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 스님

▲ 스님의 눈은 빛이 난다. 총기가 느껴진다. 검고 굵은 뿔테 안경은 이런 지적 풍모를 돋보이게 했다. 일타 큰스님 진영, 170X124cm, 종이에 수묵 채색, 2003년, 해인사 지족암 소장
나는 스님의 마지막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은 바람이 많이도 불었다. 만장을 든 스님과 보살들이 무던히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바람이 만장을 하늘로 치켜 올렸고 올라간 만장은 한량없는 곡선을 반복하며 무한대로 증폭시켰다. 긴 폭의 만장이 만들어내는 곡선은 바람의 섬세한 빗질이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이었다. 천의가 움직이며 스님의 마지막 길을 지키는 비천의 현현한 모습과 방불했다. 바람결에 옆으로 누운 대나무는 사선을 이루며 우열을 경쟁하듯 하였고 대나무에 붙어있는 일부의 만장은 타원형으로 부풀어 올라 바람을 거스르며 상승 곡선을 만들었다. 그날 다비장 풍경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특별함이었다. 스님은 마지막 가실 때에도 오색찬란한 색깔로 허공에 춤을 추었고 바람 소리로 순간을 가르며 법문을 하셨다. 그 모습은 평소 스님의 모습 그대로였다. 은해사에서 본 마지막 스님의 이미지는 꽤나 오랫동안 뇌리에 박혔고 지금도 일타라는 단어만 보아도 다비장 가는 길에서 보았던 하늘의 춤이 각인되어있다. 일타 스님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나는 솔직히 일타 스님을 잘 모른다. 어깨 너머로 밖에 보질 못했다. 그래서 지족암 향적 스님으로부터 일타 스님의 진영을 의뢰 받았을 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동곡 일타 큰스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스님의 전체적인 인상은 자비롭고 인자하다. 꼭 이웃집 할아버지와 같이 친근하며 후덕하다.

스님의 얼굴은 곱고 덕이 많은 형상이다. 얼굴 전체에는 선한 기운이 어려 있다. 이러한 자태는 고뇌에 찬 인간들의 영혼을 불러 세우는 흡입력을 가진다. 스님에게 인간으로서 지닌 개인적인 고민을 이야기하면 꼭 해결해 줄 것 같은 느낌이다. 스님에 대한 흠모는 스님들 사이에서 더 대단했다. 해인사 출신 다른 문중의 스님들을 통해 해인사 생활을 하면서 믿고 따르고 싶은 스님으로 일타 스님을 거론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스님의 음성은 우렁찼다. 때문에 사람을 설복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달변가였고 탁월한 포교사였다. 나는 그것이 스님의 장점이고 존재 가치이며 중요한 경쟁력이라 생각한다.

스님의 법문은 감정 전달이 탁월했다. 법문을 듣고 많은 이들이 따랐다는 사실은 단지 스님의 혀가 코끝에 닿을 정도로 길고 유연하다는 신체적 조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만큼 스님의 법문은 스님만의 해석이 있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힘과 생명력이 넘쳤다.

스님의 눈은 빛이 난다. 총기가 느껴진다. 검고 굵은 뿔테 안경은 이런 지적 풍모를 돋보이게 했다. 스님의 생각은 창의적이었다. 항상 생기가 넘쳤으며 재주가 비상하고 발랄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심과 지적 호기심은 스님의 삶을 하나로 관류하고 있는 정서일 것이다.

스님은 남성다운 호기와 기백이 있다. 원기가 왕성하여 에너지가 넘쳐흐른다. 스님의 넓은 가슴에는 털이 무성하다. 사진에 보이는 스님의 모습에서 웃옷을 벗고 상체를 드러내는 경우를 다수 볼 수 있다. 이는 격식을 초월한 인간적 풍모로 보였다. 그러면서 자유인으로서 낭만과 자신감의 충만으로 이해되었다. 스님은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했다. 글씨를 보면 고구마 뿌리가 연상 될 정도로 굵고 가는 것의 대비가 심했고 공간과 포치가 현란했다. 멋과 아취를 누리며 즐길 줄 아는 분이었다.

스님은 변화된 현실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실천적 삶을 살았다. 그것은 모험심의 한 형태일 것이다. 한 예로 운전을 하는 이가 많지 않았던 시절, 손수 운전을 하고 다니며 해인사를 오르내렸다.

스님은 불교 정신과 불교문화 원형에 선구적인 혜안을 가졌다. 불교의 원천을 탐구하기 위해 남방불교 연구는 물론 중국 불교문화까지 관심을 가졌고 급기야 미국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해외 포교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스님은 오른손 손가락 4개 12마디를 연비하였다. 나는 스님의 손을 볼 때마다 혜가의 구도 행위가 생각이 났다. 아니 혜가보다 더한 자기 향상과 성찰을 생각했다. 손에 작은 가시만 박혀도 온몸을 꼼짝 못하게 들어 올리는데 스님은 자신의 살과 뼈가 타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며 자신의 불교적 삶을 확인했다. 연비는 자기 확신과 의지는 물론 구도를 향한 무서운 집념의 상징이다. 그리고 처절한 절박감의 표출이고 자아 의지의 확신이다. 스님께서 큰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런 자신감의 충일과 당당함에 기초했다고 본다.

스님은 출가 자체가 세계불교사에 기록될 만큼 독특하다. 한 집안에서 친가 외가는 물론 집 안 밖 일을 돕는 사람까지 집안 전체인 41명이 출가하여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는 것은 시공을 넘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특히 일타 스님과 관련지어 스님의 어머니께서 경험한 인연의 법은 스님을 출가자의 한 사람으로만 보기 어렵게 만든다. 스님의 어머니께서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도중 닭다리를 부러뜨렸던 일화와 이사 갈 때 소가 끄는 마차 바퀴에 깔려 자신의 다리가 부러진 사연 그리고 그 순간에 “자신의 눈앞에 닭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가더라”며 함박 환희심으로 가득했다는 이야기는 불교의 인과 법칙에 대해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일타 스님을 떠 올릴 때 스님의 어머니를 추상하게 되는 것은 어머니의 불심이 오늘의 일타 스님을 만든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렇다.

 이상은 스님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느낌이다. 그것은 옳은지 그른지의 문제가 아니라 화가로서 경험한 감성임을 고백한다. 나는 이런 생각들을 정리하여 스님의 진영을 그렸다. 완성된 진영은 지관 스님의 화상찬을 덧붙여 해인사 지족암에 모셔있다. 나는 가끔 소리 없이 지족암에 들러 스님의 초상 앞에 향을 사른다.

▲ 달마, 일타 스님의 구도정신을 파초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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