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일운 스님의 북 콘서트를 보고

정목 스님 질문, 일운 스님 답 형식

“시대 필요한 스님상 조명” 인상적

▲ 일운 스님은 6월 6일 한국불교문화역사기념관에서 북콘서트를 열었다. 관중들은 콘서트를 통해 진실하고 간절한 스님의 큰 원력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6월 6일 한국불교문화역사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일운 스님 저 〈산사에 홀로 앉아〉 북 콘서트가 열렸다.

30년 이상 글 쓰는 일을 본업으로 하고 있지만 북 콘서트에 가 본 건 처음이었다. 흔히 출판기념회, 하면 지인들이 참석해 책을 사주고 몇 사람이 돌아가며 축사를 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북 콘서트는 말 그대로 책과 공연을 합성한 문화행사였다. 불교적인 색깔을 어떻게 입히느냐에 따라 북 콘서트도 훌륭한 불교문화행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이 충분히 느껴졌다.

정목 스님의 세련된 진행으로 장내는 화기애애한 열기로 가득했고 청중들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무대 위에 오른 일운 스님과 정목 스님을 바라보았다. 정목 스님이 질문하고 일운 스님이 답하는 형식으로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나는 일운 스님의 답을 들으면서 차츰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일운 스님 안에 내재한 원력이 진실하고 간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들이 찾고 있는 스님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그것은 진실하면서도 유능한 스님, 구도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의식이 깨어 있는 스님, 삶의 중심에 원력이 굳건히 자리한 스님, 불법의 정수를 꿰뚫어 아는 스님, 이런 스님상일 것이다. 나는 이쯤에서 스님도 불자도 불교도 법(부처님 가르침) 앞에서 좀 더 진실하고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스님상을 새롭게 조명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본다. 내가 일운 스님 북 콘서트에 가서 가슴이 뜨거워진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일운(一耘) 스님은 봉녕사 학장이셨던 묘엄 스님 상좌다. 일운이라는 법명도 묘엄 스님이 내리신 것이다. 운(耘)자는 김매다, 없애다, 제거하다, 라는 뜻이니 속기를 다 없애고 오롯이 불성에 안주한 스님이 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일운 스님은 과거생에도 스님이셨던 것 같다. 17살 어린 나이에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일체 만상은 마음의 작용이고, 마음공부를 하려면 절에 가서 스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교복을 입은 채 청도운문사 강원을 찾아 갔다니 말이다. 그 당시 운문사 강원에는 묘엄 스님이 강주로 계셨는데, 묘엄 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해서 맺어졌다. 그로부터 18년의 세월이 흐른 1987년 일운 스님은 대만으로 유학을 가 중화민국 중화불학연구소 불교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했고, 유학간지 4년 만인 1990년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992년에 은사스님인 묘엄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비구니계의 강사스님이 된 것이다.

일운 스님이 울진 불영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대만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 다음 해였다. 문중어른 스님들이 대만까지 찾아 와 불영사를 맡아달라고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일운 스님은 그 당시 비구니스님으로는 최고의 엘리트그룹에 속했다. 그리고 은사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으니 강사스님으로 안정된 생활이 보장돼 있었다. 하지만 스님은 안정된 생활을 택하지 않고 경상북도 오지인 울진 불영사로 내려 왔다. 일운 스님 인생 2막이 시작된 것이다.

울진 불영사는 진덕여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산 위에 있는 부처님 모습을 한 바위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해서 절 이름이 불영사(佛影寺)다. 일운 스님이 처음 불영사에 올 때만 해도 불영사는 몰락한 양반집 같은 모습으로, 고찰이라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30대 후반의 비구니스님이 몸담고 있기에는 너무도 피폐해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피폐한 도량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 서서 불영사를 일으켜 세우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다. 그렇게 1년 2년 3년…세월이 흘러가자 불영사 도량에는 천축선원, 무위당, 황화실, 청운당, 청풍당, 반야당, 설선당… 같은 이름의 당우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스님이 불영사에 머문지 25년이 된 지금 불영사 도량에는 25채의 당우가 새로 들어서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축선원에는 영동제일의 비구니선원이 개설돼 결제철이면 전국에 흩어져 있던 비구니스님들이 모여 들어 안거에 들어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과거와 미래의 에너지를 지금 이 순간에 집중적으로 투사해 쓰는 일운 스님 특유의 생활철학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운 스님은 해마다 불영사에서 사찰음식 축제를 연다. 이 기간에 참석하는 사람은 약 7천명에서 8천명 정도. 울진군 내에서 가장 큰 문화행사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2011년 6월부터 만 일 염불결사를 시작해 2038년 10월에 회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비구니 스님이 만일 결사를 추진하다니! 스님 가슴속에서 유유히 흐르는 원력의 강물을 보는 것 같아 숙연해진다.

지금 현재 만일 결사에 동참한 회원은 약 3천 명, 스님은 매일 아침 스마트 폰을 통해 회원들에게 마음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회원들이 보내 온 보시금으로 제 3국 어린이들을 돕고 있다. 아침마다 법을 전하고 대신 음식을 공양 받는 탁발순례를 실천에 옮기고 계신 셈이다. 원력은 아름답다. 원력을 실천하는 삶을 지켜보는 것은 더욱 아름답다. 진실하면서도 유능한 스님, 구도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의식이 깨어있는 스님, 삶의 중심에 원력이 굳건히 자리한 스님, 불법의 정수를 꿰뚫어 아는 스님, 이런 덕목을 갖추고 계실 것 같은 일운 스님과의 만남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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