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잘하는 거 못하는 거 보기 이전에,
그걸 봤으면 보는 대로 그냥 주워 넣어요.
그냥 보는 대로 주워 넣으라고요.
그리고 부드럽게 해 줌으로써
그냥 한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 그림 최주현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유
질문 과연 이 물질문명을 통해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일까요? 세상이 왜 이렇게 복잡하고 어렵게만 돌아가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저도 마음공부를 빨리 배워서 이 험악하고 힘든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답변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모두 이렇게 복잡해지는 거는 마음을 등한시했기 때문입니다. 정신계를 무시했기 때문이죠. 지금 어느 학교에서도 물질계와 정신계를 한데 합쳐서 공부를 가르치지 않아요. 그래 가지고야 어떻게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지금은 그렇게 안 하지만 전에는 한번 그렇게 해 보기도 했어요. 그게 스스로 돼야지, 억지로는 안돼요. 습이 다 녹고 업력이 다 소멸되면 스스로 내가 나를 이익 하게 생각하는 법이 없어요. 없어져요. 모두가 나 아님이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무리 고생해도, 붙들려서 맞아도 나는 그 사람 탓을 안 했으니까요. ‘아, 나를 부딪히게 해서 단련시키느라고 그러는구나.’하고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니까. 죄 없이 맞은 거는 빨리 낫는다고 하는 말도 있죠. 그렇듯이 금방 괜찮아지고 그래요.


그것을 말로는 어떻게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여러분한테 그 말을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는 본인들이나 아는 거지 제삼자가 다 알 수는 없는 겁니다. 어쩌다가 한마디 이렇게 말하는 거지, 그걸 다 어떻게 알겠습니까? 말은 “남을 먼저 생각해라.” 이렇게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은 드뭅니다. 공을 치면 튀어 온다고 그러죠. 분명코 치면 튀어 오는 건데도 불구하고 욕을 막 해 댄단 말입니다. 욕을 해 대면 그 욕한 것이 나한테까지 튀어 오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어느 회사에서, 또 학교에서도 그렇고 어떠한 문제가 있으면 그저 그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면서 “둘이 아닌데, 저 사람에게도 마음의 불이 들어오게 해서 그렇지 않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관하라고 그러죠.
 

그러면 사람의 마음이 백팔십도로 달라져요. 그렇게 해서 하나하나 고쳐 나가는 거지 어떻게 그걸 다 고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고치면 누가 좋으냐 하면 자기가 좋거든요, 편리하고. 앙숙으로 지내다가도 편해지거든요. 부모자식지간에도 그렇고 형제지간에도 그렇고, 부부지간에도 그렇고, 그냥 의리가 나빠서 싸우고 하는 것이 다 마음 싸움이거든요. 그 업보로 인해서 모든 게 쌓이고 쌓여서 내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만났던 과거의 인연들이 또 이 세상에 나와서 다시 만나서 앙숙이 돼 가지고 그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어떤 때는 신도님들더러 내가 그러죠. “남편을 원망하지 마라. 너도 전에 그랬잖아. 지금 네가 그렇게 당하는 거를 생각해 보면, 금방 당할 때는 알지만, 과거로부터 당해서 지금 현실에 온 것은 너는 몰라. 너도 남을 그렇게 아프게 했어. 그러니까 네 탓으로 돌려. 그러면 그것이 다 소멸돼.” 그렇게 합니다. 사실이고요, 또 그게. 뭐 그걸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마음의 도리를 빨리 배우려면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이유를 붙이면 빨리 일심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것은 일심으로 정진해야 하거든요. 소멸시키는 실천이거든요. 우리가 실천하는 겁니다, 지금. 정진이다 뭐다 이름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멸시키는 실천요.

공부가 많이 돼도 감정적으로 나오는데
질문 함께 공부하는 도반 중에, 공부가 많이 됐다고 하는데 말과 행동과 모습이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걷잡을 수 없이 감정적으로 나온다면 이것도 가르치기 위함으로 봐야 되는 건지요.
답변 공부하는 사람들은요, ‘옆눈을 팔지 마라. 옆을 보지 마라.’ 이랬습니다.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나도 한때는 그렇게 지내 봤습니다마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옆에서 잘못하든 잘하든 그거를 개의치 마라.’ 이겁니다. 왜냐. 옆에서 잘못하는 거를 보더라도 ‘너하고 나하고 둘이 아닌데, 전자에 몰랐을 때 바로 내 모습이었다.’ 하고 안에다 놓아 버리세요. 이것이 그냥 억지소리가 아닙니다. 수없이 바뀌어서 돌아왔으니까요. 여러분이 수없이 바뀌어서 이 자리에 와 있다면 못났을 때 그 모습, 잘났을 때 그 모습, 못했을 때 그 모습, 형편없는 그 모습이 모두 자기가 거쳐 올라온 그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한마음에 모든 걸 놓고 ‘둘이 아닌데, 그렇지 않게끔 하는 것도 한마음 주인공 아니야?’ 한다면 그쪽도 바꿔집니다. 바꿔져요, 예. 그거는 마음과 마음이 통해서 이게 바꿔져야지, 말로 육신으로 해서는 외려 더 업을 짓는 거지 그건 안 통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모든 거를 놓고 가야만이 다 버려서 다 얻는 거죠. 만약에 이거 잘못된 것 보이고 저거 잘못된 것 보이고 이런다면 이러다가 언제 그 길을 갑니까? 언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모든 것을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다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남이 잘하는 거 못하는 거 보기 이전에, 그걸 봤으면 보는 대로 그냥 주워 넣어요. 그냥 보는 대로 주워 넣으라고요. 그리고 부드럽게 해 줌으로써 그냥 한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내면세계와 물질세계가 둘이 아니려면
질문 큰스님의 『뜻으로 푼 금강경』에서 “내면세계와 물질세계를 둘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고 하셨는데 내면세계와 물질세계를 둘 아니게 보려면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 나가야 하는지요.
답변 우리는 물질세계와 내면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있기에 물질세계고 나를 다스리는 자가 있기에 바로 내면세계다 이겁니다. 내면세계와 물질세계가 둘이 아닌 까닭에 내가 있으니까 내 내면에 선을 세워 놓고, 즉 주인공을 세워 놓으란 말입니다. 마음을 내는 것과 몸이 움죽거리는 것, 그리고 마음을 내게 하는 놈, 이 삼위일체가 같이 합동으로 돼서 찰나에 돌아가고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니까 주인공이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주인공 자체가 자기 껍데기다 아니다 할 것도 없이 주인공입니다. 그냥 그대로!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 너만이 이끌어 갈 수가 있고, 너만이 해결을 할 수가 있고, 병고가 있어도 네 몸이니까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가는 것도 너뿐이다.’ 어떠한 상대가 나를 때리고 찢고 찍고 정신을 뺏어 먹으려고 애를 쓰더라도 ‘둘 아닌 까닭에 저 사람이 저렇게 안 하게끔 할 수 있는 거는 너밖에 없다.’ 하고 놔 버린다면, 바로 그것이 정향이자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패기를 잃지 않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그렇게 귀하고도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향’ 할 때에 그걸 문을 찾아서 다니는 걸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어서 광대합니다. 지구 바깥에도 벗어날 수 있고 우주 밖에도 벗어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건 문을 찾아서 다니는 게 아니고, 벽도 봇장도 우주도 대기권도, 땅속도 물속도 물론 여지없이 통하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의 선을 세워 놓고 ‘주인공,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할 때 그 말이 한데 떨어지지 않고 법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이 바로 그렇게 하는 그 마음을 통해서 나투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마음으로써 내면세계와 물질세계 양면을 따로 보지 말고 같이 관찰하면서 체험하면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이름해서 혜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났으면 바로 내 탓으로 일체 만법을 돌려라. 그런다면 증오도 미움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 법에 누(累)가 되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계율을 지킨다 안 지킨다도 없이 계율을 지키게 돼 있고, 바로 자기에게도 누가 되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내가 난 탓으로 돌리니까, 모든 게 나로 인해서 생기고 들고 나고 하는 걸 알게 되고, 그래서 모든 것을 ‘잘못되는 것도 거기서 나온 거니까, 잘되게 나오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거기다가 놓고 잘되는 거는 감사하게 놓는 그 마음이, 패기 있게 물러서지 않는 그 마음이 들어야 된다.
그 마음이 듦으로써 지혜로운 마음이 생긴다 이겁니다. 그래서 내면세계와 물질세계를 둘로 보지 않는 관찰 그리고 체험, 그렇게 해 가는 것이고, 그렇게 둘이 아니게 관찰을 하고 체험을 하고 가니까 그냥 자동적으로 내 자생중생의 무명,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얽히고설킨 그 무명에 묶여 있던 것이 스스로 풀어진다. 스스로 풀어지고 스스로 묶였던 게 풀어지니까 여여하게 다스리고 그냥 나갈 수 있다 이겁니다.
이렇게 첫 번째에도 그 자리에다 놓고, 두 번째도 그 자리에다 놓고 보임을 해야 하고, 세 번째도 그 자리에다 놓고 보임을 해야 되겠죠? 그건 왜냐. 나를 깨닫기 위해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상이 자손을 도울 수 있는지요
질문 부처님을 믿지는 않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로또에서 1등을 한 분들 중 39%가 조상의 꿈을 꾸고서 당첨이 됐다고 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이 살아 있는 자손을 돌보고 그럴 수 있는 것인지요. 저도 조상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지금의 궁핍한 삶을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변 옛날에는 자손들을 육 형제나 오 형제나 이렇게 많이들 낳아도 낳는 대로 저거 했지 어린애를 지우거나 이런 법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어느 사람이 칠 남매를 두었는데 그 칠 남매를 두고 농사를 지어서 가르치고 뭐 하고 하려면 얼마나 피땀이 나왔겠습니까. 부모들이 위로는 다 좀 가르치고 그러다가 밑으로 막내를 가르치질 못했어요. 인제는 쇠약하고 저거 해서 위로 큰형들이 좀 도와서 해야 할 텐데 도와서 하질 않았기 때문에 밑으로는 잘 가르치지도 못하고, 농사를 조금 지어서 그냥 먹는 판이어서 부자가 될 수가 없었죠. 그렇게 살다 보니까. 그래 남의 집의 품을 살고 이렇게 하다 보니깐 아주 가난해서 부모는 인제 다 돌아가시고 제가끔들 사는데, 막내는 아주 더 가난하고 어렵고 그래도 그 위로는 괜찮게 살고 그랬는데 괜찮게 사는 형이 아우를 조금도 돕질 않거든요.


그러니깐 가난한 사람이 형네 집에 가면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차라리 안 가는 거죠. 그냥 굶더라도 안 가고 있는데 인제 어머니 제삿날이라든가 이런 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깐 인제 자기가 먹는 냉이를 캐다가 말갛게 씻어서 보리죽을 쑤든 쌀죽을 쑤든 뭐 이렇게 죽을 쒀 가지고는 자기 먹을 거를 퍼서 인제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이렇게 놓는데, 그것도 상에다 받쳐서 놓을 데가 없어서 장독자리에다가 이렇게 그냥, 장독자리도 뭐 원만히 돼 있겠습니까만 그 위에다가 이렇게 놓고선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리면서 이렇게 못난 아들 때문에 한번 어머니 제사 때 가 뵙지도 못하고 이렇게 저거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고 그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형네 집을 가니까 그 부모님들이 형네 집을 안 가고 자기네 집으로 간다고 어서 가자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네가 해 놓은 것부터 먹고 내가 형네 집을 가야 한다고 그러더라는 거죠.
그래서 부모를 모시고 자기네 집으로 오니깐 그냥 그 장독자리에 있던 그 죽 쑤어 놓은 거를 그냥 방으로 들여다가 놓고는 그냥 그렇게 맛있게 잡숫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맛있게 잡숫고선 “야, 난 인제 큰형네 집으로 간다. 잘 살거라.” 이러고선 그렇게 가시더래요. 가시더니 그 해에 농사짓는 부잣집에서 마름을 얻었대요. 마름을 얻어서 농사를 지어서 참, 집을 한 칸 우리게 됐고 인제 제대로 좀 밥을 굶지 않고 살게 됐더랍니다. 그렇게 살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자식들도 가르치게 되고 그렇게 됐거든요.


그게 왜 그렇게 된 줄 아세요? 그 마음이 지극해서요, 마음이. 부모로 보였든 부모 아니로 보였든 간에 마음이 지극하니까 그 모두가 감동한 거죠. 우리가 자기 속으로 생각하는 건 아무도 모르죠. 그러나 그냥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렇게 돌아가도 자기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원인이 제공이 되는 겁니다.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전파로 통해서 이렇게 다 알게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인들이 모두 제각기 ‘타의에서 구하지 말라. 타의로 이끌어 가지 말라.’ 하는 겁니다. 왜 자꾸 노예를 만드느냐 이 소립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타의에서 구하는 건 다 기복이니까 말입니다. 모두 각자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모든 게 벌어진 거고 우주가 있는 거고 세상이 벌어진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무효지. 내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게, 세상이 벌어진 거고 업보도 유전성도 인과성도 다 벌어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부터, 나부터 알아야 하고 나의 주처부터 발견해야 한다 이 소립니다.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에, 한 찰나에 들고 나는 내 주처가 있습니다. 이 몸뚱이는 그 주인에 의해서 항상 심부름을 해야 하고 부지런히 뛰어야 하는 그런 위치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항상, 즉 말하자면 하심하면서 위로는 자기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아래로는 참회하면서 자기 탓으로 돌리고서 거기다가 맡겨 놓는 거, 이렇게 굴리는 거….


또 여러분이 이 주처에, 주인공에 해 달라고 그래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해 달라고 ‘잘되게 해 주소서.’ 이렇게 한다면 벌써 둘이 됩니다. 상대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참자기로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 아주 결론적으로 관하는 겁니다. ‘당신만이 나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종일 뿐이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모든 것이 당신 거고 당신이 하는 거고 당신이 들이고 내고, 병고가 나오는 것도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서 해결을 해야지.’ 하고 모든 것을 관하라 이겁니다. 이렇게 ‘관한다’ 하는 거는 거기다 맡겨 놓고 지켜보고 실험하라, 체험하라 이 소리거든요. 그것이 참선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엎드러졌을 때 그 땅을 짚고 일어나지 딴 데를 짚고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죠. 그 속에서 나온 건 그 속에서 해결해야 된다. 그래서 그렇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관하고 또 참회하면서 관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 보시면 사는 대로, 하다못해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어 가게 될 것입니다.

궁리하는 것과 놓는 것에 대해서
질문 과거에 했던 일이 현실에 과보로 등장하게 되면 당면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제 마음 안으로 이렇게 저렇게 답을 구하기 위해 궁리하는 것과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놓고 가는 도리, 그 두 가지를 생활 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서 수행해 나갈 수 있는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우리가 과거라고 하지만 어저께도 과거고, 한 시간 전도 과거고, 삼천 년 전도 과거입니다. 그런데 삼천 년 전과 어저께와 한 시간 전이 같습니다. 이게 한 찰나입니다. 내가 항상 구정물을 바꿔 쓰라고 그러죠? 그냥 거기다 놓으란다고 그냥 맡겨 놓기만 해서는 안 되죠. 예를 들어서 기계를 잘 고쳐서 끼워야 될 텐데 기계를 고치지도 않고 그냥 갖다 끼우면 이게 돌아갑니까? 안 돌아가죠? 그러니까 고쳐서 끼워야죠, 고장이 난 거는요. 그와 같이, 그렇게 다가와서 내 앞에 닥칠 때는 과거든 뭐, 오래 걸렸든 업보든 그런 건 상관하지 말고 ‘네 속에서 이렇게 모두 진행한 거니까, 네 속에서 모두 나오게 한 거니까 네 속에서 해결을 해야잖아!’ 하고 반드시 바꿔서 놓는 겁니다. 바꿔 끼우는 거죠. 바꿔 끼우고 믿어야 되죠. 고놈을 믿어야죠.


안으로나 외부적으로나 어떠한 문제든지 용도에 따라서 통신을 하고…. 이 인간에게도 대기권이 있어요. 그래서 이 원자인 마음속에서 모두 분자로, 입자로 출발을 하죠. 그래서 이거를 음파라고 합니다. 빛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무전 통신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그렇게 해서 다 이것을 판단을…, 판단이라기보다도 법으로 진행을 해 버려요, 그냥.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놈, 그렇게 할 수 있는 그 백이 있는 놈한테 다 맡겨 놓는 겁니다. 그렇게 바꿔서만 맡겨 놓으세요. 우리가 심부름을 시킬 때 “이거를 이렇게 해서 너 바꿔 가지고 오너라. 이거를 가지고 이렇게 사 가지고 오너라.” 해야지, 이거를 주고선 “네 마음대로 해라.” 이런다면 어떻게 합니까, 이거를? 그러니까 그 자리에 그냥 놔져만 있는 거지, 그게 중용이 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이거를 이렇게 해서 이렇게 구정물이 들어오는 거니까 맑은 물로 대치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돌려 놔야 되겠죠. 이런 것까지 이렇게 힌트를 주고 가르쳐서 말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예요,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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