피었다가 늦은 가을이 되면 단풍이 지는가 하면 사계절을 푸르르게 살기도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도 좀 더 차원을 높이면 사계절을 푸르르게 살 수가 있다는 얘기죠.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100%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어렵게 인간은 됐으나 100% 인간이 돼야만 진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어린애를 탄생시키면 인간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100% 어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이 우리들도 완전히 인간이 된 분이 있는가 하면, 덜 된 분이 있고 아직도 많이 자라야 할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를 이루어도, 즉 견성은 했어도 금방 태어난 아기와 같다고 하는 겁니다. 둘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습을 녹여야 하기 때문에 또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알기만 하면 또 뭘 합니까? 그것도 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남이 목마를 때 떠 줄 수 있고 내가 먹을 수 있어야만이 된다고 했습니다. 둘 아닌 도리를 알았으면 둘 아니게 나툴 줄 알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얼마만큼 똑바로 들어가야만 되겠습니까? 컴퓨터를 작동하는 데 있어서도 글자 하나만 틀리면 모든 것이 틀려 넘어갑니다. 숫자 하나만 틀려도 전부가 틀려요. 여러분들 사시면서 현실로 느끼시죠?


그와 같이 우리 공부하는 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행선을 하고 있습니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이것은 활구인 것입니다. 곧장 직선적으로 들어가는 도리죠. 세상 돌아가는 걸 볼 때에, 팔만대장경이 방대하지만 삼세를 돌아가면서 병풍 둘러친 듯 한 이 세계, 우주 자체가 아마 팔만대장경 못지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팔만대장경에 고정됨이 없이 다 쓰여 있지만, 모르는 분들이 볼 때는 글자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 글자 뒷면, 그리고 백지의 뒷면에 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방 너머 세계가 있고 서방 너머 세계가 있고, 남방 너머 세계가 있다고 했듯이, 너머에 세계가 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가 똑바로 직결하지 못하면 통과를 할 수가 없습니다. 문에 들어설 수가 없어요. 이론적으로 경만 읽어서 한다면 있는 문을 찾지만, 문 뒤에 문 없는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문 없는 문을 찾기 위해서는 똑바로 들어가지 않으면 연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통신이 되질 않아요.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모두가 없고,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부터 알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 각자가 나로부터 모든 것이 생긴 거지,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렇게 알고 믿는 것이 똑바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또 내가 있기 때문에 바로 나를 이끌어 가는 나의 근본 선장이 있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근본 자리에 모두 놓으라니까 놔지지 않는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왜 놔지지 않습니까. 모두 자기가 하는 건데요.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있습니다. 알맹이와 껍데기가 둘 아니게 모든 것을 자기가 하고 있습니다. 잘했든 못했든 말입니다. 울게 된 것도 자기 때문이고, 웃는 것도 자기 때문이며, 즐거운 것도 자기이고 슬픈 것도 자기가 있으니깐 슬픈 겁니다. 그러니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간단하게 나로부터 생각하세요. 잘하든 못하든 울든 웃든 어느 누구가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상대도 생겼고 세상도 생겼습니다.


어린이가 자라면서 ‘아, 세계는 이런 거구나.’ 또 어른이 돼 가지고 ‘세계는 우주화가 됐구나.’ 하고 점차 느끼는 겁니다. 자기가 움직이고 자기가 보고 듣고, 자기가 생각하니 다 자기가 하는 거 아닙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가 지금 공부해 나가는 데 있어서 남이 해 주는 것도 없고 남이 뺏어 가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자신을 약하게 보지 말고 당당하고 패기 있게 믿고 나가세요.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무조건 자신을 아주 얕게 생각을 하고, 자기는 빼놓고 부처님을 위로 모신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런 사람은 백날이 가도 부처님 속에 같이 한자리를 못합니다. 어떤 상대이든 얕보지도 말고 높이 보지도 말고 평등하게 나와 둘 아니게 보세요. 그러면서도 바로 과거에 살던 자기 조상이기 때문에 상봉을 한다면 그게 바로 견성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같이 할 때, 그때가 성불이고요. 일체 만물만생과 더불어 응신으로 나툴 때, 그때가 바로 열반경지, 구경경지까지 이르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울어도 자기요, 웃어도 자기요, 못해도 자기요, 잘해도 자기요, 망해도 자기요, 승화돼도 자기인 것입니다.

부처님 형상의 돌을 캤는데…
질문  제가 아는 분이 집안 대대로 불자이신데, 산을 개간을 하다가 큼지막한 돌을 캤는데 부처님 형상이더랍니다. 그래서 그것을 집에다 모셔 놓고 물도 떠 놓고 초와 향을 켜고 가끔씩 예불도 드리고 그러는 것을 보았습니다. 스님, 집 안에 불단을 차리고 부처님을 모시고 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답변  부처님을 집에다가 모셔 놓거나 어디서 사 왔다고 해서 갖다 놓고 아침저녁 염불하거나 아침저녁 거기다가 절을 하거나, 잘되게 해 달라고 거기다가 마음을 모은다거나 이러지 마세요. 사진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벗어나지 못해서 견성도 못한 사람들이 자기 집 방에다가 갖다 놓고선 그렇게 한다면 그건 사불이 됩니다.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몸 안에 들어 있는 중생들도 다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차만별의 그 뭇 중생들의 사불이 되고 말죠. 그러니 오히려 안 모신 것만도 못하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절대 산에다 물 떠 놓고 빌거나 집에다가 부처님을 모셔 놓고 물 떠 놓고 빌거나 이러지 마세요. 그럼으로써 그것이 자식 대대로 유전성으로 차례차례 나오게 돼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도리를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갖다 놓고 내가 정성스럽게만 하면 좋게 되는 줄 알고 온통 그러다가 보면 자기 마음이 몰랐기 때문에 자기도 사불이요, 그 또한 사불이요, 몸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도 사불이 되는 것이고 이러니, 거기에서 머리가 빙빙빙빙 돌아가고 판단이 달라지고 보는 게 달라지고 생각하는 게 달라지고, 모든 게 달라지고 인생의 순수한 보람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너희들은 공덕이 되게끔 하라. 돈이 있든 없든, 가난하든 부자든, 또는 못났든 잘났든 바로 너에게 네 뿌리가 있느니라. 나무는 바로 자기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되지 자기 뿌리를 믿지 않고 타의의 형상을 믿거나 허공의 이름을 믿거나 그런다면 그건 공덕이 하나도 없느니라.” 하셨던 겁니다.


바깥으로만, 안의 자기는 쑥 빼놓고 바깥으로 부처님이 높이 앉아 계신 줄 알고 ‘부처님, 부처님! 나를 잘살게 해 주세요. 잘되게 해 주세요. 삼재 없이 해 주세요. 번뇌가 끊어지게 해 주세요.’ 별 타령이 다 많지만 절대로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여기 계신다 해도 대신 똥 눠 줄 수도 없을 것이고 밥 먹어 줄 수도 없을 것이고, 잠자 줄 수도 없을 것이고 아파 줄 수도 없을 것이고, 죽어 줄 수도 없을 것이고 깨치게 해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발전된 세상에 자기를 이끌어 가는 정신계의 영원한 자기의 신을 모르고, 나부터 알아야 하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간다면 안 되죠. 이렇게 말한다고 “그러면 부처님한테 갈 필요도 없겠네요.” 이러겠지요. 그게 아닙니다. 어느 법당에 가든지, 가톨릭교나 기독교를 믿고 성당이나 교회에 가더라도 주처는 바로 자기한테 있는 겁니다, 자기한테! 그런데도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기복 아닌 게 없어요. 이러니 이거 보람 있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재차 말하지만, 그림을 보거나 형상을 보고도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면 부처님 믿으러 갈 게 없지, 형상을 믿지 말라니까.” 이러겠지만 그게 아니죠. 당신들의 몸도 형상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닙니다. 이 도리를 아주 한생각을 돌려서 잘 믿는 데 달려 있는 겁니다. 법당에 가더라도, 만 불(萬佛)이 놓여 있더라도 내 한마음의 일 불(一佛)입니다. 만 불도 일 불이요 일 불도 만 불입니다. 이 도리를 꼭 알아 둬야 되겠습니다.

절에 다닐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질문  절에 처음에 나올 때는 몸이 아프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나오게 되는데 좀 오래 다니신 분들에게 물어보니까 법회에 안 나오면 좀 어딘가 서운하고 그래서 나오는 분도 계시고, 또 나오면 좋으니까 또 이익이 되니깐 나온다는 분도 계시고, 또 아주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느 정도 공부가 돼서, 또 뭐 귀신도 보고 여러 가지를 보고 느끼면서 다니는 분도 있고요. 그런데 제가 생각했을 땐 절에 다니는 것이 보이지 않는 정신계를 알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제가 절에 다니는 모습을 살펴보면 너무 성과 없이 몸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무한 생각까지 드는데 도움 말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답변  여러분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나오시든지 나오시는 건 다 나오시는 겁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있어도 천차만별의 차원의 마음이 있으니까요. 앞서 오는 사람이 있고 뒤에 오는 사람이 있고 또 그 뒤에 오는 사람이 있듯이 말입니다. 지금 그렇게 말한 거와 같이 나를 다지기 위해서, 나를 알기 위해서, 세상을 알기 위해서 저 사람을 따라야 되겠다 하는 걸로 나오는 겁니다. 나오면 우리가 믿는 거는 자기 선장을 믿으면서, 귀신이 보인다 이런 것도 ‘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니 감사하구나.’ 그러고 놔야지, 그걸 귀신 보이는 걸로 즐거워서 그리로 쫓아간다면 아니 되는 겁니다.


이 모두가, 일거수일투족이 이 마음 안에 안 들어 있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보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보배라고 하죠. 그 속에는 젖은 거 마른 거, 더러운 거 깨끗한 거, 또는 좋은 거 나쁜 거, 높은 거 얕은 거,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그 자체를 내가 잘 생각해서 컴퓨터에 입력이 되게 해야지요. 그냥 그렇다고 근심 걱정을 해가면서 생각하라는 게 아닙니다. 살아나가다 보면 인의롭고 여유 있고 지혜롭고 자비한 그 마음으로서 남을 해롭게 안 하고 또는 가정에서도 부드럽게, 남의 탓을 안 하고 이렇게 해 나간다면 저절로 컴퓨터에 입력이 돼서 위로는 상세계에 통신이 되고 아래로는 중생들과 같이 또 첨보해서 통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걸 이 세상의 어느 누구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듣지 않는 사람이 없다, 새도 듣고 하다못해 개구리도 듣고 있다 이 소립니다. 내가 마음먹은 거를 그렇게 듣고 있는 자들이 이 허공에 꽉 차 있기 때문에 바로 남이 모른다고 하는 그 생각이 어리석다 이겁니다. 그러니만큼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써 하면 모두가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체 만물이 다 듣는다고 생각을 하고 모두 이롭게 생각을 내 준다면, 모든 거를 다 말입니다, 이롭게 생각을 내 준다면 어떠한 문제로 인해서 죽어갈 때도 다 이롭게 살려 준다 이겁니다. 그게 ‘한손’입니다. 한마음, 한손, 한발로 딛는다는 이런 소리가 나옵니다.
그러니깐 정신세계의 모든 거를 모른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듣지 않고 보지 못하고 이런다고 해서 내 마음을 가둬 두고, 이렇게 어리석은 마음을 갖는다면 세세생생을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경계가 그렇게 오면 절대적으로 속지 마시고 그 안에 다시 편안하게 놓으신다면 그 곱이 되돌아올 것입니다.

지혜바라밀은 어떻게 수행을 하는지
질문  불교대학을 다니면서 육바라밀을 수행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의문이 드는 것이, 그 여섯 번째에 지혜바라밀이 있지 않습니까, 이 지혜바라밀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인지 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답변  얼른 쉽게 말해서 육바라밀이 따로 없고, 또는 지혜가 따로 없이 여러분들이 생활하고 가시는 데 마음 쓰시는 것이 지혜로우면 그것이 지혜고, 그 뭐 별달리 따로 없습니다. 그 속의 진의는 여러분들이 다 가지고 있으니깐요.
이 마음,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쓰는 마음은 지혜롭고 그거를 정신계와 물질계를 같이 쓰지 못하고 물질계에서만 쓰게 되면 그것이 지혜롭지 못하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이 정신계와 물질계가 둘 아니게 쓰는 사람들은 공덕이 있지만 그냥 육안으로 쓰는 사람은 공덕이 하나도 없다. 이 물질만 보고, 내 물질이 물질만 보고 기도를 하거나 그런다면 그건 상대를 보고 기도를 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한마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공덕이 될 수가 없죠.


모두가 한마음으로서, 한 개체로서 이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도 이것이 공체입니다. 공체인데 항상 자기가 생각할 때는 나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는 내 몸뚱이 하나다.’ 이렇게요. ‘내 몸뚱이 하나고 나뿐이다. 외롭다.’ 그러지요. 그런데 외롭지 않아요. 이 몸뚱이 하나 속에도 생명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바로 공체죠. 그리고 또 공체로서 움죽거린다면 공용이지 어떻게 자기가 개별적으로 하나가 움죽거리는 겁니까? 그러니까 더불어 같이 움죽거리기 때문에 공용이죠. 그리고 공식이고. 그래서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이란 말입니다.


우리 선원 지붕에 칠보탑을 해 놓은 것도 여러분들의 바로 몸과 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공체인 몸, 공심인 마음, 공생인 생명, 공식으로서의 모두가 같이, 더불어 같이 하고 있는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같이 돌고 있는 그런 모습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거는 공심으로써 쓰는 것이 지혜고. 공심이 아닌 개별적으로 내가 이렇게 나대로 그냥 마구 말하는 걸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자기 몸뚱이도 공체고,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더불어 같이 사는 거구나. 더불어 같이 움죽거리는 거구나. 더불어 같이 보는 거로구나. 더불어 같이 먹는 거로구나. 더불어 같이 생각하고 사는 거로구나. 그러니 나라고 세울 게 뭐 있겠나. 내가 혼자 했다고 할 게 뭐 있겠나. 내가 혼자 봤다고 할 게 뭐 있겠나. 혼자 들었다고 할 게 뭐 있나. 내가 산다고 할 것도 없다. 나를 세울 게 하나도 없구나.’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이 세상이 모두 공해서 초월해서 돌아간다는 걸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세상을 구할 수 있다 하셨는데
질문  『능엄경』에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만 깨달아도 능히 세상을 구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늘 그와 같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능히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을 저희들은 어떻게 다시 알아듣고 또 수행을 해야 될 것인지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답변  이 마음이란 멀고 가깝고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나라라고 하더라도, 어떠한 개인 회사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지도자가 전깃줄이라면, 아주 쉽게 그냥 얘기하죠. 지도자가 전깃줄이라면 전깃줄을 이쪽에서 하나 대 주면은 그냥 불이 들어와서, 한순간에 불이 들어오면은 그 모두가 밝으니까 밝음의 전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전지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나 전지의 그 밝음을 쫓아가는 사람이나 똑같이 밝죠? 그러나 따라가는 사람은 “밝으니깐 가야지!” 하는 그 마음밖에 없고 그 도리를 하나도 모릅니다. 그렇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임시로 변통을 해서 건지는 수가 있고, 구원하는 수가 있고, 하나는 정말 지도자가 이 도리를 알아서 거기다가 같이 한마음이 돼 준다면, 진짜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한손으로서, 그 천백억화신 자체의 손이 한손이 돼 가지고 그대로 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두 가지가 있죠. 모르고 구원을 주느냐 받느냐, 알고 구원을 주느냐 받느냐 하는 그런 까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라도 깨치면 그 가정과 그 나라를 다 이끌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내가 그런 말을 하죠. 지도자한테 물 한 방울을 딱 떨어뜨린다면은 그 마음이 전체가 한 그릇의 마음이 되기 때문에, 그냥 집어넣어 준 사람의 마음대로 그냥 행이 나옵니다. 마음이 생기고 행이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끌어 가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모든 걸 이끌어가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되고 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동시에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말로 표현을 하자면은, 저쪽 물방울이 했다고 그러겠습니까, 이쪽 물방울이 했다고 그러겠습니까? 없죠? 밝게 불이 들어와서 같이 밝게 살 뿐입니다. 그거를 가지고 여래심(如來心)이라고 합니다.


밝게 불이 번쩍 일어났을 뿐이지, 이런 용도에는 이런 불이 필요하고 큰 용도에는 크게 불이 들어와야 할 필요가 있고, 그러니까 심력으로 말미암아 그 불빛은 가지각색으로 이쪽 전깃줄에다가 이쪽 전깃줄을 붙여 주면은 불이 들어와서 큰 데는 크게 붙여 주고, 작은 데는 작게 붙여 주고 이렇게 해서 천차만별로 건지는데, 건져도 건져 준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왜냐? 네가 한 것도 없고 내가 한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양면에 붙어서 불이 들어왔다면 불 들어온 것뿐인데, 이게 했다고 하겠습니까, 저게 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일체 만물만생은 서로서로가 교환하면서, 돌아가면서 말하고 돌아가면서 서로 인연에 따라 상대성 원리로써 계발도 하고 발전도 하고 이러는 그 창조력을 발휘하는 거죠. 그래서 과학이다 물리학이다 하는 이름을 넘어서서 심성의학이라야 되고, 심성과학이라야 되고, 심성물리학이라야 그것이 알맞게 작용을 해서 불이 들어올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이래도 이것도 없고 저래도 저것도 없다 하는 것은, 크다 작다 하는 것이 없다고 한 뜻은 어떠한 까닭에 없다고 했는가. 그것을, 공부하면서 그 뜻을 잘 아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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