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TV만화 ‘마샤와 곰’

서로가 외로움을 달래주는 존재
어머니의 자비가 느껴지는 스토리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애니메이션
러시아 초원의 동심(童心)으로의 초대

▲ 최근 EBS에서 방영 중인 ‘마샤와 곰’은 재미도 있거니와 따뜻한 정조를 지니고 있어서 온 가족이 함께 봐도 좋은 애니메이션이다.
네 살의 아들을 둔 필자는 원하지 않아도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봐야 한다.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동화적 상상력과 소설적 상상력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동화적 상상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의인화이다. 그리고 이 의인화에는 동물은 물론이고 무정물(無情物)도 대상이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동심을 잃는다. 그 시점은 아마도 논리적 혹은 합리적 사고가 싹트면서부터일 것이다. 그런데 사고를 전환하면 자로 잰 것처럼 완벽해 보이는 이성적 사고란 것도 그야말로 인간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린네의 명명법을 들 수 있다. 과연, ‘종-속-과-목-강-문-계’로 나눠지는 이 명명법을 인간이 아닌 다른 자연 구성원들은 알고 있을까? 바꿔 말해서 이성적 혹은 합리적 사고는 자연의 도구화에 지나지 않다.


최근 EBS에서 방영 중인 ‘마샤와 곰’은 재미도 있거니와 따뜻한 정조를 지니고 있어서 온 가족이 함께 봐도 좋은 애니메이션이다.
‘마샤와 곰’은 러시아 애니메이션이다. 마샤는 마리아의 애칭이라고 한다. 이 애니메이션의 원작은 러시아 동화이다. 원작동화와 애니메이션은 줄거리가 조금 다르다. 먼저, 원작동화 내용부터 살펴보자.
마샤는 부모 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라고 있었다. 마샤는 버섯과 산딸기를 따러 숲에 갔다가 그만 길을 잃었다. 숲속을 헤매다가 마샤는 오두막집을 발견한다. 오두막집에 들어갔으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오두막집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곰이었다. 곰은 마샤에게 온갖 허드렛일을 시킨다. 이튿날 마샤가 집을 빠져나가려고 하자 곰이 불같이 화를 낸다. 마샤는 곰에게 말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튀김을 전해주고 싶어.”
곰이 대답한다.
“안 돼. 너 대신 내가 튀김을 갖다 주고 올 게.”


마샤는 튀김이 든 바구니에 몰래 숨는다. 그 사실도 모르고 곰은 마샤의 집으로 향한다. 마을에 다다르자 튀김 냄새를 맡은 개들이 몰려든다. 달려드는 개들을 보고 곰은 어쩌지 못하고 도망을 친다. 마샤는 바구니에서 나와 곧장 집으로 달려간다. 버려진 아이라는 점에서 원작 동화는 <헨젤과 그레텔>을 떠올리게 한다.
그로테스크한 원작동화와 달리 애니메이션은 시종일관 따뜻한 정조를 유지한다. 줄거리도 다르다. 원작과 달리 애니메이션의 곰은 착하다. 서커스단 출신의 곰에게 어느 날 천진난만한 말썽꾸러기 마샤가 찾아온다. 애니메이션에서도 마샤는 돌보는 가족이 없는 외로운 아이이다. 마샤는 곰의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일쑤이다. 그런데도 곰은 마샤를 혼내지 않고 돌본다. 하루는 늑대들이 마샤를 유괴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늑대들은 먹을 것을 가져오지 않으면 마샤를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협박한다. 물론, 곰은 뛸 듯이 기뻐한다. 마샤는 늑대들과 병원놀이를 한다. 병원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늑대들은 마샤에게 혼쭐이 난다. 결국 늑대들이 외려 먹을 것을 들고 곰에게 찾아온다. 다시 마샤를 받아달라는 것이다.


또 하루는 곰이 마샤를 위해 드레스를 만들어준다. 마샤는 그 드레스를 금세 더럽힌다. 곰은 그 드레스를 세탁한 뒤 다른 드레스를 만들어준다. 그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애니메이션이 끝날 무렵 어쩌면 마샤는 더 많은 옷을 갖고 싶어서 옷을 더렵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마샤와 곰은 서로 외로움을 달래주는 관계인 것이다. (곰은 옛 영화의 회한에 젖어서 사는 러시아 남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실제로 러시아는 한 때 양극체제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강대국이었다.)
마샤와 곰은 시린 가슴을 안고 사는 어린 소녀와 곰이 친구가 되어서 따듯한 정을 나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황금률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황금률이란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하라’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그 황금율의 대상이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자구성원까지 포함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자비(慈悲)의 차이도 바로 이 지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숨을 탄 존재들을 한없이 가여워하는 마음, 그것이 자비인지도. 그러고 보면, 자비란 사랑과 슬픔이 합쳐진 단어가 아닌가?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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