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古典 -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
진실 보지못한 리어왕의 자멸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상 그려
코델리아가 보인 평정한 마음이
범부가 미혹에서 벗어나는 방편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한 장면을 묘사한 에드윈 오스틴 애비(Edwin Austin Abbey, 1852~1911)의 작품 ‘코델이아의 작별인사(1898년 作, 캔버스에 유채)’. 리어왕은 탐진치에 매몰된 어리석은 인간 군상의 나약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King Lear: Cordelia's Farewell by Edwin Austin Abbey


‘표리부동(表裏不同)’, 이게 〈리어왕〉의 세계를 한 마디로 표현한 주제어이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고 인간의 속성이다. 리어왕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겉과 속이 다른 행태로 살아가고 결국 비극의 인물들이 된다. 그것은 소포클레스 희곡 〈오이디푸스〉의 비극과 닮아 있다. 신탁을 거역한 인간이 결국 비극에 처하게 되고 비로소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깨닫게 된 다는 것.

불교는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슈퍼맨의 존재로 끌어올리는 교리를 갖는다. 나약함에서 금강불괴의 강인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지. 그것이 불교의 인간관이다. 인간의 나약함은 세 가지 단어로 요약된다.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탐진치(貪瞋痴)’이다. 삼독(三毒)으로 일컬어진다. 이 삼독을 여의지 않고는 부처가 될 수 없다.

〈리어왕〉의 내용을 살펴보자. 리어왕은 권력을 내려놓고자 자신의 딸들에게 국토를 삼등분해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모든 정치적 근심과 국사를 이 노인의 어깨로부터 젊고 기운 있는 사람들에게 이양하고, 홀가분한 몸으로 죽음으로의 여행을 떠날 참이다.”

하지만 그는 말과는 달리 표리부동하다. 딸들도 리어왕의 재산이 탐나 거짓말로 사랑을 고한다. 딸 거너릴은 “저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버님을 사랑합니다. 시력보다도, 자유로 처분 할 수 있는 넓은 토지보다도 소중한 분으로서, 값지고 희귀한 어느 것 보다도 귀중하고, 사랑과 미와 건강과 명예가 구비된 생명보다도 소중한 분으로서, 일찍이 자식이 바치고 어버이가 받은 바 있는 최대의 애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라고 칭송한다.

극진한 사랑의 표현은 그 자체가 가짜이다. 리어왕은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 코델리아에게도 그 사랑을 요구하며 이렇게 묻는다.

“언니들 보다 더욱 비옥한 세 번째 영토를 받기 위하여 너는 무어라 말하겠느냐?”
그러자 코델리아는 말한다.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리어왕은 “아무 할 말이 없으면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니, 다시 말해 봐라”라고 코델리아를 채근한다.
이에 코델리아는 “아버님은 저를 낳으시고, 기르시고 그리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의 보답으로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아버님께 복종하고 아버님을 사랑하고 아버님을 누구보다도 공경합니다”고 재차 말한다.

코델리아의 이 말은 리어왕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셋째딸에게 리어왕은 더욱 큰 기대를 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신하들이 과잉충성을 경쟁하는 맹세를 해대듯이 언니들의 사랑에 대한 표현보다도 더욱 큰 표현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델리아는 있는 그대로를 표출하였다. 일상심(日常心)이 곧 도(道)인 것이다.

코델리아의 말은 부처님의 무설전(無說殿)을 떠올린다. 부처님은 80 평생 사시면서 무수한 말씀을 쏟아내셨고 그 말씀으로 인해 많은 중생들을 깨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는 ‘난 아무 말도 한 것이 없다. 내가 한 말은 단지 우는 어린애 달래는 거짓말 이었을 뿐’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는가.
리어왕의 어리석음은 끝나지 않는다. “나는 저 손에 보호받아 여생을 보낼 참으로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달이 일백 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너희들 부양 아래 한 달씩 교대로 두 집에 머무르면서 생활하기로 하겠다.”

리어는 두 딸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이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왕위를 양위하고 영토를 물려주면서도 권력은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이 욕심 때문에 리어왕은 욕심 많은 두 딸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물려주며 흔쾌히 모든 권력과 권한에서 손을 떼야 했다.

리어왕은 코델리아에게 화를 내며 그녀를 두둔한 충신 켄트마저 추방령을 내린다. “만약 열흘 후에도 추방된 몸을 국내에 둔다면 발견하는 즉시 사형에 처하겠다.”

리어의 욕심과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반면 코델리아는 부처의 마음을 갖고 있다. 그녀는 양설(兩舌)을 갖지 않았다. 코델리아는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를 행하는 아라한(阿羅漢)이다. 그녀는 무소유(無所有)를 실천한다. 그것이 리어왕에게는 분노를 자아낸 이유이다. 이처럼 성(聖)과 속(俗)은 대립하는 개념이다. 코델리아의 말과 성격에 감동받은 프랑스왕은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여 프랑스로 데려간다.

코델리아: “남의 안색을 살피는 눈이나 아첨하는 혓바닥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없는 편이 오히려 인간으로서 훌륭하다고 생각됩니다.”

프랑스왕: “마음 먹은 것을 말로 하지 않고 실천하는, 말수 적은 천성 때문에? 사랑이 본질을 떠나 타산적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없어도 가장 부유하고, 버림 받았어도 가장 소중하며, 멸시를 받았어도 가장 사랑 받는 분입니다.”

리어왕의 인물들은 상반성을 갖고 있다. 양설로 남을 속이는 인물로 큰 딸 거너릴, 둘째 딸 리건, 서자 에드먼드. 이들은 정욕과 야망으로 양쪽을 이간질하거나 교언영색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다. 어리석음을 대표하는 인물은 권력에 눈이 멀어 딸들에게 속아 넘어간 리어왕, 일방적으로 말만 듣고 믿어버려 효자를 불신한 글로스터, 역시 고지식하게 한 편 얘기만 듣고 속아 넘어간 에드가가 있다. 반면 리어왕에게 인생의 교훈을 조언해주는 궁정광대는 현자이다.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충직한 인물은 막내 딸 코델리아와 리어왕에게 추방당했음에도 끝까지 호위하는 충신 켄트 백작이다.
희곡에서 핵심인물은 리어왕과 글로스터다. 둘은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 중 어리석음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리어왕은 어리석음 뿐 아니라 성냄과 탐욕까지 고루 갖춘 인물이다. 리어왕은 거너릴과 리건이 재산을 받기 위해 아양을 떨다가 재산을 얻은 후 박대하는 행동을 그대로 받게 된다. 리어왕은 겉만 보고 판단하여 효녀인 코델리아에게 오히려 화를 내고 두 딸에게 모든 걸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글로스터는 큰 아들 에드가가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서자 에드먼드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게 된다. 글로스터가 에드가를 마음으로 믿었더라면 에드먼드의 얘기를 곧이 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계속 에드먼드의 계략에 말려들어 적국 프랑스의 스파이로 몰리게 되고 두 눈이 뽑히는 극형을 받게 된다.

글로스터: “아, 내가 어리석었구나! 그러면 에드가는 모함을 당했구나. 나는 갈 길이 없으니까 눈은 필요없다. 눈으로 볼 때에는 오히려 넘어졌다.”

맹인이 된 이후 글로스터는 자신이 에드먼드의 거짓말로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눈이 있을 때는 진리를 보지 못하고 오히려 눈이 먼 이후 진리를 깨닫는다는 역설은 그대로 불교의 진리이다. 유식설(唯識說)에 의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의 작용은 불완전한 망상을 일으킨다. 내관(內觀)과 무념무상(無念無想)을 통해 공(空)의 진리를 깨우쳐야 해탈한다.
리어왕 역시 두 딸에게 배신 당한 후 미쳐버린다. “바람아, 불어라! 내 뺨을 찢어라! 뒤끓어라!”라는 격정의 대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리어왕은 비로소 자신의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자학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깨달음의 초기에 도달한 것이다. 초발심(初發心)의 상태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육신은 노쇠하고 약해져 있다. 그의 앞에는 죽음만이 놓여져 있다.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 그는 죽게 된다. 우리 인간의 유한한 삶을 나타낸다.

리어왕: “우린 울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처음으로 이 세상의 공기를 마실 때 으앙으앙 울었잖아? 네게 일러 주겠으니, 잘 들어둬! 우리들이 태어날 때, 우는 건 바보들만 있는 이 큰 무대에 나온 것이 슬퍼서야.”

리어왕은 부처님의 말씀처럼 깨닫는다. 부처님이 태어나셔서 처음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 걸으시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셨고, 성장하면서 동서남북 문으로 인간의 생노병사를 체험하시면서 인생은 고해이며, 불타는 집이요, 독화살에 맞은 것이니, 어서 해탈해야 함을 깨닫으신 것이다. 리어왕의 깨달음은 불교적으로 설명되어진다.
리어왕에는 이처럼 맹인과 광인의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인 공의 원리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이르기를 “만약 모든 보이는 것이 그 상태가 아님을 알면, 곧 깨치리라(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의 진리다.
리어왕의 시종인 궁정광대는 이러한 진리의 상태를 바보의 언어로 표출하는 현자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리어왕과 광대가 나누는 대화는 선문답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리어왕에는 맹인, 광인, 바보의 세계가 뒤엉켜 있으면서 깨달음의 세계를 지시하며, 속세와 해탈의 불일(不一), 불이(不二) 사상을 보여준다.

광대: 사람의 두뇌가 발뒤꿈치에 있다면 터져서 피가 날 염려는 없을까?
리어왕: 그럴 염려야 있지.
광대: 그럼 안심하세요. 당신이 지혜를 가졌다면 슬리퍼를 신고 가지는 않을 거니까요.

광대는 끊임없이 리어가 지혜를 갖추기를 경계한다. 두 딸에게 배신 당한 리어에게 이제 잃어버린 권력에 대해 더 이상 분개하지도 말고 차분해 지길 바란다.

광대: 일곱 개의 별은 왜 일곱 개 밖에 아니냐 하는 이유는 재미 있거든.
리어왕: 그야 여덟 개가 아니니까 그렇지.
광대: 그거 명답이야. 당신도 이젠 제법 광대가 될 수 있겠는걸.

이런 문답 속에는 선(禪)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 미친 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정상이 되는 것이다. 미친 사람은 인위적으로 일을 조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려고 한다. 하나는 하나고, 둘은 둘일 뿐이다. 하나면서도 둘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투명하고 담백하게 사물을 직감적으로 받아들인다. 미친 리어는 내면적으로는 점점 정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욕심도 없고 성냄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어지는 것이다. 두 딸에게 배신당한 이후 일어난 변화이다.

리어왕: 저녁 식사는 아침에 하자.
광대: 그리고 나는 대낮에 자러 가야지.

리어왕은 광대에 가깝게 변하고, 그가 왕으로 살았던 지난 세상의 이치는 전도되었다. 아비가 영원히 딸을 지배하려 하고, 딸이 아비를 배신하려 하던 질서는 세속의 법이었고, 그건 폐기되었다. 광인의 세계와 바보의 세계에서 세상의 진리는 평등이다. 부처님의 말씀에서처럼 세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은 보이는 권력은 무상하고 인간은 평등하며 그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진리를 전달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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