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청석탑과 전탑

청석탑, 지방호족 중심 건립 특징
10여기 크고 작은 청석탑 현존

전탑, 화감암·벽돌 혼용 사용 특징
현존 탑은 소량, 안동지역에 많아

▲ 사진1. 원당암 청석탑
〈청석탑〉
불탑을 조성할 때는 매우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벽돌을 이용한 전탑, 나무를 사용한 목탑, 석재를 활용한 석탑 이 외에도 옥탑(玉塔), 수마노탑(水瑪瑠塔), 금탑(金塔), 은탑(銀塔), 칠보탑, 사탑(沙塔), 니탑(泥塔), 토탑(土塔), 분탑(糞塔), 철탑(鐵塔), 동탑(銅塔), 수정탑(水晶塔), 유리탑(琉璃塔), 향탑(香塔)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석탑이 가장 많이 조성되어 ‘석탑의 나라’ 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다. 이러한 석탑을 조성할 때에는 크게 세 종류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화강석과 대리석, 그리고 청석이다. 청석이란 흑청색의 빛깔을 띠는 점판암(粘板岩)을 말한다. 이러한 청석은 재질이 물러서 섬세한 조각이 가능하기 때문에 비석이나 벼루로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또한 통일신라 말부터는 불탑의 재료로 이용되어 청석탑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불교문화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다. 흔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전역에서 청석이 채굴되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유행처럼 전국 각지에서 청석탑이 조성되었다.

청석은 화강암과 비교하여 표면이 아름답고, 가공이 용이하며, 섬세한 조각이 가능하고, 조탑 과정에서도 시간과 비용이 절약되기 때문에 불탑재료로 선택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청석의 재질 특성상 대규모의 불탑조성은 불가능하지만 9층, 11층, 13층의 다층으로 쉽게 구성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더구나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조탑 불사와는 별도로, 왕도인 개성을 벗어나 지방 각지에서 불심 깊은 호족들의 원력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불탑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청석탑의 유행을 더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10여기의 크고 작은 청석탑〈표1〉이 현존하고 있다.

▲ 사진2. 염불암 청석탑 (2)
이 중 법보사찰인 해인사 경내 원당암에 있는 청석탑〈사진1〉을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 청석탑은 4각3단으로 구성된 화강암의 지대석 위, 연화무늬가 조각 된 대좌형식의 기단 위에 1층 탑신이 청석으로 이루어졌다. 탑신 위로는 10장의 청석 지붕돌이 일정한 체감율을 보이고 있고, 네 모서리에는 추녀를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또, 풍탁을 매달은 구멍이 있으며 탑상부에는 노반석과 복발을 한 개의 석재로 마감하였다. 이 탑의 조성 연대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보다 약간 후대인 10세기 중반에 조성된 염불암 청석탑〈사진2〉은 현재 화강암의 지대석과 청석의 지붕돌만 남아 있다. 충주의 창룡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구전되는 사찰로 현재 대웅전 앞뜰에 7층의 지붕돌만 남아 있는 청석탑〈사진3〉이 있다. 주목되는 점은 12엽의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1층 지붕돌의 모습이다.

▲ 사진2-1. 원주 보문사 청석탑
김제 금산사 대적광전 앞에는 보물 제27호인 6각다층의 청석탑〈사진4〉이 있다. 현존하는 청석탑 중 유일하게 6각의 형식으로 조성된 희귀한 불탑이다. 본래는 혜덕왕사가 1079년(문종33)봉천원구를 창건하면서 조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유재란 때 봉천원구가 소실되자 수문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원래 12층으로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11층만 남아 있으며, 총 높이는 2.18m로 각 층의 체감비례가 안정적이다. 청석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공예적인 면을 잘 드러내, 화려한 고려시대의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는 불탑이다.

▲ 사진3. 창룡사 청석탑

▲ 사진4. 금산사청석탑
〈전탑〉
전탑(塼塔)이란 벽돌을 재료로 하여 조성된 불탑을 말한다. 벽돌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인공건축자재로 신석기 시대인 약 8,000년 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메스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이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짓기 시작하였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로부터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벽돌은 내구성과 안정성이 석재(石材)와 비슷하고 무게가 돌 보다 가벼우면서도 다양한 양식을 표현할 수 있고, 조각도 가능하기 때문에 특히 중국에서는 많은 전탑이 조성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유사〉 권4. 양지 사석조에 의하면,

‘영묘사의 장육삼존 천왕상과 전탑을 덮은 기와, 천왕사탑의 팔부신장,,,(중략),,,또한 일찍이 벽돌을 새겨 조그마한 탑을 만들고 아울러 불상 3천여 개를 만들어 그 탑에 봉안하여 절 안에 두고 예배했다.’

▲ 사진5. 법흥사7층전탑
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적어도 사천왕사가 세워진 679년 이전인 삼국시대에 전탑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전탑조성 역사는 유구함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전탑은 소량으로 국한 되어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있다. 문헌상의 기록이나, 전탑이 있었던 탑지의 발굴에 의하면 전탑을 조성하는 것은 결코 희소한 불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주의 덕동사지전탑, 인왕동전탑, 석장사지전탑, 삼랑사지전탑과 울산 농소읍전탑, 청도 불영사전탑, 운문사전탑, 대구 송림사전탑, 등 많은 전탑이 조성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현재는 안동지역에 3기의 전탑이 위용을 보이고 있다. 그 중 국보 제16호인 법흥사 7층전탑〈사진5〉은 높이 17m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어 현존하는 전탑 중 최고와 최대를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법흥사는 폐사되고 현재는 탑만 남아있다. 더구나 탑의 양쪽으로는 안동댐 하류의 강변을 따라 지나는 중앙선 철로와 ‘고성이씨 탑동종택’이 탑의 기단부와 거의 맞대고 있기 때문에 겨우 사람이 걸어서 지나갈 공간만 있다.

이곳의 중앙선 철로는 일제강점기에 놓인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철로 위로 기차가 달리고 있다. 이렇게 기차가 지날 때마다 생기는 진동과 소음 때문에 탑은 조금씩 붕괴되고 있어, 우리 손으로 문화재를 지켜내지 못하는 그 슬픔을 감수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또한 문헌에 의하면 원래 탑상부에는 화려한 금동장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사진6, 법림사5층전탑
법림사 5층전탑〈사진6〉은 현재 안동역 구내에 위치하고 있다. 보물 제 56호인 이 탑은 ‘동부동 5층전탑’으로 불리고 있다. 〈동국여지승람〉과 〈영가지(永嘉誌)〉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탑 부근에 법림사(法林寺)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5층전탑과 당간지주만 남아 있으며, 원래 정상에는 금동상륜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에 의해 철거되었다. 또, 층수도 7층까지 있었으나 역시 임진왜란 때인 1598년(선조 31)에 붕괴된 것을 5층으로 개축하였다. 탑의 기단부는 3단으로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1층 탑신 남면에 감실(龕室)을 설치하였으며 2층 탑신 남쪽면에는 두 구(軀)의 인왕상(仁王像)을 조각한 화강암 판석이 끼워져 있다.

보물 제57호인 안동 조탑동 5층전탑〈사진7〉은 수년전만 해도 사과 과수원 경작지로 심하게 황폐화된 상태에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이 탑은 높이 8.65m로, 토축기단(土築基壇) 위에 5단의 화강석 지대가 있고, 1층 옥신은 크기가 똑같지 않은 화강암 석재를 5∼6단으로 쌓았으며, 그 남쪽에는 직사각형의 감실을 만들고 그 좌우에는 인왕상이 조각하였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화강암과 벽돌을 혼용하여 조성했다는 점이다.

▲ 사진7. 조탑동5층전탑, 1910년대, 조선고적도보
서 말했듯이 우리나라에는 석탑의 수가 매우 많고, 그 중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탑이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청석, 벽돌 등 다양한 재료를 그 특징과 재질에 맞게 활용해 조성한 불탑이 무수히 많다. 지금은 본래의 형태가 모두 보전되지 못한 탑이 많아 아쉬움이 남지만, 청석탑과 전탑 등 다채로운 모습의 불탑들이 이어온 유구한 역사만큼은 그대로이다. 당대 선조들의 깊은 불심과 예술정신 뿐 아니라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불탑을 통해,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지닌 우수함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저작권자 © 현대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