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관 스님

지관 스님의 눈빛을 통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 속에
깊은 갈등이 있었다.

▲ 작가는 지관 스님의 눈빛을 처리하는데 있어 머뭇거렸다. 한국 불교의 미래와 장구한 세월을 담을 것인지 아니면 세상을 고민하는 눈빛으로 표현해야 할지 붓 속에 마음을 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님의 고뇌를 읽었다.
스님의 이름 앞에는 항상 우리나라 최고의 학승 중 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스님은 한국불교사에 불교대사전 편찬이라는 위대한 일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일은 스님이 입적한 지금에도 후학들에 의해 올곧게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스님이 펼친 대역사에 대해 공감하고 동참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분명 한국 불교의 힘이며 가능성이다.


지관 큰스님.
나는 스님을 네 번 뵈었다. 한 번은 총무원 집무실에서 또 한 번은 가산불교문화연구원에서 뵈었고 긴 시간 동안 경국사에서 뵈었으며 소공동에서 식사를 함께하면서 뵈었다. 모두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목적의 자리였다. 두 번은 스님을 느끼고자 스님의 말씀을 들었고 나머지 두 번은 스님을 모델로 스케치를 하였고 스냅 사진을 찍었다. 이런 시간은 스님의 음성과 눈빛 그리고 작은 떨림과 섬려한 느낌까지 살필 수 있어 스님을 해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당시의 메모장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스님에 대한 첫 느낌은 건장함과 단단함이었다. 골격은 크고 굵었으며 움직임에 여유를 더하여 기품이 있었다. 얼굴은 수려했고 얼굴빛은 밝았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몸으로 체득한 온화함이 있었다. 그러면서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동공의 함 속에서 고집과 집념 그리고 의지와 끈기 등이 내밀하게 감추어져 있음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또릿했고 콧날과 귀가 컸다.”
이 기억을 토대로 스님을 형상화시키기 위해 인상을 정리하였다.


스님은 두상이 크고 완만하다. 그러면서 이마 선은 분명했다. 머리털도 질서 정연하게 골고루 산포되어 있다. 이마에 몇 줄기의 주름이 드리워져 있지만 잔주름이 없다. 때문에 좋은 상으로 보이게 한다. 미간은 넓다. 그래서 성품이 넉넉하게 보인다. 눈썹은 아래로 타원형을 그리고 있다. 이런 형상은 자비로운 모습을 부각시킨다. 눈 형상은 눈 꼬리가 내려와 있어 순한 인상을 자아낸다. 그러나 눈빛은 세고 예리하다. 눈가에는 많은 주름이 집중되어 있다. 이 주름은 분명 미소 주름이지만 이 주름 속에는 한줄기 설핏 해석하기 힘든 외로움도 읽혀진다. 코는 넓고 크다 그러면서 콧등은 굴곡 없는 직선으로 안정감이 있다. 고집이 느껴지지만 귀족형이다. 인중은 길다. 분명 장수형이다. 이런 사실은 스님의 유전학적 내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유추하게 만든다.


스님의 입은 가늘지만 반듯하다. 그러나 미소가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 미소 속에 드러나는 가지런한 이는 단아함과 맑고 깨끗함을 선사한다. 스님은 손이 컸고 가슴이 넓었다. 입고 계시는 가사와 장삼은 여느 승복과 달리 한껏 가늘고 풍부한 곡선의 멋이 느껴졌다. 그것이 스님의 체구에서 만들어 내는 투명함인지 아니면 특수하게 제작된 옷감에서 오는 하늘거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보통의 옷감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이렇듯 생각이 정리될 즈음 그림 작업을 시작했다. 초상화 작업은 1년 반 동안 계속했고 오전에만 집중했다. 나는 스님 진영 작업을 하면서 다른 여타의 일을 작파할 정도로 매달렸다. 그만큼 스님 작업은 의미가 있다 생각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학승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고 진영을 부탁한 분들과의 신뢰 관계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지관 스님을 그리면서 그림의 잘잘못을 지적하는 데에는 내 능력의 한계로 여기며 입을 다물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보고 화가의 정신이나 인격을 폄훼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인내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자만함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자존심이다. 단언컨데 나는 지관 스님을 그리면서 작업 과정에 부끄럼 없도록 진정성을 담아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나는 모두 4점의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얼굴이 닮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째는 얼굴은 흡사한데 의자에 앉는 모습이 아니라고 퇴짜를 맞았다. 세 번째는 스님의 가사의 조가 새의 날개처럼 나풀거리지 않는다고 했다. 네 번째는 아무 말 없이 가져갔다. 나의 작업실에는 거절당한 지관 스님 그림 3점이 보관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좋은 기억을 표현한 작품 모두가 나의 소장품 목록에 있어 다행이지만 화가로서는 잊기 어려운 아픔이다. 스님과 스님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달랐고 그림의 목적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 그리고 나는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이 작품들은 기회가 된다면 전람회장으로 불러내어 볼 생각이다.


스님을 그리면서 지울 수 없는 의문이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 네 번째 작품을 할 때 나타났고 작업 내내 짐이었다. 스님은 탁월한 학승이었다. 또한 스님은 해인사라고 하는 당시 유일한 총림에서 기라성 같은 고승들을 뒷배경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그 고승들이 살아온 삶과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꽃 피워지기를 기대했던 “우리 지관 스님”이었다. 그 배경과 바람으로 일생을 꽃 피웠어도 충분히 훌륭하였을 텐데 왜 총무원장을 하였을까? 총무원장은 사판의 꽃이다. 이것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시대에 성철, 자운 스님으로 대표하는 해인사의 가풍을 지관 스님이라는 학승이 풀어내었다고 세상사로 펼쳐졌을 텐데 총무원장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 내심 안타까웠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지관 스님을 학승으로 그려야 할지 행정승으로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스님의 눈빛을 처리하는데 있어 머뭇거렸다. 한국 불교의 미래와 장구한 세월을 눈에 품고 있는 눈빛을 표현할 것인지 아니면 한국사회에서 세상을 고민하는 행정승으로 표현해야 할지 붓 속에 마음을 담지 못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어느 곳에도 방점을 찍지 못했다. 나는 지관 스님의 눈빛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을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 속에 깊은 갈등이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2% 내 마음을 만족 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으로 드리지 못했다.


나는 지금도 내 작업실에 모셔 놓은 지관 스님 영정을 보면서 가끔 자문자답한다.
“스님, 스님께서 나서야 할 만큼 그때 한국 불교가 위급했는지요, 스님께서 순수한 학승의 이미지로만 남았다면 어땠을까요? ‘우리 지관 스님’의 눈빛이 진리를 향한 눈빛으로 투영되고 있는 영원을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스님, 저는 스님의 눈 끝에 매달린 주름을 보았습니다. 스님의 자비로운 미소 속에 왠지 모를 그늘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이 스님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고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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