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으로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남의 마음을 살펴 주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말입니다.


▲ 그림 최주현
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요?
질문 우리 인간에게는 뚜렷하게 나라는 형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형체를 현미경으로 분석을 한다면 수많은 세포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기에 결코 나라는 하나만의 형체라는 건 절대 없는 것입니다. 또 이 수많은 세포를 분석해 들어가면 그 속에는 원자와 전자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 원자핵이 있을 겁니다. 그러면 나라는 것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유위의 세계에서는 나 개인이 분명히 있지만 무위의 세계에 들어가면 지금 나라는 형체조차도 없는데, 그 나라는 형체를 만드는 질서정연하고 수많은 세포와 원자와 전자로 구성된 나의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요?


답변 지금 나라는 존재도 분석을 해 보면 없다고 했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내세울 게 없는 겁니다. 아주 없다는 게 아닙니다. 내세울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너무 여러 개가 돼서. 그러면 근본적인 것은 무엇인가. 이게 종합된 하나, 그것을 우리가 무전자라고 일컬어 말할까요? 그것도 아마 내가 이름을 지어 놨는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유전자들이 너무 한데 합쳐져서 있는 게 무전자거든요.
그러면 이 많은 생명들이 한데 합쳐져서 요만한 능력, 그것을 가지고…, 만약에 콩씨라면 요걸 또 쪼개고 쪼개고 쪼개고 해서 어떤 거를 유전자라고 할 수 없으리만큼 됐을 때에 바로 세울 게 없는 거거든요. 그랬을 때 바로 이것이 부처라고 한다. 이럴 때 그걸 어떻게 말을, 이름을 붙이나.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자유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무전자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무전자로 인해서 유전자가 나고 유전자로 인해서 물질이 난다. 그렇기 때문에 무전자의 이름을 주인공이라고 하자. 부동한 그 자체가….


그럼 무전자만 있느냐. 유전자 무전자 육신, 이것이 종합해서 지금 원형을 이루고 돌아가니까, 공했으니까, 나도 사대도 공했고 오온도 공했다. 그러니 사대와 오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대도 오온에 같이 지금 들어서 공해서 돌아가고 있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자기한테서 나고 들고 나고 들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 개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공에서 나온다 말입니다, 합쳐진 공에서. 그러니까 합쳐진 공에다 다시 놓는 거죠. 믿고 놓는 겁니다. 그럴 때 보이지 않는 그 무의 세계의, 미지수의 헤아릴 수가 없는 그 문제가 바로 이 유의 세계의 헤아릴 수 없는 모체에 모든 것이 결합이 되는 겁니다. 내가 확신이 되고….
어떠한 유(有)의 법의 물건, 이 물질이 하나도 없다면 무(無)의 그 무체도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 씨가 있기 때문에 콩나무가 나듯, 그 모든 씨가 있기 때문에 모두 나는 거고 뿌리가 있기 때문에 싹이 나는 겁니다. 그렇듯이 자기가 이 세상에 나온 이 자체가 부처를 이룰 수 있는 화두요, 그것이 바로 근본의 모체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아니라면 부처가 어디 있으며 종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상대가 어디 있습니까. 부모도 자식도 남편도 부인도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내가 없으니까. 그런데 내가 있기 때문에 인연법이다 유전이다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내가 있는 게 공했기 때문에 그거조차도 없다 이 소립니다. 내가 내세울 게 없는데 내가 하는 일까지도 내세울 게 있겠느냐는 얘기입니다. 내가 먹은 것도 내세울 게 없고 하는 것도 내세울 게 없고 내가 나온 것도 내세울 게 없어요. 한 방에 앉았는데 나만 사람입니까. 그러니 나만 사람이라고 내세울 게 없죠? 그러니 모든 것에 내가 내세울 게 없는 겁니다. 그래서 공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나와 더불어 배우기 위해서 주인이라고 했고, 그것은 차도 바퀴가 굴러가는데 심봉이 꿰어져야 바퀴가 올바로 굴러가듯이 인간에게도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인!’ 이렇게 해 놓고 ‘공!’ 주인이자 공이다. 바로 너다. 그래서 그냥 “공이야.”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정법 만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질문 지금의 시대를 말법 시대다 혼돈의 시대다라고 하면서, 이런 시대에 태어난 저희 중생들은 정말 정법 만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행히 이 정법을 만났고 또 배우고 수행하여 참자유인이 되도록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마는 우리 주위에는 아직까지도 이런 법을 모르고 사법에 빠져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이런 분들에게 이 법을 전할 수 있는 방안이 있으면 말씀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답변 이 법이 다른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아이고, 이사를 가야 하는데 가서 날짜를 물어보고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큰 탈이 생긴다.’ 이렇게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에 의해서 살아요. 그 한 예만 봐도 살아나가는 게 모두 그렇게 관습으로 사는 거예요. 자기 생각대로 그대로 나가는 게 없어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권리대로,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난 그 권리대로 사는 사람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계속 유전되어 와서 그냥 머리에 배었죠. 지금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고 배우는 사람도 그렇고 다 그렇죠.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도 틀리지 않고 배우는 사람도 틀리지 않아요. 왜냐? 이 세상 살아나가는 게 부처님 법 그대로라는 걸 백지 한 장 사이인데도 모르고 있지만 그것만 알아채면 이 세상을 그대로 여여하게 살 수 있는 거니까요. 아주 그렇게 간단하죠.


그런데 생각들에 젖어 가지고 아무리 말을 해 줘도 “아이고, 그렇게 다 놓으라니 다 놓고 어떻게 삽니까?” 허허,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그런 말을 하죠. “당신이 걸어올 때 한 발 들고 한 발 놓고, 한 발 들고 한 발 놓고 이렇게 걸어오는데, 그건 짊어지고 다니느냐?” 그랬어요. 우리가 지금 살림하는 게 그렇게 놓고 가는 겁니다, 그대로. 붙들고 가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대로 그냥 순응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지어 가지고 그렇게 온통 붙들고 만날 걸리는 거죠. 그게 자기가 마음으로 지어서 창살 없는 감옥을 만들고 나오지 못해서 자유스럽지 못한 것뿐이죠.


그러니까 그거를 일러 주세요. 배우는 사람에게도 ‘이게 뭣고?’ 하지 말고 ‘네가 너를 끌고 다니니까 그대로 거기다 맡기고 그대로 지켜봐라. 못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잘 굴리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고,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고, 잘됐으면 감사하게 놓고 거기에다 맡겨라. 주인의 그 구멍은 한 구멍밖엔 없다.’ 하고 말해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들고 나면서 당신을 끌고 다니는 자체를 주인 삼아서 꼭 그렇게 하면, 나중에는 스스로 깨치게 되어 고삐도 없어지고 소도 없어지듯이 자기 주인이라는 이름도 없어져요. 그러니까 그렇게 우리가 정신계의 50%와 물질계의 50%가 서로 100% 작용할 줄 알아야 에너지를 바로 자기 자신들이 충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자 몸을 받아야 성불한다는데
질문 여인의 몸으로는 성불하지 못하기에 여성이 남성으로 바뀌어 ‘변성남자(變成男子)’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을 주위의 도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제가 큰스님 법문을 듣기로는 ‘불성은 둘이 아니다. 그 자리는 남녀가 없다.’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느 말씀이 옳은지요?


답변 이게 이런 이치가 있습니다. 참, 이게 간단히 이해가 될 수 있는 그런 말은 아닙니다. 여자는 죽어서 남자로 태어나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사람은 세 번 죽었다 깨어나야 사람으로서 부처 될 수 있는 것이 아주 100%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금방 짐승이 화해서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그것은 아니 된다. 또 ‘여자는 성불을 못한다. 일곱 번 죽었다 깨어나야 성불을 한다. 남자는 세 번 죽었다 깨어나야 성불한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던가. 짐승으로 있다가 사람으로 곧 태어난 사람은 짐승으로 살던 습이 남아서 사람으로 태어나도 껍데기만 사람이지 그건 짐승이야. 짐승의 습이 자꾸 튀어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같이 이렇게 어울려서 사는 습을 지금 배우는 거지, 미래에 갈 거를 배우는 거지 전자의 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거야. 그렇기 때문에 성불을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자로 태어나기 전에 여자부터 제일 먼저 태어난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여자가 태어난 뒤에 남자가 태어났지.’ 이렇게 됩니다, 인제. 여자가 한번 죽어서 또 남자로 태어날 수는 있을지언정 어찌 그렇게 되느냐는 얘깁니다. 짐승이 사람으로 태어났다가 사람이 죽어 가지고 또다시 짐승으로 좌천되는 수가 있습니다. 또, 인간으로 태어나긴 태어났는데 그전에 살던 습이 그대로 남아서 습대로 행을 하니까 그대로, ‘너는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의 행을 못하니 다시 좌천해서 가거라.’ 이러고선…, 그거는 누가 해 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거기 떨어진 겁니다. 또 자기가 해 놓고 자기가 올라오는 거지요. 올라가고 내려감도 없고 이 자리지만 그렇게 돼 있는 겁니다. 이게 말을 하려니까 ‘올라가고 내려가고’ 이런 말이 있는 거지, 언어도 붙지 않는 그런 자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려니까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서 그만큼 그렇게 구르면서, 억겁 년을 거쳐 오면서 그렇게 구르면서 공부한 사람들이 남자로 태어나서 또 공부를 해서 그 도리를 완전히 파악한 뒤에 또 여자로 태어나는 것은, 여자가 여자가 아니에요. 깨달으면 여자가 아니다. 남자도 아니다. 여자라고 해도 아니 되고 남자라고 해도 아니 된다 이겁니다, 이 깨달음이라는 거는. 그렇기 때문에 여자라고 못을 박을 수도 없고 남자라고 못을 박을 수도 없어요. 그건 왜 그러냐. 모습은 여자로 가질지언정, 모습은 남자로 가질지언정 찰나찰나 나투는 것이 있기 때문에, 화해서 나툰다는 얘깁니다. 남자도 됐다 여자도 됐다가, 부처도 됐다가 법신도 됐다 화신도 됐다가, 관세음도 됐다가 지장도 됐다가 신장도 됐다가 아, 짐승도 됐다가 사람도 됐다가, 또는 용신도 됐다가 지신도 됐다가 온통 천차만별로 돼 있는 그 이름들로 다 나투어서 이렇게 화하니까 손도 천이요, 눈도 천이요, 천은 천이 아니라 전체 삼천대천세계 아니 닿는 데가 없어야 천이라고 합니다. 천도 일이요, 일도 천이다. 만도 천이요, 천도 만이고 만도 일이고 일도 만이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 사람이 지어서 시간이 몇 시, 몇 년, 몇 달, 며칠 이러는 거지 이 진리는 시간과 공간도 없고 여자와 남자도 없고 동과 서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왜? 이렇게 찰나찰나 나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로 태어나서 입산을 해 가지고, 입산을 했든 안 했든 여자이기 때문에 성불을 못한다는 거는, ‘못한다’ 이렇게 못 박을 수는 없는 겁니다. 왜? 여자라고 해서 성불 못하라는 법이 어딨습니까? 이치는 그러하나 내가 만약에 못 박아서 여자는 성불 못한다 이런다면, 모습만 보고 그런 말 하는 거지 만약에 그 사람이 남자로 몇 수십 번을 태어났다가 여자로, 보살로 부처로 태어났다면 어떡할 작정인고. 여자 없이 남자가 어디서 나왔나. 모두가 여자 속에서 나온 겁니다. 그래서 이 도리천, 즉 말하자면 이 땅덩어리가 다 여자인 거라. 일체 만물을 소생시키고 일체 만물을 길러요, 땅이. 땅은 일체 만물을 길렀으나 기른 그 모습들은 하늘을 쳐다보고 다 점령을 했으니 뿌리를 박은 그 땅은 다 점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존께서 이 세상을 다 항복을 받고 점령을 했으나 그 석존은 누가 낳았겠습니까. 그 어머니는 그 아들을 점령을 한 겁니다. 그랬으니 ‘여자도 남자도’ 이런 소리 하는 거는 상당히 어리석다고 봅니다. 못한다 한다, ‘못한다’ 해도 그르고 ‘한다’ 해도 그른 겁니다. 거기에는 미묘한 그 뜻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내가 얘기했듯이 갓 여자로 태어난 사람이 성불은 못한다. 그러나 몇 번 굴러서 여자로 태어난 사람,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고 그럭하면서 공부해 내려온 그 사람은, 지금에 와서 금은 금대로 모이고 넝마는 넝마대로 모이듯이, 무쇠는 무쇠대로 모이듯이 이러한 근기가 좀 있는 분들은 있는 분들대로 모이게끔 돼 있죠. 왜? 신상에 맞지 않으니까.


그래서 ‘여자가 못한다.’ 이래도 그른 거고, ‘남자만 한다.’ 이래도 그른 겁니다. 그러니 그저 ‘그르다 못한다 한다’ 이런 게 다 없는, 그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의 자비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그 자비를 깨달아야만이 부처라고 일컬어 말하고 자유인이라고 일컬어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아예 마시고 거기에 끄달리지도 마시고 ‘못한다 한다’에 끄달리지 마시고, 모든 것을 자기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 주인공에다가 몰락 맡겨 놓으면 됩니다. 생각나는 대로 그저 놓으면 그게 굴려 놓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홀연히 자기 스스로 그 생명수의 참맛이 나는 거죠. 그다음에 개구리탕이라도 탕 맛을 보면 또 맛이 나는 거죠. 또 용탕을 맛을 보면 또 더 맛이 나죠. 이렇듯이 종합탕을 먹으면 맛이 또 참, 희한하고 그래서 ‘아이고, 어떤 걸 넣어야 이게 종합탕인가. 이것이 어떤 것인고.’ 어떤 것이다 할 수가 없으니까 ‘탕’ 한 것이, 우리가 ‘할’ 할 때 둥근 이 자리에 벌써 이 둥그러미를 긋기 이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을 것도 없고 안 그을 것도 없는 거죠. 그대로 여여함을 뜻하는 겁니다.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받아 공심이면
질문 친구의 권유로 선원에 등록한 지는 3년 가까이 되었으나 인연이 안 되어 외면하고 있다가 4개월 전부터 우연한 기회에 이 공부의 길로 들어서서 지금은 큰스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마음 주인공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선법합창단에도 들었고요. 다름이 아니고 ‘삼세가 둘 아닌 노래’에서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받아 공심이면 자유권을 자재한다.” 이런 가사가 나오는데 그 뜻을 알고 싶습니다.
답변 이 몸속에 있는 모습들을 본다면 조그마하니까 하등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들 하시겠지만, 그게 만약에 이렇게 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를 꺼내 놓았는데 크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징그럽고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거를 다 거쳐 나왔단 말입니다. 그게 거친 인연들이에요. 우리가 한때는 그 모습을 가지고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다 보면 자꾸자꾸 지혜가 생기고 회개를 하게 되고 또 건너뛰게 되고 이렇게 하죠. 그런데 저 아래 축생들은 그냥 먹고 살기 급해서, 그렇게 먹고 사는 것만 알지 한 번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다는 얘기죠. 그래도 사람은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부처 될 가능성이 99%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럼 똑같이 부처가 있는데 왜 그러면 이렇게 사단이 많으냐. 똑같이 부처라 하더라도, 뿌리는 같으나 모습이 다르고, 하는 차원이 모두 다르고, 살아 나온 기술이 다르고, 모든 게 자기의 습대로 하고들 산단 말입니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가지고 나왔으니까요. 모습도 삶도 또 권세도 다 가지고 나오거든요. 가지고 나와서 살고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내가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러나 벗어난다는 말조차 없이 그대로 내 몸에서 이 모든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을 받는다면, 내가 마음대로 마음을 내는 대로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라도 이 보살이 응신(應身)으로 화(化)해서 모든 걸 이익하게 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거를 생각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완성을 하면 이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들이 자기가 스스로 벌써, 모두 부하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죠.
 

여래의 마음은 공심(共心)이다. 여래의 몸은, 즉 말하자면 공체(共體)다. 공체기 때문에 크죠. 여러분이 볼 때는 사람 하나지만 공체이기 때문에 크단 말입니다. 그리고 공용(共用)을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안에서도 공용이요, 바깥에서도 공용입니다. 이런 얘기 곧잘 하죠. 우리가 물을 한 그릇 먹었다고 하면, 이것을 내가 먹은 겁니까? 이건 내가 먹은 게 아니라 여기서 목마르다고 달라고 그래서 준 거예요. 줬는데, 준 사람만 먹는 게 아니라 전부 다 같이 나누어 먹죠. 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의식들이 이렇게 나누어 먹게 된 동기를 알게 되면 동시에 그냥 한마음이 돼 주죠. 지나가다 보면 하다못해 소나무도 말을 하고 돌도 말을 하는데, 이 속에 의식들이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니까 이 물을 남이 볼 때는 나 혼자 먹었어요. 그런데 먹은 사이가 없다. 이 물은 내가 먹은 사이가 없이 더불어 같이 공식(共食)을 했다 이런 뜻이 나오죠. 공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먹는 것만 공식이 아니라 이 모든 거, 돈 벌고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 공식입니다, 그게. 같이 움죽거리죠, 이 몸도. 지금 자기가 그냥 보고 듣고 이렇게 움죽거렸다 하시는 분들도 있겠죠. 그러나 아닙니다. 그건 모든 부서에서 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움죽거리는 겁니다. 어느 한 부서에서만 움죽거려 주지 않아도 그냥 폐인이 돼 버리고 말죠. 모두가 그렇게 움죽거려 주는 걸, 본래 그렇게 움죽거려 주고 같이 해 주고 있는데,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얍삽해서 이거를 죄다 가르는 거죠. 자기 자불이 그렇게 있고 자불로 하여금 마음이 의식하고 통해서 같이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이 그렇게 해 주질 않으니까 같이 조복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냥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인연 받은 대로 그냥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운명이나 팔자나 이런 거를 면할 수가 없다 이러는데, 이 공부는 팔자 운명도 없고 고(苦)도 없다, 이렇게 나오죠. 고라는 건 집착만 없으면 모든 게 없어요. 집착! 집착을 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물을 먹었으니까, 내가 물을 줬으니까 저 물 대신 뭐가 오겠지.’ 하는 이런 집착, 또 ‘내가 해 줬으니까 좋게 되겠지.’ 하는 집착, ‘부처님한테 뭐를 놓았으니까 뭐가 오겠지.’ 하는 이런 집착, 이런 집착들이 모두 자기를 멸(滅)하게 못 해 주는 겁니다. 어차피 물을 한 그릇 떠다가 부처님한테 놓았으면,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부처님한테 놓았다 하면 뭐, 몇 억을 갖다 놓았다 하더라도 한 사이 없이 했다면 그것이 그냥 그대로죠, 그냥. 그러니 돈보다도 수없는 이 허공을 다 준대도 가볍게 받을 수 있는 그런 조건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준 거 생각을 하거든요.


그리고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왜 집착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몇 알갱이나 산다고 집착을 합니까. 그리고 미워하고, ‘너로 인해서 망했다.’ 이러고. 간혹 ‘너로 인해서 흥했다.’ 이럴 수도 있죠. 그것도 집착입니다. 모두가 집착이에요. 그래서 고·집·멸·도, 아닙니까? 고라는 거는 이름이에요. 고라는 것은 집착이 없다면 멸한다, 이런 뜻이에요. 멸하면 도다, 이거예요. 간편하죠, 아주. 우리가 이렇게 해도 여기 걸어서 들어올 때 내 발자국을 짊어지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얘기죠.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는데 왜 없어진 그 발자국에 집착하느냐. 없어진 발자국에 집착을 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 살면서 그냥 ‘요거는 요게 잘못됐는데….’ ‘이런 게 잘못됐다.’ ‘이건 정말 날 무시하고 이렇게 이렇게 됐다.’ 이런 생각이 들면 그게 영 없어지지 않죠. 없어지질 않는 그것이 집착이에요. 무상하게 살면 안 되나요? 우리가 ‘이것도 한 발자국 떼어 놓는 거와 같구나. 이것도 그런 거지, 뭐. 살다 보면 그런 거지.’ 그러면서 그저 이해해 주는 그런 마음…. 그러니까 내 마음으로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남의 마음을 살펴 주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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