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열심히 지극하게 믿는 거! 첫째 놓고, 둘째 아주 믿는 거!
그 믿기 때문에 놓는 거거든요. 첫째 믿지 못하면 놓질 못합니다.

▲ 그림 최주현

(지난 호에 이어서)
저도 좀 부족하지만 여러분한테 심부름을 올바로 하는 건지, ‘대행’이라는 이 자체가 이름이면서도 대행을 온전히, 올바로 길을 인도하고 지금 가고 있느냐는 것을 나는 항상 길을 걸으면서도 생각하고 또 앉아 있으면서도 항상 생각합니다. 너는 지금 대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올바로 너는 대행을 하고 있느냐 하고. 어떤 때는 몽둥이로 때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착하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참 너는 밝은 보배와 같다고도 하고, 너는 벌레와 같다고도 하고 뭐, 여러 가지죠. 저는 어떠한 나무의 뿌리에 매달려 있는 가지 이런 걸로 한번 돼 보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묵묵히 걸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고, 어떤 때는 빙긋이 웃으면서 가고,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르 흐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지식이나 그런 분들이 풀숲을 지날 때는 짚신에다가 방울을 달고서 뇌성벽력이 치고 비바람이 쳐도 그냥 드문드문 팔자걸음을 걸었습니다. 그건 왜?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서죠. 걸음을 드문드문 걸었던 까닭은 바로 이 마음을 항상 무겁게 생각을 할 수 있는 그러한 마음, 항상 움죽거리지 않는 마음을 무겁게 두고 걸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내 보면 아시겠지만 풍청풍청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펄떡펄떡 뛰면은 어떻게 하루를 지냈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되겠죠. 그러나 일하면서도 깊이 생각하면서 또는 길을 걸으면서도 깊이 생각하고 또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깊이 생각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나를 내가 자재하면서, 질서를 지키면서 문란하게 하지 않으면서 2세, 3세의 나의 길을 인도하는, 또 뿌리에 물을 주는 그러한 행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까 얘기했듯이 질문을 받겠습니다. 여러분이 질문을 하셔도 함이 없이 하셔야 하고, 어떠한 데 무슨 고난이 있을 때도 한번 굴려서 대답을 해 주고, 한번 굴려서 말을 하고 이러면은 모든 불안이 없어지고 침착해지고 경솔하지 않게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질문을 하실 때 아무 질문이라도 좋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거 하나 빼놓을 게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을 꼭 만들어서 계획적으로 하지 마시고 그냥 하고 싶은 얘기, 나처럼 있는 그대로 못났으면 못난 대로 말이 잘못됐으면 잘못된 대로 후회하지 말고 그냥 하세요. 그걸 전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질문을 하셔서 서로가 공부할 수 있도록, 이건 함이 없는 것이니까 거기도 끄달리지 마시고 질문하십시오. 한 분 한 분 여기 나오셔서 질문하신다면 아마 그것이 여러분한테 양식이 되고 가는 길에 올바른 길잡이가 되지 않겠나 이렇게 봅니다.

질문자1(여)  사실 아무것도 모르지만 제가 절에 다니면서 일체 중생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는데 과연 제가 그렇게 행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기도할 때 지장보살만 찾으면 어떻게 그리 마음에서 아프고 눈물이 나오는지, 스님께서는 다 몰락 놔라 하시지만 지장보살만 찾으면 제가 그렇게 눈물이 나오고 마음이 아픕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지장보살이 될 수 없는가? 아냐, 내가 무슨 그런 지장보살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큰스님  예. 지금 보살님이 지장보살을 찾는다고 하는데, 사실은 지장보살뿐만 아니라 어떠한 이름이라도, 이 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부처님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름입니다, 그건 모두가. 불성이라는 것도 이름이요, 지장보살도 이름이요, 주인공도 이름이요, 모든 게 이름입니다. 그러니 보살님이 지장보살이라고 만약에 위대하게 생각해서 위에다 놓고 바깥으로 찾는다면 그거는 망상입니다. 헛된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머리가 잘못된다든지 크게 잘못되는 수도 있죠. 지장보살이라는 것은 내 마음속의 무명에 묻혀 있는 보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지장보살은 내 무명에 묻혀 있는 바로 그 보배의 불성인 것입니다. 그러니깐 바깥으로 생각을 아예 하지 마세요. 이 불성은 지장보살이라는 이름만 가진 게 아니라 일체 부처님, 일체의 모든 이름을 가진 분입니다. 그러니 지장보살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겠죠. 그래서 불성이라고 하고 부처님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 주인공이라고 한 것은 모든 것이 계합이 돼서 돌아가니까, 모든 게 종합해서 쉴 사이 없이 돌아가니까 이것을 주인공이라고 한 것입니다. ‘내면의 나의 주인공’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 주인공 안에는 아까도 얘기했듯이 풀포기 하나, 곤충 하나 버리지 않고 지수화풍이라는 집 속에 그 주인들이 아주 한마음으로 지금 회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심으로 인해서, 그 보배로 인해서 의식 자체가 돌아가고 악업 선업이 거기 한데 뭉쳐서 회전을 하고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러니 보살님은 그것을 지장보살이라고만 하지 말고, 내 마음속의 주인공 안에 같이 있는 지장보살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곧 불성입니다. 그러니 바깥으로는 절대 끄달리지 마시라는 얘깁니다. 그러면은 당신을 발견할 수도 없거니와 당신도 언짢고 당신 가정도 못 지킵니다.


지난번에 뉴욕에 가서 질문을 받아 보니깐 너무도 신랄하게 잘들 하시더군요, 뭐 거침없이. 날더러 하는 소리가 “죽기 위해서 먹습니까, 살기 위해서 먹습니까? 먹기 위해서 삽니까?” 허허, 살기 위해서 먹느냐, 먹기 위해서 사느냐 이겁니다. 참, 옆에서는 질문도 질문 같지 않다고 그래요. 그러나 내가 그렇지 않다고 그랬죠. 그래서 내 이 컵의 물을 예로 들었어요. “여러분이 목마를 때 덥다 하고선 들어가면 냉장고 문 열고 찬물을 따라서 먼저 마시고 난 뒤에 ‘이거 먹기 위해서 사나, 살기 위해서 먹나?’ 이런 생각은 이차적으로 하지, 목말라서 죽겠는데, 더워서 죽겠는데 물부터 마시지 그 생각부터 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건 목마르면 마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저것도 없는 겁니다.” 그랬어요. 바로 이게 그거거든. 내가 목마르면 그냥 먹고 보는 거죠.
여러분이 화날 때는 이러죠. “에이, 그냥 사는 거고, 살고 보는 거야, 그냥….” 이런 말을 하죠? 그렇듯이 그것이 아무 말이라도 질문을 했을 때는 어떠한 말도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좀 더 의정 나는 게 있다면 질문하시고 또 한번 질문해 보면 다른 사람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나 아시면서도 한번 질문해 보실 수도 있고, 몰라서 할 수도 있죠. 그래서 아까 전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랬는데, 책을 읽어도 여러분은 그 백지 생각은 하나도 안 해 줘요, 백지를. 그 종이는 생각 안 하고 글자만 들여다보고 따지죠. 허! 그러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질문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질문자2(남)  저는 불교에 입문한 지가 오래됐는데 같이 열심히 다니던 한 도반이 선교 쪽으로 갔습니다. 저하고 만나서 이따금 술을 한 잔 먹게 되면 다투기도 많이 합니다. 저는 그 친구가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이리로 오게 되면 많은 중생 제도를 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니 자꾸 이리 가자고 해서 많이, 좋은 의미에서 다투는 겁니다. 아침마다 혹은 저녁에 잘 때마다 사실 제가 기도를 합니다. ‘대자대비하시고 거룩하신 부처님! 그리고 생불이신 우리 큰스님께 한마음으로 발원하여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며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도 부처님의 가피에 힘입어 감사하는 마음, 보은하는 마음, 그리고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함으로써 참나, 큰스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참주인공을 내가 체득할 수 있도록, 자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저희 가정은 물론 저희가 접촉하는 모든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힘이 되게 해 주소서.’ 하고서 기도를 하고 하루 생활도 하고 일일 삼송 하는 식으로 이렇게 해서 되도록이면 제 한마음, 부처님이 늘 지적하여 주시는 참주인공을 발견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게 되지 않아요. 그래, 그 친구한테 그 얘기를 했어요.
큰스님  하하하.
질문자2(남)  그렇게 하려고 하면 주마등처럼 어렸을 때 생각, 뭐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나쁘게 한 생각 좋게 한 생각…. 제 깐에는 좋은 생각, 좋은 생활을 하려고 그렇게 일일 삼송까지 해 가면서 이렇게 하는데 이게 안된다,  이런 얘길 그 친구한테 했더니 그 자체를 꾸중을 해요. “너는 왜 큰스님이나 부처님한테 대고 절을 하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느냐? 바로 그것이 우상 아니냐? 자네는 남 보고 그걸 우상이라더니….” 이 살아 있는, 대행 큰스님은 살아 계신데 왜 우상이냐? 살아 계신 스님을 상대해서 절을 하는 건데, 물론 보이지는 않고 우리 집에서 하고 걸어 다니면서 하지마는, 그래도 산 부처님이시다. 우상이 아니다. 이러고 싸우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하는 얘기가 “그게 잘못이야. 자네 그거 우상이니까, 한번 큰스님을 만나 뵙거든 불문곡직하고, 여태까지 불교에 입문해서 귀동냥 눈동냥 입동냥 많이 했다. 아는 건 알 만큼 안다. 그런데 아직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니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하고 가 엎드려 절을 하고서 한번 여쭤 봐라.” 이렇게 얘기를 한 지가 며칠 안 됐어요.
큰스님  예, 예.


질문자2(남)  며칠 안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와서 이렇게 스님께 법문을 들으면서 제가 여기 앉아 있습니다만 언제든지 저는 가깝게 앉아서 큰스님을 뵙고 법문을 듣는데, 제가 그 친구한테 그런 주문을 받고 와서 망설였습니다. 왜 질문이라는 건 부처님 말씀에도 있듯이 물으면 괴리가 생긴단 말이에요, 오히려 안 묻는 게 낫지. 그러다가 ‘이것이 하나의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친구와 마침 또 그렇게 해서 싸웠고 “큰스님한테 한번 불문곡직 그렇게 질문을 드리면 자네에게 진짜로다가 뭘 가르쳐 주실 거다.” 이렇게 말을 해서 제가 여러 모로 생각을 하다가, 아직도 모릅니다마는 제가 말씀을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큰스님  예, 오늘 참 이 질문을 하기로 한 것이 참 잘됐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요다음서부터는 문답으로 항상 이렇게 진행합시다. 오늘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친구 분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항상 제가 말씀드리죠? 어떤 것에도 굴하지 말고, 맹신하지 말고, 노예가 되지 말라고요. 나한테도 절하지 말고, 여러분이 절하는 게 나한테 하는 게 아닙니다. 저기 부처님한테 절하죠? (부처님을 가리키신 후) 여러분한테 여러분이 절하는 겁니다. 항상 말씀드리죠? 저 형상이 내 형상이요, 저 마음이 내 마음이요, 저 생명이 내 생명이라. 그렇게 생각하고 일배(一拜)를 올릴 때, 삼정례(三頂禮)가 일배로 될 때 그 일배는 만배도 되고 천배도 되고 또 일배도 될 수 있고 칠정례(七頂禮)도 될 수 있고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스럽다. 이게 각자 마음에 정해진 문제죠. 그러면은 나한테 기도를 할 게 아니라, 기도를 한다면 벌써 둘이 되죠? 내 주인공을, 참나 주인공을 믿고 그 사람이 그렇게 안 오는 것도 거기 맡겨 놓고, 오든지 안 오든지 거기 맡겨 놓으세요. 그거는 선생님이 좋은 것이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 모두가 자기가 좋은 대로 지금 길을 걸으면서 가는 겁니다. 그러니 차원이, 이 지금 요 그릇은 (법상 위의 물 컵을 들어 보이시며) 요 컵의 물밖에는 못 담습니다. 큰 드럼통은 드럼통의 물밖에는 못 담습니다. 그러나 바다는 바다만큼의 물이 들어가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바다입니다. 그러니 어느 거 하나 버릴 것은 없으나 모두가 그릇대로 사는 거죠. 그래서 상점에 가니까 컵은 컵대로 놓여 있고, 사발은 사발대로 놓여 있고 접시는 접시대로 놓여 있던 걸요. 우리 사람도 그렇게 돼 가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한다면 아니 되고, 싱긋이 웃으면서 ‘야, 내 주인공, 내 주인공만이 모든 것을 알고 있겠지. 저 친구도 내 주인공만이 이끌어 갈 수 있다. 내 주인공이 저 주인공이고, 저 주인공이 내 주인공이니까, 둘이 아니니까 다 통하겠지.’ 이렇게 그냥 놓으세요, 편안하게. 어디다가 대고 절을 하거나 이러지도 마시고, 집에 부처님을 모셔 놓고 또 하시지도 마시고, 물을 떠 놓고 빌지도 마시고, 향·초를 켜 놓고 빌지도 마시고. 그렇게 귀신 짓을 한다면, 여러분이 지금 현재에 그 귀신 짓 하는 습이 있으면 그 의식이 이다음에 죽어서도 귀신 짓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한테 손해가 가게 하거든.


그러니 여러분이 그것을 아주 싹 놔 버리시면서 자기와 자기를 둘로 보지 마세요. 믿음으로써 거기 맡겨 놓는 그 행을 항상 하세요. 그러면 슬며시 그냥 돌아와요. “아무개, 자네 나하고 한번 안 가 보려나?” “나도 한번 가 보고 싶네.” 아, 이렇게 스스로 되는 것이지 강요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여기 조직이 자유스러운 조직이지 강제적인 조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시고 싶어서 오신 거지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예전에 사람이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가려고 하니까 돈이 하는 소리가 “아, 네가 나를 좋아서 쫓아다녔지, 내가 너를 좋아서 쫓아다닌 게 아니니까 너를 쫓아갈 수 없다.” 그러더라는 거예요. 허허허. 그렇듯이 이건 강요해서 쫓아가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자기 운전수를 믿고, 운전수가 바로 마음이라면 마음이 있기 이전 바로 그 기름, 누구나 줄 수 있고 누구에게나 쳐 줄 수 있는 부처님의 기름을, 항상 서로 주면서 자기 속에서 내면의 자기 주인공만을 믿고 거기 놓으십시오. 편안하게 놓으세요. 그러면 아주 공부 길이 탁 트일 겁니다, 아마.
아, 이런 때가 얼마나 좋은 때인가? 세상에 사람이 살면서 만날 곤궁하게 사는데 오늘 이렇게 앉아서 서로 이렇게 참 토론을 하고 질문하면서, 좀 좋아요?

질문자3(남) 저는 스님이 쓰신 설법 책 『무(無)』라는 책과 『영원의 오늘』을 읽고, 스님을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지만 책을 통해서 스님과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스님께서 그걸 전부 놓으라고 하셨는데,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그 순간부터 계속 놓아 갔습니다. 놓다 보니까 결국 근본적으로 놔야 될 거는 어떤 개개인의 사건이 아니고 나 자신을 놔야 된다는 걸 느꼈는데, 그걸 놓으려니까, 자꾸 놓는다는 걸 생각을 하니까 오히려 더 들고 있는 이런….
큰스님  하하하.
질문자3(남)  스님께서 쓰신 책을 처음 한 번 두 번 세 번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게 오더군요. 그래서 ‘이 책을 계속 읽으면은 스님께 일부러 여쭙지 않아도 내 스스로 주인공을 터득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오늘 스님을 처음 뵈니까 뭔가 질문을 해 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제가 그게 왜 안되는가는 알고 있습니다. 제 스스로 믿음이라든지 그게 약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럼 그걸 강하게 하는 그런 길을 좀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큰스님  지금 선생님이 말씀을 잘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아마 그것이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스님! 다 놔 버리면 어떻게 삽니까?”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선생님은 “놓으면 놓을수록 쥐고 있게 된다.” 이러시는데,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데, 조금 아까 저한테 질문하신 그 말씀을 내놓으라면 내놓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없죠? 그겁니다, 바로! 우리는 그대로 놓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뭘 들고 있고 놓고 가고 이런 게 없는 거죠, 사실.


그래서 여북하면 ‘그분이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고 안 그랬다면, 둘로 봤다면, 일곱 발자국을 떼지 않았다면 이런 풍파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을…. 내가 있었더라면 죽여서 개나 줘 버렸을 것을….’ 하는 그런 말도 돌았죠.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찰나의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그대로 내놓을 수 없는 그 길이 바로 놓고 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금방 자식을 만나고 돌아섰어도 가 버린 겁니다. 놔 버린 겁니다, 그게. 아니, 놔 버렸다고 하는 것은 이름이지, 말이지, 이론입니다. 그냥 놓고 갔습니다. 그냥 그대로 스쳐 갔습니다. 그런데 또 만났습니다. 또 스쳐 갔습니다. 또 무슨 일을 했습니다. 또 스쳐 갔습니다. 그럼 그거 하신 거 내놓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 붙들고 있을 것도 없고 안 붙들고 있을 것도 없고, 그대로.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죠? ‘파도 아니 되고, 아니 파도 아니 되느니라. 너는 인사를 해도 아니 되고, 아니 해도 아니 되느니라. 그러면 거기에 톡톡한 무엇인가 있을 터인데, 그 도리가 무엇인고?’ 이랬을 때, 또 ‘들어가도 삼십 방망이 나가도 삼십 방망이, 거기에는 들어와도 삼십 방망이를 때리고 나가도 삼십 방망이를 때리는 그 톡톡한 무엇인가 있을 텐데.’ 했는데….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했죠. “부처님이 어딨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아, 이리 오너라.” 이렇게 불러서 척 내려가시더니 하는 소리가 멱살을 탁 잡고 “요놈아!” 그러면서 주장자로 어떻게나 갈겨 댔는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하니까 “요놈, 아이고! 아이고! 하는 놈은 누구냐? 요놈!” 아, 이러거든요.
그거를 가만히 생각해 보신다면 우리가 열심히 지극하게 믿는 거! 첫째 놓고, 둘째 아주 믿는 거! 그 믿기 때문에 놓는 거거든요. 첫째 믿지 못하면 놓질 못합니다. 왜 자기를 믿지 못해, 글쎄? 아니, 남의 이름은 믿으라면 잘 믿으면서 왜 자기는 못 믿어? 못났든 잘났든 자기밖에 더 있나? 누가 대신 죽어 주나, 대신 아파 주나, 응? 대신 누가 자 주나, 먹어 주나, 똥 싸 주나? 아, 이거 큰일이란 말입니다. 자기를 믿어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밖에 자기를 끌고 다니는 건 없거든. 그러니 믿고 그저 놔요. 거기서밖엔 끌고 다닐 수 없다라는 걸.


생활 속에서 어떠한 괴로운 게 닥치겠죠. ‘아이, 이것도 거기서밖엔 해결 못하겠지.’ 탁 놔! 그저 놓는 일밖에는 없어요. 그러고 돌아오는 일을 지켜봐라 이거야. 돌아오는 일을 지켜보면 거기서 체험도 얻을 수 있고, 실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죠. 그래서 자기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물리가 터지고 지혜를 얻는 거지, 그 어떡합니까? 그거. 둘로 보면 안 돼요. 기도라고 하는 말은 ‘기도’ 하면 벌써 상대를 두고 기도를 하게 되거든요. ‘부처님’ 하면 벌써 상대를 두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 소리를 아예 안 하지 않습니까?
내가 부처님을 안 믿어서, 아주 나만 생각하고 부처님은 안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은 전자서부터 그게 누적이 돼 내려왔고, 습이 돼서 내려왔기 때문에 그 이름을 벌써 불렀다 하면, ‘지장보살!’ 그러면 벌써 이렇게 올려놓고 부르고, ‘관세음보살!’ 하면 이렇게 벌써 둘로 놓고 보고 아, 이러니 그놈의 걸 누가 그 노릇을 합니까? 그저 얼른 길을 같이 가고 싶어서, 여러분을 위해서 그러는 거죠. “아이고, 부처님!” 하면은 그냥 둘이 돼. 그러니까 “네 주인공을 믿어!” 이렇게 한 겁니다. 그 주인공 속에는 역대 일체의 부처님이 다 들어 계시고 중생들이 다 같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걸 생각하시고 진짜 믿고 놓으십시오. 네. 그냥 놓고 가는 거니까요, 이왕지사. 하하하.
(법문을 마치시길 권하는 스님에게)
큰스님  가만 있어. 오늘같이 좋은 날에 뭘 그래. 뭐 새털 같은 날에 뭐…. (대중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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