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청석탑과 전탑
청석탑, 지방호족 중심 건립 특징
10여기 크고 작은 청석탑 현존
전탑, 화감암·벽돌 혼용 사용 특징
현존 탑은 소량, 안동지역에 많아
불탑을 조성할 때는 매우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었다. 벽돌을 이용한 전탑, 나무를 사용한 목탑, 석재를 활용한 석탑 이 외에도 옥탑(玉塔), 수마노탑(水瑪瑠塔), 금탑(金塔), 은탑(銀塔), 칠보탑, 사탑(沙塔), 니탑(泥塔), 토탑(土塔), 분탑(糞塔), 철탑(鐵塔), 동탑(銅塔), 수정탑(水晶塔), 유리탑(琉璃塔), 향탑(香塔)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석탑이 가장 많이 조성되어 ‘석탑의 나라’ 라는 별칭이 붙기도 한다. 이러한 석탑을 조성할 때에는 크게 세 종류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화강석과 대리석, 그리고 청석이다. 청석이란 흑청색의 빛깔을 띠는 점판암(粘板岩)을 말한다. 이러한 청석은 재질이 물러서 섬세한 조각이 가능하기 때문에 비석이나 벼루로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 또한 통일신라 말부터는 불탑의 재료로 이용되어 청석탑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불교문화를 이루어 내기도 하였다. 흔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전역에서 청석이 채굴되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유행처럼 전국 각지에서 청석탑이 조성되었다.
청석은 화강암과 비교하여 표면이 아름답고, 가공이 용이하며, 섬세한 조각이 가능하고, 조탑 과정에서도 시간과 비용이 절약되기 때문에 불탑재료로 선택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청석의 재질 특성상 대규모의 불탑조성은 불가능하지만 9층, 11층, 13층의 다층으로 쉽게 구성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더구나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조탑 불사와는 별도로, 왕도인 개성을 벗어나 지방 각지에서 불심 깊은 호족들의 원력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불탑이 조성되었기 때문에 청석탑의 유행을 더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10여기의 크고 작은 청석탑〈표1〉이 현존하고 있다.
이보다 약간 후대인 10세기 중반에 조성된 염불암 청석탑〈사진2〉은 현재 화강암의 지대석과 청석의 지붕돌만 남아 있다. 충주의 창룡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구전되는 사찰로 현재 대웅전 앞뜰에 7층의 지붕돌만 남아 있는 청석탑〈사진3〉이 있다. 주목되는 점은 12엽의 연화문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1층 지붕돌의 모습이다.
전탑(塼塔)이란 벽돌을 재료로 하여 조성된 불탑을 말한다. 벽돌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인공건축자재로 신석기 시대인 약 8,000년 전부터 사용되어 왔다. 메스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이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집을 짓기 시작하였고,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로부터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벽돌은 내구성과 안정성이 석재(石材)와 비슷하고 무게가 돌 보다 가벼우면서도 다양한 양식을 표현할 수 있고, 조각도 가능하기 때문에 특히 중국에서는 많은 전탑이 조성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유사〉 권4. 양지 사석조에 의하면,
‘영묘사의 장육삼존 천왕상과 전탑을 덮은 기와, 천왕사탑의 팔부신장,,,(중략),,,또한 일찍이 벽돌을 새겨 조그마한 탑을 만들고 아울러 불상 3천여 개를 만들어 그 탑에 봉안하여 절 안에 두고 예배했다.’
이곳의 중앙선 철로는 일제강점기에 놓인 것이지만, 지금까지도 철로 위로 기차가 달리고 있다. 이렇게 기차가 지날 때마다 생기는 진동과 소음 때문에 탑은 조금씩 붕괴되고 있어, 우리 손으로 문화재를 지켜내지 못하는 그 슬픔을 감수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또한 문헌에 의하면 원래 탑상부에는 화려한 금동장식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보물 제57호인 안동 조탑동 5층전탑〈사진7〉은 수년전만 해도 사과 과수원 경작지로 심하게 황폐화된 상태에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이 탑은 높이 8.65m로, 토축기단(土築基壇) 위에 5단의 화강석 지대가 있고, 1층 옥신은 크기가 똑같지 않은 화강암 석재를 5∼6단으로 쌓았으며, 그 남쪽에는 직사각형의 감실을 만들고 그 좌우에는 인왕상이 조각하였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화강암과 벽돌을 혼용하여 조성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