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학 스님에게 듣는 禪으로 본 남종화

◀원학 스님이 직접 꼽은 대표작 閑山閑水 한산한수 必自有意 필자유의 한가로운 산빛 물빛이여 그 속에 깊은 뜻이 있겠지


그림 속에 극락ㆍ사바세계가

더러움과 깨끗함의 조화 추구
일엽편주의 사공은 우리네 닮아
아침 일출과 함께 그림에 집중
자연과 함께 물아일체됨을 느껴


남종화의 문인정신 지키기

의재·우계 선생의 남종화맥 이어
심상을 직관으로 단박에 표현
간화선 수행과도 맞 닿아 있어
서예교실 등에서 재능 기부


국내 남종화(南宗畵)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삼이당 원학 스님(봉은사 주지)이 6월 17~23일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7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원학 스님은 이번 전시회에서 산수화와 사군자, 서예 등 작품 72점을 선보였다. 수년 전부터 작업 중에 모아둔 소품들로, 봉은사 다래헌에서 지난 겨우내 정성을 쏟아 완성했다. 6월 22일 전시장 아라아트센터에서 스님을 만나 남종선과 남종화 등 禪으로 본 남종화에 대해 말씀을 들었다.

6월 22일 개인전 전시장에서 만난 원학 스님이 남종화와 선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예를 하는 스님들은 많지만 산수화에 조예가 깊은 스님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남종화의 세계에 입문하셨습니까.
초등학교 때 붓을 들었지만 그림은 20세 때 입문했습니다. 출가해서는 줄곧 사경을 통해 혼자 글씨를 익혔습니다. 해인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정할 무렵 노스님께서 손상좌가 서예에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청남 오제봉 선생의 문하에 들어갈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청남 오제봉 선생은 영남서예의 대가로 부산에 계셨습니다. 범어사 강사를 하며 대신동 청남 선생의 집까지 버스를 3번 갈아타기도 하면서 글을 배웠습니다. 때로는 밤이 늦어 팔송에서 범어사까지 십리길을 걷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10년을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청남 선생 문하에서는 그림보다 선비정신과 아름다움,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인품을 더 배웠죠.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이 있습니다. ‘가장 더러운 것인 먹을, 가장 깨끗한 화선지에 올리는 것. 이를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서예’라구요. 수행자가 극락과 사바세계의 조화를 이루는 것과도 같습니다.
청남 오제봉 선생은 의재 허백련 선생, 효당 최범술 선생과 서로 의형제를 맺고 자주 왕래하며 풍류를 즐기던 사이였습니다. 특히 청남 선생의 서가에 의재 선생의 그림이 한 폭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 매료돼 그날 이후 남종화에 천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남종화를 어떻게 익히셨습니까.
남종화는 처음부터 산수화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글씨와 십군자, 화조를 그려내야 산수화를 가르칩니다. 대구에서 의재 선생에게 십군자를 사사받은 목산 라지강 선생에게 십군자를 배웠습니다. 서울 낙원동에서는 우계 선생을 만나 산수화를 모두 배웠죠. 의재 선생의 타계로 직접 사사하지 못한 점이 안타깝습니다.
남종화는 당나라 선종이 남북으로 나뉜 것에 착안해 명 말기에 중국 산수화를 남북 2종으로 구분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당나라 문인화가 왕유를 시조로 삼는데 추사 김정희가 중국에서 배워와 소치 허련, 남농 허건, 의재 허백련으로 이어지며 호남지방에서 맥을 이어왔습니다.

남종화와 남종선의 수행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요. 스님은 남종화를 통해 어떤 수행을 해오셨는지요.
중국 불교 선(禪)의 황금시대인 6~8세기 돈오돈수의 남종선과 돈오점수의 북종선이 나타납니다. 6조 혜능 스님의 남종선이 한국에 전래된 이후 간화선으로 정착됐습니다.
담박에 깨치는 돈오의 남종선과 가슴에 담아둔 것을 어느 한 순간에 그림으로 펼쳐내는 남화선은 그래서 닮았습니다. 남종화는 이 때문에 많은 수행이 함께 필요합니다.
북종화가 정형화되고 사실적이며, 논리적인 기법을 동원하는데 비해, 남종화는 마음에 담아놓은 심상을 문득 표현하는 것입니다. 직관력이 중요하죠. 자신과 자연이 합일된 순간 희열감을 느낄 때 붓을 들고 표현하는 것으로 간화선과 유사한 맥락입니다.
남종화는 그래서 자기수양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마음을 닦는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닌 마음을 닦는 수행의 방편으로 여겼습니다.
이번 그림 전시를 통해 스스로 수행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또 그림에 대한 자신감도 높아졌습니다. 새로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죠. 새벽에 일어나 6시부터 10시까지 해가 뜸과 동시에 기운의 상동함을 느끼며 그림을 그립니다. 이렇게 집중하니 금강경 사경 병풍도 원래는 2개월이 걸리는 데 20여일 만에 두 작품을 완성할 정도였습니다. 수행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봉은사 다래헌에서의 원학 스님
스님께서는 종단일로 어려우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림수행이 힘이 되셨는지요?
1998년 종단사태때는 제주도에 내려가 6년간 있었습니다. 제주도는 추사의 유배지이기도 하죠. 초의 스님과의 교분이 있는 관계로 그 인연으로 〈동다송〉에 대한 집필을 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주민들을 위한 ‘청묵예원’을 설립하고 묵향에 파묻혔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지필묵을 가까이 하겠다고 다짐했죠.
간혹 주변에서는 왜 남종화라는 시대에 맞지 않는 그림을 그리느냐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작가도 아니며, 제 그림의 목적은 수행이기 때문이지요.
봉은사 다래헌에서 겨우내 붓을 들고 정성을 쏟아부어 작품을 완성했지만 시간에 쫓기어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나의 온 정성을 쏟아 부어 완성한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운 정경들을 내 심성의 깊이에서 필묵을 통해 표현해 내고자 노력하다보면 어느새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듯 몰입이 됩니다. 또한 작업 내내 남종화의 사의적(寫意的) 직관력을 잃지 않으려고 초지일관 기본정신에 충실했습니다.

대중들에게 스님의 수행과 예능을 어떤 방식으로 회향하시는지요.
현재 서울 역삼청소년수련관에서 틈틈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서예와 그림을 가르치는 재능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남종화에 관심을 갖는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지요. 젊은 사람들은 외형의 화려함에 치중해 있습니다. 검소하고 깨끗함을 추구하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남종화의 문인정신을 지켜 나가는 일은 더욱 어렵고 험난한 일이며 고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 무엇이라 하든 언제나 무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자연의 아름답고 순수한 정경들을 마음속에 담아내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행과 문인화의 기본정신에 충실해 살아 숨쉬는 남종화 전통을 지켜 가겠습니다.

스님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스님의 작품 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고음부의 산봉우리와 저음부에 위치한 사람의 마을, 환(幻)과 진(眞) 사이를 떠도는 여백, 그 가운데 조용히 노를 젓는 사공의 모습이 그림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스님의 그림 속 사공이 노를 젓는 것처럼 우리들 삶도 진속을 떠돈다. 스님의 남종화는 묘경을 통해 불교의 깨달음을 맛보게 하는 일대 향연이다.
 


원학 스님은
경북 경산의 경주 김씨 집안에서 출생해 열여섯 살 때 도성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한 원학 스님은 해인승가대학 12기로, ‘해인승가대학 승가상’을 수상했고, 해인승가대학 총동문회장을 역임했다.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조계종 총무원 총무부장, 문화부장, 중앙종회 사무처장, 제10·11·12·15대 중앙종회 의원, 서울 조계사, 봉국사, 진주 연화사, 대구 용연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2009년 총무원 총무부장으로 일할 때 스스로 지은 ‘삼이’란 호는 ‘총무원 소임은 봉사하는 자리이며 대중들을 위해 항상 귀를 밝게 하겠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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