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언어철학적 상상력 돋보이는 영화 ‘더 리더’

승찬·도신 스님 선문답서 보듯
구속과 해탈은 마음가짐에 달려
과거사 문제는 해원상생이 해답
경계는 배제 아니라 포용 위한 것

▲ 영화 ‘더 리더’는 ‘법의 경계’라는 심원한 주제의식을 재미있고도 감동적이게 풀고 있다.
지난 해 제4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작가로 선정된 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작인 〈더 리더(The Reader): 책 읽어주는 남자〉가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더 리더〉는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돼 관객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했다. 원작에 충실했던 영화 ‘더 리더’는 법철학에 대한 심원한 탐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도 그럴 게 원작자인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독일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등을 역임한 뒤 여러 대학에서 법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먼저, 간단히 줄거리를 살펴보자.
10대 소년 ‘마이클’은 길을 가던 중 열병으로 인해 심한 구토를 일으킨다. 이를 본 30대 여인 ‘한나’가 도움을 준다. 마이클은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한나를 찾아갔다가 이성애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결국 둘은 연인관계가 된다. 한나는 육체적 관계를 가지기 전에 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말 한마디 없이 마이클을 떠난다. 세월이 흘러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관련 재판에 참관하려고 갔다가 피고인의 신분인 된 한나를 보게 된다. 다른 피고들과 달리 한나는 모든 혐의를 인정한다.
다만 “사건의 주범이었냐”는 판사의 질문에는 부인한다. 그러나 기획서를 누가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 글씨를 써보라고 하자 그제야 자신이 주범이었음을 인정한다. 한나는 문맹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마이클은 예전에 한나에게 읽어줬던 책들을 육성으로 녹음한다. 그리고 그 테이프를 한나에게 보낸다. 한나는 테이프를 들으면서 독학해서 문맹에서 벗어난다. 출소를 1주일 앞둔 시점에서 둘은 만난다. 그러나 그 만남 이후 한나는 자살하고 만다.


서사만 보자면 ‘더 리더’는 마이클과 한나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곱씹어 생각해보면, ‘더 리더’는 과거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통합’ 운운하는 현 시점에서 ‘더 리더’가 주는 교훈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영화(혹은 소설)의 서사 속에 용해된 독일의 과거사 문제와 한국 사회의 과거사 문제가 근원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라면, 마땅히 그 사회 구성원의 가슴에 맺힌 멍울을 풀어줘야 한다. ‘상생(相生)’의 선 과제는 ‘해원(解寃)’이다.
‘더 리더’가 훌륭한 작품인 이유는 ‘법의 경계’라는 심원한 주제의식을 재미있고도 감동적이게 풀고 있기 때문이다. 
법철학자 조르주 아감벤은 〈호모사케르〉라는 명저를 통해 주권자의 경계 밖에는 ‘벌거벗은 인간’이 있다는 것을 논증한 바 있다. 경계 밖의 인간을 제도화한 것이 바로 나치즘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놀라움은 나치즘의 가해자를 경계 밖의 인간으로 상정한 데 있다. 
한나는 평생 동안 문맹인 것을 숨기며 살아온 여자이다. 제도권 경계 밖의 사람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한나는 설령 무기징역을 받을 지라도 문맹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바는 명료하다.


“법의 경계는 배제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라 포용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3조 승찬 스님과 4조 도신 스님이 주고받은 선문답을 떠올리게 된다.
도신 스님이 묻는다.
“해탈하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승찬 스님이 답한다.
“누가 너를 구속하는 이가 있더냐?”
“아무도 구속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구속하는 사람이 없다면, 너는 이미 해탈한 사람일진대 어찌하여 굳이 해탈을 찾느냐?”
승찬 스님과 도신스님의 선문답에서 알 수 있듯 구속과 해탈의 경계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더 리더’는 법철학뿐만 아니라 언어철학적인 메타포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의 백미는 한나가 마이클이 보내준 테이프를 들으면서 가슴 벅차하는 장면이다. 한나의 삶에서 가장 꽃 피는 시절은 마이클과 보낸 나날일 것이다. 누군가 대신 읽어주지 않으면 책을 읽을 수 없었던 한나. 한나에게는 사랑이 곧 대화였고, 대화가 곧 사랑이었다. 대화는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통로이다. 경계의 벽을 허물 때만이 사랑은 완성된다. 그 사랑은 이성애이기도 할 것이요, 인류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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