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구도미 피어나
보덕암, 사성암, 연주암 등 대표적
수행자 모든 것 내려놓을 때 깨달음 얻듯
건축은 중력 거부할 때 아름다움 극치

 

 

▲ 김봉렬 총장은 … 서울대 건축학과 학사,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前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문화재청 문화재 위원, 서울시 건축정책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다. 주요 저서로는 〈김봉렬의 한국건축이야기 1, 2, 3〉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1, 2〉외 등을 펴냈다.

 

백척간두 속 진리구도
‘가져온 것이 없다’는 관념마저도 내려놓을 때 진리가 보입니다. 마지막 집착도 내려놓았다는 생각마저 없애야 하는 처절한 구도의 길입니다. 구도를 위해서는 건축물에서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건축에서 내려놓아야 할 최후의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중력입니다. 건축 발전의 역사는 곧 중력을 거슬러 더 넓고, 더 높은 건물을 구축하려는 역사였습니다. 중력을 거부하려고 허공에 건물을 매달고 대지를 박차고 날아가야만 오를 수 있는 수직 절벽 위에 건물을 앉혔습니다.

건축의 아름다움 가운데 구조미라는 것이 있습니다. 견고하고 안정된 건축물에서 구조의 아름다움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조미란 쓰러질 것 같고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경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구조의 아름다움이 피어납니다.

보덕암은 아름답습니다. 사성암, 연주암, 중국의 솬꽁쓰, 부탄의 탁상 곰파도, 그리스 마테오라의 수도원들도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보기에도 아찔한 구조적 긴장과 경이로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이 거부할 수 없는 중력조차 내려놓았습니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더 내딛을 때 중력이 없다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중으로 날아가게 됩니다. 파멸이 아니라 진정한 해방을 누리게 되는 순간 입니다. 수도자가 목숨마저 내려놓을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듯이, 건축은 중력마저 거부할 때 영원한 아름다움을 얻습니다.

 

장애는 무애다
참당암의 건축적 정신은 더욱 자유롭습니다. 대웅전에는 고려와 조선 사이 시대적 차이가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부재(部材)도 버리지 않으려는 검약정신의 결과이겠지만 오히려 시간을 축적하고 역사를 남겨두는 고차원적인 건물이 되어 시간의 제약을 뛰어 넘고 있습니다. 약사전은 비록 규모는 줄었지만 칸 수는 지켜내 시간의 흔적을 간직하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부재 크기의 부조화는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명부전과 응진전은 유래 없는 연립 불전이며 기둥의 굵기가 너무 커서 과장스럽게 보일 정도입니다. 이 역시 재정적 결핍이라는 장애 요인이 있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고 연립 불전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통쾌하게 극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애가 없으면 무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약이 없으면 자유도 없고 독창성도 없는 것입니다. 선운사와 참당암의 건물들은 숱한 장애 속에서 지어졌지만 거리낌 없는 호쾌한 건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대한 건축은 장애를 극복하고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선운사와 참당암의 거칠고 자유로운 건축들은 그래서 위대합니다.

 

우아한 매너리즘의 폐허
영암사의 건축과 예술은 그런 면에서 경주 문화의 매너리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경주의 고급문화 형식을 따랐지만 모든 조건이 달라졌습니다. 도시에서 산 속으로 입지가 변했고 귀족에서 호족으로 후원세력이 달라졌으며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의도 변화했습니다. 형식은 더 자유롭게, 장식은 더 화려하게, 규모는 더 크게 형태는 변형되고 왜곡되었습니다. 기단석의 사자들은 사실적이기 보다 해학적입니다. 어떤 사자는 혀를 내밀고 있고 어떤 놈은 고개를 돌리고 있습니다. 용맹스럽고 규범적인 사자상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귀여운 애완견과 같은 모습의 사자들만 어슬렁거릴 뿐입니다.

아무리 귀족문화를 따라가도 호족은 호족이듯 불국사의 구성을 따랐지만 영암사는 영암사입니다. 불국사의 건축이 정교한 고전적 규범을 따르고 전형적인 품격을 갖는 반면 영암사는 변형되고 자유로운 매너리즘적 성향을 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훨씬 풍부하고 해학적이며 화려한 조각과 장식으로 가득한 독특한 폐허를 남기고 있습니다.

 

거칠고 원초적인 폐허
땅을 다지고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우며, 그 위에 지붕을 얹고 벽을 치면 그 다음은 단청을 하고 장식을 달아 건물을 완성합니다. 무너질 때는 완전히 반대 순서입니다. 색칠과 장식이 먼저 벗겨지고 지붕이 내려앉으며 기둥이 쓰러지고 벽이 넘어집니다. 그러면 땅 위에는 초석과 기단만이 남아 흔적을 나타낼 뿐입니다. 돌과 벽돌로 쌓은 서양건축물은 무너져도 벽이나 기둥의 많은 부분이 남아있지만, 땅 위에 나무구조물을 단순히 올려놓은 동양건축의 폐허에는 남아있는 것이란 그 뿐입니다. 그러나 그 황량한 폐허가 옛사람들이 가람 터를 잡고 건축을 처음 시작할 때 보았던 바로 그 광경인 것입니다.

그들의 취향은 미륵대원에 산재하는 석탑과 석등, 미륵불의 어설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세련된 귀족적 건축이 갖지 못한 원초적인 에너지와 강렬한 의지가 숨어있습니다. 폐허인 미륵대원, 그 현장에 서면 1천 년 전 이 땅의 호족들이 뿜어내던 그 역동적인 힘들을 다시 느낄 수 있습니다. 무너질수록 최초로 돌아가는 폐허, 정교한 건축의 폐허는 그야말로 생명을 다해 애처로움을 일으키지만 미완성 건축의 폐허는 폐허인 채로 살아남아 지금도 최초의 생각과 감정들을 전해줍니다.

 

비밀의 야외 법당

허구와 같은 설화와 전설이라도 일말의 진실을 포함하고 있듯이 가설들도 조금씩 설득력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 미미한 진실과 가능성의 조각들을 모아보면 운주사에 얽혀있는 비밀의 실타래를 조금은 풀 수 있지 않을까요? 운주사 정도로 대규모의 유적들은 웬만한 재력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탑과 부처들의 서민적인 미감으로 볼 때 그 주체 재력가는 중앙귀족이 아니라 지방 토착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양한 솜씨들로 볼 때 이들은 여러 기문의 장인들이 참여한 것이어서 주체 세력도 일종의 지역 연합팀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작품들을 단기간에 완성했고,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은 일정한 마스터플랜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운주사의 석탑과 석불들은 집단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하나의 개성이 강조된 독특한 집단을 이룹니다. 불상들의 다양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석탑들도 온갖 가능한 형식들이 총동원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탑마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독특함을 드러내고 우월함을 뽐내지 않습니다. 그저 천불천탑 중의 하나로 겸손하게 몸을 사리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천불천탑 전부는 바위 산 계곡에 몸을 감추고 있습니다. 무엇하나 뚜렷이 밝힐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비밀의 사원은 다양하면서도 하나가 되는 우주적 구성을, 무질서한 것 같으면서도 질서를 가지고 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오묘한 원리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최고의 설법장
불가에서 자연이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세계라 보았고, 인간 역시 사대의 물질에 의식(識)이 더해진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식을 뺀다면 인간과 자연은 곧 같은 물질이고 하나라는 말입니다. 세계와 내가 하나가 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상태가 될 때 진정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부처가 도시도 건물도 아닌 초원 한 가운데, 즉 자연에서 초전법륜을 시작한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봉암사에는 건축이 없습니다. 그러나 건축보다 훨씬 위대한 건축, 자연이 살아있습니다. 신라의 도헌도, 고려의 긍양도, 반세기 전 성철도 봉암사에 웅지를 튼 것은 건축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난 곳은 법당도, 누각도, 어떤 아름다운 건물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은산철벽으로 둘러싸인 태고의 자연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봉황 같은 산과 용 같은 물만을 의지하고 큰 뜻을 펼쳤습니다. 이곳을 거쳐 간 무수한 스님들은 건축물이 아닌 자연 속에서 처절히 수행한 것입니다. 부처님도 그리 하셨습니다. 녹야원의 들판에서, 영취산의 산록에서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자연의 침묵인 것입니다.

 

부처를 보는 세 개의 시선
대승사, 윤필암, 묘적암은 신앙의 대상과 사찰이 맺을 수 있는 건축적, 풍경적 관계를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대승사는 사불암을 등지고 법당을 배열하여 주불전 뒤에 또 하나의 겹쳐 진 신앙적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모든 신도들은 대웅전의 불상을 예불할 때 당연히 뒷산 정상에 있는 사면불을 동시에 향하게 되는 중첩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윤필암은 법당의 불전을 없애고 창문을 통해 멀리 떨어진 사불암을 바라봅니다. 사불암 자체가 이 절의 부처이고, 직접적인 신앙의 대상인 셈입니다. 반면 묘적암은 법당이 사불암과 마주 앉아있습니다. 예불은 법당 안의 불상에게 드리지만 수행자들은 늘 사불암을 바라보면서 일상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받들게 됩니다.

사불암은 대승사의 중첩된 법당이 되지만 확장된 윤필암의 법당이 되며 묘적암과는 마주보는 또 다른 법당이 됩니다. 대승사는 사불암을 등지고 있지만 묘적암은 사불암을 바라보고 앉았고 윤필암은 사불암의 옆으로 앉아 있습니다. 세 절이 사불암과 맺고 있는 공간적 관계는 서로 다르지만 사불암은 세 사찰의 공통된 야외 법당이 되어 떨어져 있지만 거대한 하나의 가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의 부처를 보는 세 개의 다른 시선은 깨달음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한 세 개의 다른 구도의 길과 같습니다. 사불산을 무대로 펼쳐지는 거대한 건축적 방편설입니다.

 

달마는 산이 되어
한국의 가람이 산과 일체화하는 원리는 미황사의 구성에서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응진당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 남해안의 절경이 바로 눈 아래에 들어옵니다. 산 뿐 아니 라 바다까지도 가람 안에 끌어들여 총체적인 자연과 일체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웅전과 응진당의 기둥들은 인근 앞바다의 보길도에서 구한 활엽수종입니다. 육송을 주로 사용한 내륙의 절집들과 다르게 온화한 느낌을 주는 이유일 것입니다. 대웅전 기둥 아래의 초석들에는 연꽃 문양에 게와 거북이가 어우러져 새겨져 있습니다. 이 절이 해안에 위치한다는 입지적 특성과 아울러 바다의 영혼을 구제했던 해양 수륙도량의 역사적 흔적일 것입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외로운 고혼들이 게와 거북으로 환생했을 수도 있고 게와 거북을 부처님 앞에 인도함으로써 극락왕생을 기원한 염원일 것입니다.

미황사의 스님들은 달마산의 지형과 하나가 되었고 해안 백성들의 염원과 하나가 되었으며 땅과 바다의 모든 생명체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절들이 산악과 하나가 되어 지형적 토착화를 이루었다면 미황사는 더 나아가 수륙의 모든 생태계와 하나가 되어 신앙적 지역적 토착화를 이룬 것입니다. 산은 절이 되었고 스님은 생태계로 돌아갔습니다. 이 근원적인 회귀야말로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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