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불교 입문’ 19. 근본불교의 기본적 성격 下

법 아래 평등하다는 것

붓다는 병고를 참고 견디면서 겨우 원기를 회복할 수가 있었다. 그때 아난다(아난)는 이 스승에게 절을 한 다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세존께서 전에 병이 심했을 때 저는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며 사방이 캄캄해진 듯한 느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세존께서 무엇인가를 비구승가(僧家)에 관해서 말씀하는 일이 없이 세상을 떠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때 어느 정도 마음의 안도를 느꼈습니다.”

이 말의 뜻을 헤아려 보자. 아난다가 이해한 바에 의한다면 이 스승은 지금 현재 이 교단(敎團)의 지도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다면 반드시 다음 지도자에 대한 지명(指名)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러한 말이 없기 때문에 최후의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생각은 달랐다.

“진실로 아난다여, 만일 내가 나는 비구승가의 지도라든가, 비구 승가는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든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최후를 맞이해서 비구승가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러나 아난다여, 나는 이 비구승가의 지도자도 아니며 또 비구 승가는 나에게 의지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나는 최후에 있어서도 비구승가에 관해서 말할 아무것도 없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불교승가에 있어서는 모든 구성원이 서로서로 선지식(善知識)(착한 벗)이며 평등하며 화합하는 단체가 되어 서로 도우며 격려하는 것을 그 근본정신으로 한다. 따라서 거기에는 지배하는 자도 없으며 지배 받는 자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법 아래 있으면서 평등하다. 붓다도 또한 본래는 이러한 평등·화합한 단체의 한 사람의 단원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붓다의 후계자로서 어떤 사람이 지명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필요 없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교단에 있어서 붓다의 지위는, 역시, 어떤 특별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한 일은 아니다. 이 길은 바로 붓다라는 스승에 의해서 깨달아졌으며 설명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스승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으며 인도되어 여기에 몸을 던진 것이다. 몸을 던진 후에도 언제나 이 스승을 우러러보며 법을 근본으로 하며 규범으로 하며 의처(依處)로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 직제자(直弟子)들이 여기에 그 길의 주(主)가 있으며 지도자가 있었다고 생각한다해도 그것은 결코 도리에 어긋난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하며 이 길의 본래의 모습을 더듬어 보면, 그것은 법을 근본으로 하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앞세우는 길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붓다는 지금 아난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자기의 주인은 자기 뿐

그 두 번째에는, 이 길은 법 아래서 모든 사람이 자주(自主)이여야 한다는 발언(發言)이었다. 앞에서 말한 것에 관해서 붓다는 다시 또 아난다를 위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아난다여, 진실로, 이 시각에 있어서도, 또 내가 죽은 후에 있어서도 스스로를 주(洲)로 하며, 스스로를 의소(依所)로 하며, 다른 사람을 의소로 하는 일없이 또 법을 주(洲)로 하며 법을 의소로 하며, 다른 것을 의소로 하지 않으면서 수행(修行)하려는 사람이야 말로, 아난다여, 그러한 사람은 내 비구들 가운데서 최고의 지위에 있는 자이다.”

이와 같은 언급은 이미 앞에서도 말한 것이지만 아무리 강조하여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는, 말하자면 불교에 있어서는 매우 기본적이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이다.

세상에는 종교를 신(神)에게 매어달리는 인간의 길이라고도 한다. 신앙(信仰)이란 이러한 길에서 인간이 신(神)에게 절대적으로 빙의(憑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제 붓다에 의해서 시작된 이 길에 있어서 인간은 절대적으로 의지할 의처(依處)는 없다. 이런 뜻에서 이 길은 무엇에도 의지할 것이 없는 자주(自主)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점에 대해 유명한 <법구경(法句經)>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기의 의소는 자기 뿐이니라.
다른 것에 무슨 의소가 있겠는가.
자기가 능히 조어(調御)되었을 때
사람은 얻기 어려운 의소를 얻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바꾸어 말하면 앞에서 붓다의 말씀처럼 진실로 의지할 것은 다만 자기와 그리고 법 뿐이라는 뜻이 된다.

자기 형성의 의지처(依支處)
이것을 다시 오늘날의 이해(理解)에 알맞도록 설명한다면, 이 길은 철두철미(徹頭徹尾) 인간의 자기 형성의 길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건대 이 길에 있어서 간구(懇求)되는 것은 신(神) 앞에 머리를 숙이며 죄를 용서 받으며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또 신의 은총에 의해서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노력하지 않으면서 재물을 얻으려는 것도 아니며, 또 공로 없이 영예(榮譽)가 주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이 길에 있어서 간곡히 추구되는 단 하나의 길은 앞에서 <법구경>의 표현으로서 말한다면 잘 조어(調御)된 자기의 확립(確立)이다. 이것을 현대용어로 말하면 인간의 훌륭한 자기 형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떠한 자기를 형성하여야 하는가. 그 이상상(理想像)은 곧 붓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자기를 이러한 경지에까지 이르도록 할 수 있는가. 그 이론과 실천은 여러 방편(方便)으로 이 스승에 의해서 설명되었다. 더욱이 이 스승은 이미 그 이상(理想)의 인간상을 자기 한 몸에 구현(具現)하면서 “그대들도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만일 이 길을 구현(具現)하는 이론에 관해서 또는 실천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의혹이 생긴다면, 이 스승은 언제나 간곡하고 명쾌한 해답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 스승의 제자들간에 처(處)해 있었던 상황(狀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스승은 얼마 후에는 임종(臨終)의 때를 맞이하게 것이다. 그것을 생각한 아난다는, 슬픔과 함께 당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의 처소에 가서 문빗장을 잡으면서 서럽게 눈물 흘리며 울었다.
그가 황급히 스승 앞에 다가갔을 때 스승은 그를 돌아다보면서, 먼저 오랫동안 시자(侍者)로서의 노고(勞苦)를 치하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아난다여, 혹시 너희들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스승의 말씀은 이제 끝났다. 이제 이미 우리에게는 스승이 없다’라고. 그러나 아난다여, 나에 의해서 설교된 교법과 계율(戒律)은 내가 간 후에도 너희들의 스승이 되리라.”

이것도 또한 석가모니 부처님 멸후(滅後)의 불교의 모습에 관한 중대한 발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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