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진화 37) 10층탑 - 2

원각사 10층탑 당초 13층
조선의 랜드마크로 자리잡아
자주적인 성격이 다른 탑과 달라

원각사지 10층석탑
원각사지10층석탑
고층빌딩이 빽빽하게 들어 선 서울시 종로의 중심가엔 우리에게 ‘탑골공원’이라는 명칭으로 더욱 익숙한 원각사(圓覺寺)터가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그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창건 당시 조선 도성 내 3대 사찰로 알려질 만큼 규모가 매우 컸던 원각사는 세조 10년, 1464년에 사찰 중건에 착수하여 1465년에 완공되었다.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뒤 임금이 된 세조의 왕권은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 왕후의 꿈을 꾼 뒤 피부병에 시달리고 장자인 의경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등, 불안에 시달리던 세조가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찾은 곳은 바로 세종의 형님이자 자신의 큰아버지인 효녕대군이 계시던 회암사였다. 세조는 양주 회암사를 찾았다가 분신(分身)한 사리를 보고 감명 받아 효녕대군을 사찰 중건의 총 책임자로 하여 왕궁 가까이 있던 흥복사(興福寺)터에 원각사를 세웠다.

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번역한 〈원각경(圓覺經)〉과 회암사의 분신사리를 봉안하여 탑을 조성하는데, 이 탑이 바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2호 원각사지10층석탑〈사진1〉이다.

세조는 숭유억불 정책을 강행해 온 조선의 선대왕들과는 달리, 직접 왕궁 가까이 절을 짓고 높이 12m라는 큰 규모의 석탑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파격적인 불사(佛事)를 행한 데에는 불법의 번성을 기원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며 공고히 함과 동시에, 부처님을 통해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한 세조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실제 탑의 층수는 10층이지만 당시 조성된 탑의 층수는 13층이었다. 13층이라는 기록은 원각사의 창건 내력이 기록된 보물 제 363호인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사진2〉를 통해 알 수 있다. 대원각사비에는 탑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대원각사비
‘세조가 간경도감에서 〈원각경〉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다시금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이와 같은 기록은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의미한다. 첫째는 조성당시에는 13층이었으나 현재는 10층만 남아있는 경우이고, 둘째는 탑의 층수를 기단부터 세었기 때문에 기단3층과 탑신10층을 더하여 13층이라고 표현한 오류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탑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세조 42권에 의하면,
‘13년(1467년) 4월 8일, 원각사의 탑이 완성되니 연등회를 베풀어 낙성하다 (圓覺寺塔成, 設燃燈會以落之)’라고 했다.

이처럼 1467년 사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에 세조가 성대한 낙성식을 열기 전부터 탑에 관한 이야기가 도성 내에 자자하였다. 심지어 당시 조선에 국빈 자격으로 방문해 있던 일본의 도은이라 하는 스님은 원각사 탑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공람(供覽)하고자 세조에게 청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승은 중국의 사찰을 두루 관람하며 보았습니다. 듣건대 원각사의 탑이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니, 원하건대 오늘 관람하고자 합니다. (僧遍覽中原寺刹, 聞圓覺寺塔爲天下最, 願今日觀賞)” 라고 도은이 청하니 세조는 예조에 이를 승낙하여 일본 승려가 탑을 공람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각사10층탑은 세조와 조선의 자존심이자 한양의 랜드마크(landmark)로 급부상하였는데, 세조 이후에도 억불 정책을 피해 잘 보존되던 원각사는 연산군 시절에 이르러 폐사되고 만다. 연산군은 이곳을 ‘연방원(聯芳院)’이라 이름 짓고 전국에서 뽑아 온 기생과 악사들의 숙소로 사용하도록 했다. 후에 건물의 재목들이 다른 공용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되며 원각사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지금의 ‘10층석탑’과 ‘대원각사비’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폐사지였던 이곳은 구한말 고종 때인 1897년 탁지부에 고문으로 와 있었던 영국인 J.M. 브라운이 설계해 ‘파고다 공원’이라는 이름의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근린공원이 되었다. 3·1운동 당시 많은 시민이 이곳에서 만세를 외쳤으며,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팔각정도 탑 앞에 위치하고 있다.

해방 이후 1946년 2월 17일에 유진 크네즈라는 미군 대위의 관심에 의하여 원각사탑은 복구가 완성되었다. 군정청 교육문화담당관과 공보관이었던 그에 의하여 미군공병대의 기중기를 이용하여 오랫동안 땅바닥에 내려져 있던 원각사탑의 상층부 3개 층을 올려 10층의 완성된 불탑으로 거듭 나기에 이른다. 이날의 참관인으로는 군정청 유억겸(兪億兼) 학무국장과 최승만(崔承萬) 종교예술과장,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 국문학자 이병기(李秉岐), 국립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 등이었다. 그리고 석탑의 복구를 총괄 지휘했던 사람은 미군장교 ‘라이언’ 해군 소위였다.

1962년에 국보 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원각사 인근에 살던 조선 지식인들을 이르던 ‘백탑파’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탑 전체를 이루는 흰 빛이 특징적이다. 이는 보통 석탑에 화강암이 쓰이던 것과는 달리, 회백색을 띠는 대리석으로 탑을 조성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리석은 아름답지만 화강암보다 무르고 약한 탓에 훼손 위험도가 높아 현재 원각사지 십층석탑에는 유리 보호막을 씌워 보존하고 있으므로〈사진3〉 일반인들이 직접 불탑을 친견하고 참배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하지만, 유리보호구조물 안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우리나라 제일의 가장 뛰어나고 아름다운 10층의 불탑이 모셔져있다. 이 불탑의 우수성은 탑의 전신에 새겨진 정교하고 화려한 조각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서남북 각 4방향에 1층부터 3층까지 모두 12장면의 변상도를 조각하고 남쪽의 4층에 1장면을 더하여 모두 13회의 변상도〈사진4〉를 조각한 것이다. 13회란 동방의 미타회,다보회,약사회, 서방의 영산회,원각회,전단서상회, 남방의 삼세불회, 화엄회, 소재회, 원통회, 북방의 용화회, 법화회, 능엄회를 말한다. 경설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보이는 변상도의 조각모습은 지난 호에서 알아보았던 ‘경천사지10층석탑’의 전면에 부조된 조각들과 유사하다. 조각 뿐 아니라 경천사지10층석탑과 원각사지10층석탑은 형태와 구조 모두가 닮아있다. 조성연대를 고려해볼 때 원각사지10층석탑이 경천사지10층석탑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라 할 수 있고, 두 탑 모두 우리의 우수한 문화재지만 원각사 석탑은 보다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바로 경천사지10층석탑이 친원세력과 원나라의 원조에 의해 조성된 탑이라면, 원각사지10층석탑은 오로지 조선의 기술력과 석재로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 경천사의 탑이 원나라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불법의 번성과 권세의 과시를 목적으로 조성되었다면, 원각사의 탑은 세조가 임금의 왕권강화와 조선의 부국강병을 꿈꾸고 온 나라에 부처님의 자비와 광명이 비치길 바라며 조성하였기에 좀 더 자주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조계사 7층탑
서울 조계사 8각10층사리탑
조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로서 한국불교의 총 본산이다. 근현대 우리나라 불교역사를 지켜본 중심사찰이었으며, 현재는 조계종의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 등 종합청사가 있는 한국불교 1번지라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일이다. 태국의 왕실에서 모시고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스리랑카의 ‘달마바라’스님이 하사받아 모시고 다니던 중 1913년 8월 20일 우리나라를 방문하게 되고 당시 불교청년대표인 김금담(金錦潭)에게 그 귀중한 사리 1과를 주어 1914년 각황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수년 동안 사리를 탑에 봉안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긴 경호(瓊湖)스님의 주관으로 태고사 즉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 앞에 7층탑〈사진5〉과 석등을 조성하고 사리를 봉안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5년 광복이후 탑의 양식이 일본식이라는 비판의 여론이 계속 되었다. 이에 2009년 10월에 당시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으로 계시던 이지관 스님의 발원과 당시 조계사 주지의 소임을 맡았던 박세민스님에 의하여 8각10층의 세존사리탑을 조성하게 되었다. 원래 있던 7층탑은 총무원 청사 한 쪽 옆에 자리를 마련하여 이전복원하고〈사진5-1〉 대웅전 앞에는 8각10층〈사진6〉의 새로운 탑을 조성한 것이다.

이 탑을 조성할 때에는 몇 가지 기본 방침을 세우고 불사가 진행되었다. 방침의 기본 내용은 첫째, 일본식 비판에 따르는 새로운 조성이므로 철저히 전통양식을 구현할 것. 둘째, 도심한복판에 위치한 주변경관을 고려하여 장엄미려(莊嚴美麗)하게 할 것. 셋째, 조계사는 한국불교의 상징도량이므로 도심신행공간의 중심이 되도록 ‘탑돌이’ 등 예배공간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것. 넷째, 불교신행의 근본인 正見,正思惟,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의 팔정도(八正道)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忘語), 불악구(不惡口), 불양설(不兩舌), 불기어(不綺語), 불탑(不貪), 부진(不瞋), 불사견(不邪見)의 십선법(十善法)을 상징하여 8각10층으로 조성하며, 한국불교 신행전통을 고려하여 8여래상, 8보살상, 8신중상 등을 도상화하여 조각으로 장엄할 것 등이었다.

그 결과 현재 1층 탑신 8면에는 비바사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미륵불의 8여래상을 조각하고, 중대석 8면에는 허공장보살, 제개장보살, 금강수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미륵보살의 8보살상을, 난간의 8면 각 기둥에는 천, 용, 건달바, 긴나라, 아수라, 가루라, 마후라가, 야차의 팔부신장상을, 하대석 안상 안에는 부처님께 음성공양을 올림의 상징인 법라를 비롯하여, 일산, 공덕의 깃발인 산개, 금빛 물고기인 금어, 보병, 보상화, 법륜, 인연의 8길상도와 8사자상을 각각 조각하였다. 1층 탑신 내부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지대석과 중대석 안에는 한국불교의 중흥과 불자들의 소원을 담은 소형 불상 1만 4천분을 모시기도 하였다. 또한 1층 탑신 연화대 안에는 동판으로 제작한 ‘한국불교중흥발원문’과 ‘사리탑신건연기문’ 그리고 1660년 은진쌍계사에서 각판한 〈법화경〉7권 1질과 25조가사 1벌 등을 봉안하였다.

혹자는 ‘모방’이 곧 ‘창조’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통을 지키며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자주적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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