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타선원 주지 하림 스님·듀크대 부교수 일미 스님

1992년 동국대에서 첫 만남 가져
석림회 회장 부회장으로 맹활약  
어려웠던 서로의 어린 시절 나누며 공감 
하버드대 진학이 목표였던 일미 스님
하림 스님 적극적으로 모금 운동
대행 스님 등 사부대중의 도움 이어져
일미 스님 듀크대서 한국불교 포교
한국불교 관련 학자 배출이 ‘願’

▲ 하림 스님(사진 오른쪽)과 일미 스님은 동국대 선후배로 만나 23년 우정을 지속해 오고 있다. 일미 스님이 미국에서 유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하림 스님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었다. 또한 하림 스님이 지병으로 고생할 때 일미 스님은 미국으로 건너와 치료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버팀목이 되면서 포교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진정한 도반이다.

부산 용두산 미타선원에서는 지난 6월 ‘희망과 사랑’을 주제로 한 힐링 콘서트를 3주 동안 열었다. 콘서트의 주인공으로 초청된 일미 스님은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세계 명문대 중 하나인 듀크대에서 종교학 부교수로 재임하고 있으며 한국불교를 알리는 것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미타선원에서 일미 스님을 초대 손님으로 하는 힐링 콘서트가 열린 것은 처음이 아니다. 1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는 이 특별법석은 미타선원 주지 하림 스님과 일미 스님의 특별한 우정이 숨어있다. 일미 스님은 “하림 스님과의 인연은 저와 한국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입니다. 한국에 매년마다 오는 이유 중에 하나가 하림 스님을 뵙기 위해서죠. 하림 스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매년마다 한국에 들어와서 미타선원 법회에 참석하고 강의를 하는 이유는 포교도 목적이지만 그 다음으로는 하림 스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며 하림 스님에 대한 진한 우정을 표했다.
그렇다. 두 스님은 그렇게 각별했다. 일찍이 부처님은 수행에 있어 ‘도반이 전부’라고 강조했다. 수행과 포교에 있어 하림 스님과 일미 스님이 걸어 온 길은 ‘도반이 전부’라는 부처님 말씀이 무엇인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 일미 스님은 매년 한국을 찾아 하림 스님이 주석하는 미타선원에서 법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희망과 사랑’ 힐링 콘서트를 마치고 기념 촬영.
동국대 석림회를 이끄는 회장과 부회장으로
1992년 1학년 1학기에 군 제대를 앞두고 복학을 준비하던 일미 스님은 동국대 백상원(동국대 비구 스님 기숙사)을 찾아가 선배들에게 인사를 했다.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받아주기를 바란다며 쑥스럽게 인사를 하는 일미 스님을 보며 하림 스님은 “첫인상이 참 앳되다라고 생각했다(웃음)”며 소감을 말했다. 그렇게 스님은 제대하고 돌아올 일미 스님을 기다렸다고 했다.
복학해 학교로 돌아온 일미 스님과 함께 대중 생활이 시작되었고 백상원에서 함께 수행하며 둘은 서로를 지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1년 후 백상원 석림회를 이끌 회장을 선출하는 시기에 하림 스님이 나섰다. 부회장으로 함께 출마한 일미 스님은 하림 스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함께 생활하면서 알게 된 하림 스님은 조용하고 느린 어투로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전달하는 모습이셨습니다. 또한 감정의 흔들림 없이 뜻을 관철해 내는 점이 더욱 믿음이 갔습니다. 저 스님과 일을 하면 잘 할 수 있겠다 싶었죠.”


1993년, 회장에 하림 스님이 당선되면서 두 사람은 백상원 스님들의 모임인 석림회를 이끌 주역이 되었다. 함께 일하며 서로의 생각을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정도로 서로가 잘 통했다고 한다. 무엇을 주장하든 무엇을 진행하든 그 중심에 ‘부처님 뜻’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두 사람 다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서로를 신뢰하기 시작했다.
일미 스님은 최선을 다해 공부를 했다. 그런 스님을 지켜보며 하림 스님은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스님들이 공부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눈에 많이 띄었죠. 왜 저렇게 열심히 하나 싶었어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하버드에 갈 거라고 하군요. 그게 말이 되나 싶었습니다.” 하림 스님은 일미 스님의 꿈을 듣고는 의아해했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고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매일 같이 노력하는 일미 스님을 보며 하림 스님의 생각도 바뀌었다고 한다. “새벽에 함께 예불을 드리고 나면 어김없이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대중공사에 빠지거나 여타의 일을 소홀히 하는 모습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차츰 일미 스님의 꿈에 대한 믿음이 생겼죠.”


1994년 종단 개혁 당시 하림 스님과 일미 스님은 매일 같이 조계사를 찾아갔다. 종단 개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그 시대를 도반들과 함께 하고 개혁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용역들이 조계사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김없이 저희 석림회 스님들은 달려갔습니다. 밤을 함께 지새우며 함께 어려운 시간을 견뎌냈죠. 하지만 처음과는 달리 많은 대중들이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조계사에서 새벽을 맞으며 끝까지 함께했습니다.” 
종단 개혁 후, 스님들은 당시 각 대학에 법사단을 파견하고 법사 스님들을 위한 지원금도 마련했고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기숙사 혜광사 개원도 추진했다. “종단 개혁이 끝나고 그 때 당시 총무원장이셨던 탄성 스님께서 저희를 부르셨어요. 그리고 혹시 필요한 것이 있느냐 하셔서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비구니 스님들을 위한 기숙사를 부탁드렸습니다. 그 때 비구니 스님들은 기숙사가 없어 자주 이사를 다녀야 했습니다. 20년 동안 미뤄졌던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 처소가 마련된 거죠.”


또한 두 스님이 이끌던 석림회 집행부는 법사 스님들을 위한 지원금 마련을 위한 일일 찻집 및 모금운동 등 동국대 스님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특히 석림회 집행부 구성에 있어 승납이 적고 어려도 능력이 있는 인재를 발탁해 파격적인 인사도 진행했다. 그야말로 개혁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파격적인 행보를 자랑했다.
어린시절의 기억 나누며 도반으로 
두 스님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불법 인연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각자의 사연에 대해 들은 두 사람은 서로를 더 깊게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일미 스님은 어린 시절 알콜중독자였던 아버지 아래서 자라며 폭력과 폭언으로 큰 상처를 받았다. 스님이셨던 삼촌을 통해 은사 스님인 시몽 스님을 만나며 참된 아버지 상을 발견하고 15세의 나이로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또한 하림 스님의 가족들은 가난 때문에 머물 곳이 없어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빈집과 마을회관에서 잠을 청하며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가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했던 아버님의 힘으로 집과 밭을 사고 행복을 꿈꿀 수 있었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6개월 간격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고 절에 보내졌다.  
일미 스님은 ‘하림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의 사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주는 도반을 통해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했고 존재만으로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함께 마음을 나누며 응원하던 스님들에게 곧 졸업이 다가왔다. 일미 스님은 그동안 생각했던 미국 유학을 준비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차선책으로 학비가 전혀 들지 않는다는 독일을 선택하고 떠날 준비를 했지만 전혀 자금이 없었다. 일미 스님은 하림 스님에게 사정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하림 스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모든 사비를 투자하고도 비용이 여의치 않자 하림 스님은 편지를 써서 모금 운동을 시작해 600만원의 종잣돈을 마련했다. 하지만 1997년 한국에 외환 위기가 닥치면서 환율의 가치가 떨어졌고 그 돈으로 독일 생활을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일미 스님은 계획을 중단하고 선배인 뉴욕 불광선원의 휘광 스님을 인사차 방문했다가 스님의 권유로 절에 머물며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콜롬비아대, 예일대, 하버드대에서 모두 합격 통지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학비가 문제였다. 입학금은 물론이고 앞으로 매달 학비와 생활비가 필요했다. 이번에도 하림 스님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걱정하지 마라”였다. 먼저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하림 스님과 일미 스님은 큰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구했다. 여러 대덕 스님들의 정성이 모여지기 시작했다. 그중에 한분이 바로 한마음선원 선원장 대행 큰스님이었다. “대행 스님은 어제 마침 브라질서 온 신도가 두고 간 1만 불이 있다며 장학금으로 쓰라며 봉투채로 내어주셨죠.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후 수원 포교당의 성관 스님  등 많은 스님들의 지원이 이어졌습니다.” 또, 스님들과 재가자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하림 스님의 이야기에 많은 도반 스님들은 후원을 자처하며 장학회를 설립했다. 그렇게 설립된 장학회는 일미 스님의 석사 3년 동안 정기적으로 후원했다. 


하림 스님은 “주변 스님들에게 석사 3년만 도와주자고 설득을 했죠. 꿈을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보여준 일미 스님을 봤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고 또 도반들과 재가자들도 모두 응해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일미 스님은 “하림 스님에게 무엇을 말하기가 조심스러웠어요. 조금이라도 어려운 사정을 비치면 돌아오는 대답이 ‘걱정하지마라’였고 늘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저를 믿어 주신 많은 비구니, 비구 스님들께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 2000년 하버드대 신학대학원 학생들과 뉴욕 불광선원 방문. 맨 오른쪽이 일미 스님, 뒷줄 왼쪽 끝이 하림 스님.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꿈꾸다
하림 스님을 비롯한 다른 도반들도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미 스님이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열심히 공부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일미 스님은 하림 스님의 건강이 악화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척추가 굳었고 서서히 온 몸이 뻣뻣해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잠을 못자는 날이 부지기수였고 일어날 수도 앉을 수도 없는 고통이 온몸을 덮쳤다.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했지만 병명을 찾을 수 없었기에 치료에 진척이 없었다. 1998년 종단 일에 노력을 기울이며 쉬지 못한 탓도 있었다. 결국 쓰러지기까지 한 하림 스님을 일미 스님은 당장 뉴욕 불광선원으로 불렀다.
스님을 쉴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일을 멈추고 건강을 추스를 수 있도록 일미 스님은 도왔다. 특히 뉴욕 불광선원에서 만난 전문의를 통해 강직성척추염이라는 병명을 알게 되었다.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병이라 완치는 없지만 지금은 통증도 없고 활동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뉴욕에서 만난 의사가 한국의 전문의를 소개시켜줘서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었죠. 운동을 하고 몸을 부드럽게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꾸준히 운동을 쉬지 않고 있습니다.” 


2년의 시간이 흐른 후 점차 고통이 가라앉으며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하림 스님은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한 노보살님의 얘기를 듣고 다시 미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미국 한인  90%가 교회를 다니고 있고, 노보살님 역시 불자임에도 한국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교회를 가야만 한다며 우시더군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미국 내에 한국불교의 존재감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2년을 더 머물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는 요양이 아니라 한국불교 포교를 위해서였지요.”
하림 스님은 도반 스님들께 조직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뉴욕에 있는 조계종 스님들은 흔쾌히 뜻을 모았다. 그리고 2003년 ‘뉴욕조계종사암연합회’가 탄생했다. “미국 내에 스님들은 사암연합회를 구성하고 사무실도 내고 정식으로 직원도 구하고 포교를 위해 체계적인 기반을 다졌죠. 그렇게 2년을 더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림 스님은 귀국 후에도 한국불교를 알리기 위한 포교잡지 ‘클리어마인드(Clear Mind)’를 제작하는 등 한국불교 세계화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한국으로 돌아온 하림 스님은 미타선원 주지를 비롯해 조계종부산연합회 교육원장, 영도문화재단 이사장이자 전법도량 의장을 맡으며 포교 일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하림 스님과 일미 스님은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두 가지를 언급했다. 하나는 인재 양성이며 또 다른 하나는 미국 내 한국과 미국불자들을 위한 센터를 세우는 것이다. 하림 스님은 “듀크대가 있는 지역이 미국 내에서 박사를 받은 인구가 가장 많은 곳 중에 하나이기에 한국불교를 학문적, 종교적으로 알릴 수 있는 포교의 포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일미 스님은 “미국에서 학생들이 불교를 접하는 시기가 20대인데 대부분 대학에 와서 종교과목을 들으면서 불교를 경험하게 되죠. 동서양 문화적 차이는 물론 동양을 이해하는 매개체로 불교를 필수적으로 연구해야합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를 세계화하고 알릴 수 있는 좋은 방법으로 대학에서 불교 전공자를 많이 키우고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죠.”라며 계획을 밝혔다. 


하림 스님은 “앞으로 5년 혹은 10년 내에 일미 스님의 원력으로 미국 학계에서 뛰어난 한국불교학자들이 배출 될 것입니다. 때문에 일미 스님 같은 인재가 필요한 거죠.”라며 한국불교 세계화의 밝은 미래를 예측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또 다른 뒷받침이 필요하기도 하다. 일미 스님은 “현재 듀크대는 불교공동체가 활동할 장소가 없어 학교 내에 있는 다문화센터를 빌려 사용하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고 적극적인 지도를 하고 있지만 앞으로 제대로 된 기반이 갖추어질 필요가 있다”고 입장을 설명했다. 
하림 스님과 일미 스님이 걸어가는 길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둘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법이 주는 행복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원력이다. 두 스님이 꿈꾸는 그 불국토의 세상이 온 누리에 가득하길 응원한다. 
 

 

▲ 하림 스님은 1986년 쌍계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96년 비구계를 받았다. 동국대에서 선학을 전공하고 이어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수학했다. 이후 부산 미타선원에서 주지로 활동하며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명상심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조계종부산연합회 교육원장, 영도문화재단 이사장이자 전법도량 의장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하림이에요〉 〈두번째 프로포즈〉 〈Why 하림〉 등이 있다.

 

▲ 일미 스님은 15세에 출가해 1996년 동국대에서 ‘동아시아 불교와 유식 철학’으로 학사, 2002년 미국 하버드 디비니티 스쿨(신학대학원)에서 ‘불교와 사회학과 종교 이론’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 하버드대에서 ‘한일 불교 관계사’를 주제로 박사학위, 2007년 하버드 라이샤워 연구소에서 박사후 연구원 역임, 2008년 미국 아리조나 대학교 조교수, 2009년부터 미국 듀크대 종교학과 조교수, 2015년 5월 미국 듀크대 종교학과 부교수로 임명됐다. 저서로는 〈다르마의 제국-한국 불교와 일본 불교 1877~191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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