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 생활을 닥치는 대로 거기 맡겨 놓고 가시라!
이것이 바로 방하착이며 이것이 죽는 길이다.

▲ 그림 최주현
여러분과 또 이렇게 한자리를 하게 돼서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항상 같이 돌아가지만 분명히 너 나는 있는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은 같이 앉아서 이렇게 서로 진리의 길을 탐구하고 함께 가는 도반들입니다. 물론 이렇게 같이 한자리를 하고 앉았을 때는 여러분과 저와 모든 일체가 다 도반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이라고 하신 그 뜻을, 또 사방을 둘러보시고 일곱 걸음을 뗀 그 뜻을 우리가 새겨 본다면, 그때서부터 불교가 이루어졌고, 마음을 발견하기 위해서 길을 인도 받고 공부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죠.
제가 여러분한테 항상 말씀드리죠. 삼라대천세계(森羅大千世界)가, 아니 지금 말로 우주 천지가 여러분의 마음에 직결이 돼 있다는 거요. 우주 천지의 근본은 여러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돼 있고, 세상의 살림살이의 근본은 여러분의 마음의 근본과 직결돼 있다. 그러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한 그 뜻을 우리가 새겨 본다면,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학식과 지식이 풍부하다든가 그런 것을 읽어 봤다든가 한 예도 없습니다마는 내가 생각할 때는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첫째,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오시기 이전부터 직결돼 있는 그 자체의 근본, 즉 우주 천지의 근본이 내 마음의 근본이요, 세상의 근본이 내 마음의 근본이니 그 근본을 깨쳤을 때는, 내 육체 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을 다 제도해서 마쳤다면 그것과 직결돼 있는 외부의 모든 중생들도 더불어 같이 마치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한테 말씀드리는 것에 이의가 있으면 이따가 질문하십시오.
또 두 번째, 부처님께서 사방을 둘러보신 뜻은 ‘무공무색(無空無色)’이니 모두가 같이 돌아가는 뜻을 비유해서 사방을 둘러보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곱 발자국을 떼었을 때는 “네가 있고 내가 있느니라. 바로 찰나의 생활이 여여하고 그대로 진리의 길이니라.” 하는 그 뜻을 제시해 주셨고, 그것은 말없이 말씀을 하신 겁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꼭 말을 해야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부를 해 나갈 때 학식이나 지식이나 권세나 어떠한 이름으로써, 이론으로써 공부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역대에서부터, 즉 말하자면은 ‘인간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왔고, 어디를 향해 지금 그대로 여여하게 걷고 있나?’ 이런 것을 우리가 지혜롭게 탐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지수화풍 이 자체 내에서 우리가 지수화풍을 먹고 산다는 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아서는 아니 됩니다. 일체 생명이 다 지수화풍에서 생겼고, 그 생명으로 인해 진화가 돼서 이렇게 무정물이나 또, 일체 생물이라고 하면은 좋겠습니다. 모두가 거기서 나와서 거기서 사라지고 거기서 사라졌다가 다시 뜨고 하는 이 진리, 허공에 뜬 꽃잎 한 잎이 바람이 너무 세면 이지러지고, 또 어떠한 개체가 바람을 막아 주면은 이지러지지 않고 이러다가 떨어지곤 하죠.
이 모두가 뜬구름 같은 이 환상천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여러분과 더불어 이렇게 항상 한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항상 풀포기 하나 버리지 않고 같이 하고 있다는 것, 곤충 하나 버리지 않고, 또는 축생 하나 버리지 않고 무정물이나 식물 하나 버리지 않고, 우리 인간의 그 내면세계의 한마음 속에 같이, 항상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함께 운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같이 운행을 하고 있으나, 아까 처음에 말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너 나는 분명히 있습니다. 너 나가 있긴 있는데 있는 그 자체가 바로 공(空)해서, 그 가운데 무엇이 특출하게 꼭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을 여러분이 발견을 하기 위해서 같이 같이 서로서로 이렇게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 말을 이렇게 또 해야 하느냐. 처음 오신 분들도 계실 테니까 한마디는 언급해야 되는 문제인데, 말을 하게 되면 상당히 길어지니, 앞으로는 간단하게 질문하실 거는 질문하시게끔 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첫째도 죽어야 하고’ 했습니다. 일체를 놔라! 맡겨놔라! 어디다 놓느냐? 내가 있으니깐 바로 상대가 있는 것처럼 내가 있으니깐 일체가 있고 천지와도 직결돼 있으니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자가발전소가 있는 거와 같은 겁니다, 밝은 자가발전소! 그래서 여러분의 자가발전소는 이쪽에서 전력을 끌어오면 발전소에서는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 하지도 않고 이쪽에서 끌어오는 대로 자동적으로 전력이 옵니다. 오지만 그 전력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여러분한테 일체의 생활이 참선이며 좌선이라고 합니다. 몸이 꿇어앉아서 좌선이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다 놓게 되면은 그것이 좌선이며, 그것이 바로 참선이다. 톡톡한 주관적인 내 중심이 없이 그대로 공(空)에 빠지라는 건 아닙니다. 중심이 있기 때문에 참선이라고 하고 편안한 마음도 편안치 않은 마음도 생기는 겁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부처를 이루지 못하고, 마음을 깨치지 못하고, 지혜를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첫째도 맡겨 놔라, 일체를. ‘일체’ 하면 여러분, 아시겠죠? 고독과 가난과 외로움, 또는 우환과 병고 같은 모든 일체 말입니다. 일체 생활을 닥치는 대로 거기 맡겨 놓고 가시라. 이것이 바로 방하착이며 이것이 죽는 길입니다. 그러면서 처음에 ‘죽어야 한다’ 하는 것은 바로 무조건 이유를 붙이지 말고,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다 놓고, 내 마음에 이루어져서 참 좋다 할 때는 감사하게 놓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 때는 그것도 고정됨이 없으니 ‘그것도 거기서 하고 거기서밖에는 길을 인도할 수가 없으니까.’ 하고 놓고, 이렇게 해 나가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에도 죽어야 한다 하는 이유는 무조건 첫 번에 죽어야 나를 본다 이 소립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이 여기서 공부하시면서 나를 발견하는 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발견을 해 가지고 ‘내가 나’라는 거, 이것을 버리지 못하고 습을 버리지 못해서, 아직까지도 꿈에 부처님이 보이면 좋고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한 귀신을 보면 나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어떠한 것이 바깥으로 신호가 오면 신호가 온다는 발설을 하질 않나, 보면 보는 것대로 들으면 듣는 것대로, 그것들이 변해서 돌아가서 환상으로 보이는데 그렇게 바깥으로 보이고 들리는 그런 것을 가지고 집착을 하고 논의들 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도 죽어야 하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도 죽어야 하며 비밀로 놓고 두 번째도 죽어야 하며 비밀을 지켜야 하고.’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뭐냐? 비밀을 비밀로 둬야 하고 비밀을 지켜야 한다 하는 것은 나를 발견했을 때에, 내가 어떠한 것이 보이든 들리든, 내가 오신통을 한다 하더라도 도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누누이 그렇게 말씀드렸을 겁니다, 아마. 오신통에서도 벗어나야 우리는 그것을 굴릴 수 있다 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들리고 보이고 안다고 말을 하게 되면 첫째, 불법에 누(累)가 되게 하고 둘째, 선원에 누가 되게 하고, 스님네들한테 누가 되게 하고 셋째, 자기한테 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를 발견했을 때는 그게 실험하는 단계입니다. 꿈에 가르치는 것도 생시에 가르치는 것도 둘이 아니게 항상 자기가 비밀로 두고 지키면서, 봐도 본 사이가 없이 지키면서, 들어도 들은 사이가 없이 지키면서, 알아도 안 사이가 없이 지키면서,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하고 체험을 하면서 행을 해 보는 그러한 막강한 공부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도 죽어야 하며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비밀을 지키면서 타심통이나 숙명통, 천이통, 신족통, 천안통, 이 오신통에서 딱 벗어나면, 바깥의 이 다섯 가지 통에서 벗어나면은 바로 이 통을 굴릴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내 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내 몸을 코치를 못해요. 내 몸 안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나를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건강하게 이끌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듯이 그 오신통이라는 다섯 가지 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안 되겠기에 보이더라도 놔라, 들리더라도 놔라, 남의 마음을 알더라도 놔라, 과거를 알더라도 놔라, 내 몸이 시공을 초월해서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간다 하더라도 놔라. 그것은 비밀을 지키는 거다. 그것이 바로 물리가 터져서 지혜를 구해서 내가 바로 그것을 실험하고 체험하여 자기의 것을 만드는 그러한 비밀의 문서다. 비밀 문이 나한테 있다.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내는 비밀 문이 나한테 있으니 내 문을, 없는 문 있는 문 다 놓고 그 문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도 죽어야 하며 또 그렇게 비밀을 지키고 오신통에서도 벗어난다면 그때는 너 나가 없이, 너 나는 틀림없이 있으면서도 네가 내가 되고 내가 네가 될 수 있는 그러한 나툼에 의해서 응신(應身)으로서도 막강하며 나툼의 화(化)함도 막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화하는 거는 무엇이냐? 이 마음이라는 자체는 체가 없어서 수만 명의 모습이 달리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백억화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천백억화신이라고 그랬을까? 여러분이 응(應)하는 대로 응해 주시기 때문에. 모습도 다르게, 산신을 원했으면 산신으로 보여 주고, 관세음보살을 청했으면 관세음보살로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러나 보여 준 것만이 아닙니다. 모습도 응해 주셨지마는 마음의 그 자비도 응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나툼은 하다못해 곤충에서부터 일체 모든 생명들에게 나투며 화하면서 응해 주시는 부처님의 한 발 내려디딘 보살행이니 보현등의 행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연화불(蓮華佛)이라고도 할 수 있고 여래불(如來佛)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부처님이라는 그 말은 하다못해 곤충에 이르기까지 응해 주시기 때문에, 목신에도 응해 주시고, 지신(地神)에도 응해 주시고, 남녀를 막론해 놓고 거지든 거지가 아니든, 권세가 있든 권세가 없든, 여자든 남자든, 애든 어른이든, 지식이 있든 없든, 학식이 투철하든 말든, 박사든 박사가 아니든, 어떠한 문제를 막론해 놓고 평등하게 응해 주시기 때문에 이 도리를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을 어떠한 한 인간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개별적인 완성이 아니라 아까 얘기했듯이 전체가 한데 합쳐진 완성이며, 같이 돌아가는 완성이며, 너는 너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흐르고, 이렇게 흘러가는 데서 응(應)해 주시며 모두가 내가 될 수 있고, 내 자리가 될 수 있고, 내 손이 될 수 있고, 내 아픔이 될 수 있는, 바로 이것이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으로서 응해 주시는 부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벌레가 될 때에 부처라고 할 수도 없고, 관세음보살로서 여러분 앞에 응해 주실 때에 부처라고 할 수도 없고, 축생으로 응해 주실 때에 부처라고 할 수도 없으며, 개 배 속에 들어갔을 때에 부처라고 할 수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길이며 진리다. 한 가지 얻은 것은 진리를 얻었노라. 그 진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이름을 가진, 이름이 없는 이름이 바로 길이며 진리이니라.’ 하신 그 뜻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그 길을 따른다면 올바르게 자력신앙으로서 우리 갈 길을 똑똑하게 갈 수 있다. 그러면 어떤 게 똑똑한 건가? 모든 것을 놓고 참자기의 중심에 의해 이리로도 흔들리지 않고 저리로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백장 선사(百丈禪師)가 “너희들이 땅을 파도 아니 되고, 땅을 아니 파도 아니 되니 그것은 무슨 연고인고?” 하고 말씀하셨듯이 ‘그 도리를 앎으로써 농사를 지어서 일체 중생들에게 한 그릇을 가지고도 다 먹일 수 있고 그 한 그릇이 되남을 수가 있느니라.’ 하신 것은 그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수없는 선지식들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부처님께서도 그 말씀을 하셨고 그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없이 나오셔서 여러분한테 보여 주셨다 이겁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 많은 대중 앞에서 꽃 한 송이를 들자, 가섭 존자(迦葉尊者)는 얼굴의 미소로써 마음이 계합이 됐어. ‘나는 이 깨치지 않은 깨침, 이 법을 너한테 전달하노라.’ 쉽게 말한다면 말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우리가 꼭 말을 해서만 아는 게 아니라, 한 말을 했을 때 봇장이 울릴 수 있는 그러한 여건을 가질 수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전기’ 하면은 저 전구만을 보지 마시고, 그 전력을 보신다면 아마 밝음을 만들어 놓은 저 전구와 갓을 똑바로 보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저 전구라는 물질만 보시고, 스위치를 누르면 그저 밝게 불이 들어온다는 것만 아시지, 전력이 오고 가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걸 모르는 것입니다. 전력은 여러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한테 전력이나 광력이나 또는 자력이나 통신력이 다 충만히 갖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첫째도 놔서 죽어야 하며 비밀을 지켜야 하고 둘째도 죽어야 하며 일체를 놓고 비밀을 지켜야 하며, 셋째도 죽어야 하며 그 비밀로서 나투는, 응신(應身)으로서 나투는 법을 증득(證得)하고,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물리가 터지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학식으로만 배운다면, 유치원에서부터 주욱 배워 나가면서 박사 학위를 따서 거기서부터 또 자기의 소임을 맡아서 해 나가는 데에 얼마나 고통이 많겠습니까? 지금 학술적으로 지식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도 여러분이 얼마나 노고가 많습니까? 그뿐입니까? 여러분은 남의 지식과 남의 학식과 남이 만든 모든 방편을 머리에 넣고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마음을 증득한 뒤에 재료로 쓰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게.
그렇다면 어떠한 것이 먼저냐. 여러분 마음이, 마음 내기 이전이 마음이죠? 그것을 불성이라고도 하고 여러 가지의 이름으로 돼 있습니다마는 여러분한테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여러분 육체 안에, 오장 육부 안에 악업 선업이 뭉쳐서 중생들이 돼서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만드니 거기에 속지 말라고요. 여러분의 그 참나라는 중심의 참자기는 더하고 덜함도 없으며 당당하며 꿋꿋한 것입니다. 밝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악업 선업이 자꾸 농락을 해서 그것을 뒤집어쓰고 맞고 해서 여러분이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런데도 그저 꿈을 조금만 잘못 꿔도 ‘아이고, 오늘 뭐가 잘못되려나 보다.’ 조금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가도 ‘아이고!’ 하고서는 나쁜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거는 생각 자체의 운전을 잘못하는 겁니다. 나쁜 생각이 들고 우울한 생각이 들고 말하기도 싫고 그렇다면 아, 그걸 조금만 돌리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도 여기니까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것도 여기지.’ 아, 이러면 금방 돌아갈 거를, 그거를 노상 붙들고 있어요. 그러면서 뭐라 그러는지 아세요? 날더러 “이렇게 마음이 우울하고 말하기도 싫고 이러한 병고가 있습니다.” 그러거든. 왜 그걸 내게 말을 합니까, 예? 일체의 운전수는 당신이라고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용도에 따라서 당신 앞에 닥치는 대로 운전을 잘 하고 가라고 이랬는데도 불구하고 왜 나한테 묻습니까, 이겁니다.
또 한 가지는 “그러면 스님께서 다 놓으라고 그랬으면서 무슨 질문을 하라 하십니까?” 이러신다면 내 한마디 해 드리죠. 도반들끼리 모이면은 신랄하게, 문짝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리만큼 신랄하게, 법을 구하는 데는 서로 문답을 청하고 또는 토론을 하고 이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고 하는 데서, 이렇게 행하고 저렇게 행하는 데서 바로 체로 걸러서 내가 내 거를 만드는 수가 많거든요. 그리고 물리가 터지는 수가 많고 지혜가 생기는 수가 많습니다. ‘저런 건 저렇게 안 했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 ‘저거는 저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도 드는 겁니다. 그런데 “그럼, 스님은 다 놓으라고 그러시면서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아서 토론을 하고 질문을 하라 하십니까?” 이런다면은 한 가지 말씀을 드리죠.


여러분이 나한테 질문을 했을 때, 질문을 했을 때의 그 음파를 나는 집어먹었습니다. 그럼 여러분이 한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또 여러분한테 내가 말씀을 드렸는데 여러분은 내 말의 음파를 듣고 먹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렇게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서로가 자력과 전력과 광력과 통신력이 충만하게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이쪽에서 말을 했으면 그쪽에서 먹고, 그쪽에서 말을 했으면 이쪽에서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력과 같아서 오고 가는 것도 없이 통신이 됩니다. 무전통신이 왔다 갔다 하죠? 물이 없으면 전력이 없죠? 이 모두가 묘법입니다. 이 묘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이 살아나가는 가운데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내가 말하는 거를 먹어 버리고 내가 여러분이 말하는 거를 먹어 버렸다면 그냥 무(無)죠? 한 사이가 없죠? 그런데 그렇게 끄달릴 수가 없는 겁니다. ‘스님이 말을 하지 말랬는데, 그냥 놓으라고 그랬는데….’ 아, 이렇게 옹졸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아까도 말했듯이 부처님께서 세 가지의 여건에 의해서 우리들한테 일러 주신 거와 같이 찰나의 생활이 길이며, 너 나가 있는 생활이 바로 이 진리니라. 그러면서도 너 나가 한 사이 없고, 뜬구름과 같고, 뜬구름과 같으면서도 그 속에는 분명 네가 있고 내가 있습니다. 금방 말했으면서도 금방 먹어치워 없애 버리고, 물질은 변질돼 가도 뿌리는 영원하듯이 우리는 이 뿌리의 영원함을 발견하고 자유스럽게 살기 위해 공부해 가고 있습니다. 저 우주의 근본도 인간의 마음의 근본과 직결돼 있다는 요거 한마디라면 모두가 될 수 있다는 거, 들을 수 있다는 거, 볼 수 있다는 거, 판단할 수 있다는 거 모두가 거기에 종합되는 겁니다. 일일이 이렇게 한마디 한마디 해야 아시겠습니까?


내가 만약에 어떠한 부분을 말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할 겁니다. 그러나 ‘우주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돼 있다.’ 이런 것도 뜬구름 잡는 얘기일까요? ‘세상에 모든 살아나가는 생활의 근본이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이 돼 있으니….’ 하는 것도 또 뜬구름 잡는 얘기일까요? 여러분이 세상을 보시듯이, 다 지켜보십시오.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끼리끼리 장단 맞춰서 끼리끼리 놀고 있습니다. 흥겹게 말입니다. 그러나 흥겹지만은 않습니다. 이 도리를 모르는 이상 끼리끼리 싸우고 뜯고, 쫓고 쫓기고, 이건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지난번에도 미국에 갔을 때 기독교인과 가톨릭교인이 초청을 해서 갔습니다. 하지만 손색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라는 거는 어떤 종교의 이름도 포함되는 것이 불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 전체 직결돼 있는 그 자체가 불(佛)이거든요. 생명의 근원이 불이거든요. 그것은 여러분이 진화돼서 인간까지 올라왔으니 모두가 부처님이 되실 수 있는, 그런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여러분이 자녀들한테 좋은 말씀을 하시죠? 그게 말씀이 즉 교(敎)입니다. 그래서 불교라고 하는 거지 어디 한군데 국한돼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니 가톨릭교니 알라신교니 뭐, 여러 가지 종교도 이름이 헤아릴 수가 없이 많아요.


그러나 그것은 전부 타력신앙으로 믿고 있어요, 지금. 여기 가 봐도 그렇고 저기 가 봐도 그렇고 전부 맹종하고 있어요. 그림에 맹종하고 있고, 이름에 맹종하고 있고, 사람에 맹종하고 있고.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없는 거를 가르친 게 아니라 진리의 길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각자 여러분이 여러분의 그 마음을 발견해서 그 재료를 마음대로 들이고 내면서 삶의 보람을 누리고 살라. 영원히 윤회에 끄달리지 말고, 이 우주의 진리를 시공을 초월해서 보라.” 이렇게 가르치신 겁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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