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났든 잘났든 너 먼저 알아라.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는 거지

네 나무가 딴 나무를 믿어 봤자 에너지가 이쪽으로 오지 않느니라 

 

▲ 그림 최주현

우리의 사회가 밝고 건전해지려면

질문 얼마 전 저희 신행회 법사 스님께서 “지금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가서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잘살 수 있도록만 가르친다. 정작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손잡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는 가르치지 않으면서 자신이 어렵고 힘들어지면 누구도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사회를 원망만 한다.”라고 하시는 법문을 듣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내 자식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만 나와 내 가정을 버리지 않으면서 우리의 사회가 밝고 건전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마음을 내고 살아가야 할까요?

답변 여러분 육신 속에 들어 있는 그 마음들은, 의식들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공장이라고 해도 되지마는 세계라고 해도 됩니다. 위라는 세상, 장이라는 세상, 간장이라는 세상, 소장이라는 세상, 이름이 그렇게 많아서 이걸 세계라고 하죠. 그냥 여러분을 해코지하게도 나오고 남을 해코지하게 마음을 일으키게도 하는 모든 의식들을 침착하게 생각해서 거기에다가 맡겨 놓고, 거기에서 나온 거니까 거기에서 해결할 수 있게끔 다 놓고 나는 종노릇을 하십시오. 몸은 종노릇을 하면서 그 다스리는 마음은 항상 한마음으로 돼 주고 겸손하게 돼 주시란 얘깁니다.

아니, 내 몸속에 있는 진드기가 보기 싫고, 촌챙이가 보기 싫고, 거위가 보기 싫고 이렇다면 어떻게 내 몸을 이끌고 다닙니까? 그러니 그것도 존중해 줘야지요. ‘아! 그것도 나로구나. 나를 끌고 다니는 바로 너로구나!’하고서 한마음으로 인정을 해 줘야지요. 여러분이 인정을 해 주고 ‘너희가 모두,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나로구나!’하고 인정을 해 줘야 자기 죽이는 법이 없죠. 자기가 자기 죽이는 법은 없어요.

여러분이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따라가는 거니까 그걸 명심하시라 이겁니다. 자식도 잘못하면 “저 도둑놈의 새끼, 저놈의 새끼 믿고 가르쳤더니 나를 이렇게 한다.” 그러지만 그것도 그렇게 돼 있는 겁니다. 부모는 주는 게 부모지 받는 게, 달라고 하는 게 부모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주십시오. 거미의 부모도 자식들한테 다 주고 자기는 껍데기로 화해서 그냥 말라서 가루가 돼 버립니다. 어머니는 알을 낳아 놓고 그 자식들을 위해서 다 주고선 떠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아낌없이, 자식이 죽게 되면 생명을 대신해 주리만큼 그렇게 자식들을 귀하게 생각하면서 자기는 껍데기로, 껍데기로 껍데기로 이렇게 차츰차츰 변해 갑니다. 그렇게 자기는 껍데기만 남아서 나중에 함께 가자고 해도 자식들은 안 갑니다. 몸뚱이도 가지 않죠. 자기 따라 안 갑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고 아무리 부부지간에 사랑했다, 아무리 재산을 사랑했다, 집을 닦고 깨끗하게 잘해 놨다, 몸뚱이를 깨끗하게 씻고 바르고 온통 귀걸이를 달고 잘 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여러분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캠핑 와서 그저 조금, 먹고살기 위해서, 좀 놀다가 가기 위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풀잎의 이슬처럼 왔다가도 그냥 스쳐 가듯이 그냥 또 다 버리고 가는 거죠. 애들이 공기놀이를 하다가도, 내 땅 네 땅 하고 놀다가도 저녁때 엄마가 부르면 으레 다 버리고 툭툭 털고 일어서듯이 인생도 그렇단 말이죠.

여러분이 생각을 깊이 해서, 무한의 도리를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현실에서도 남의 뿌리를 싱싱하게 도와주십시오. 뿌리를 도와주면 이파리도 가지도 싱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한마음으로 도와주면서 건져 주면서, 자기가 예쁘다고 뿌려 놓은 씨도 건지면서, 사랑하는 부부지간에도 서로 도와 가면서 조화를 이루고 화목하게 한다면 젊은이들이 아마 스스로 첨단의 심성과학자가 돼서 우리나라를 능히 이끌고 나아갈 수 있는 주인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렇게 할 때, 저 풀 이파리 하나도 한마음 아닌 게 없이 그렇게 될 때 그 한마음 속에서 일꾼이 나온다는 거를 아셔야 됩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이 나라에 일꾼이 생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결처럼 스쳐 가는 그러한 논다니로서 정치를 하는 사람만이 생겨서, 부모가 잘못하면 자식이 고생하듯 우리 국민이 서로가 고생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자식들도 부모를 위해서, 부모가 그렇게 잘하도록 만드는 자식들이 되어야만이 우리 국민 속에서 그런 부모가 생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 쇳송 할 때 ‘오종대은 명심불망(五種大恩 銘心不忘)’이라고 종성을 하게 했습니다. 거기에 ‘오종대은’이라고 하는 그 멋있는 말씀은 너무나 광대무변합니다. 하다못해 지수화풍의 은혜요 국민의 은혜요 나라의 은혜요 국왕의 은혜요 사장(師長)의 은혜요, 부모의 은혜 형제의 은혜…, 이 전체가 은혜 아닌 게 없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공기가 없으면 한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건 무주상으로 주는 보시이기 때문에 아마 고마운 줄을 모르실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은혜롭지 않습니까? 그 은혜를 알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 당장 가지고 있는 내 몸을 낳아 주고 길러 주고 한 육의 부모의 은혜와 법을 가르쳐 주신 법의 부모인 부처님의 은혜가…. 그래서 육을 낳아 주신 부모의 은혜나 법을 주신 부처님의 은혜나 둘이 아니에요. 그건 왠 줄 아십니까? 부모도 자식을 기를 때 조건 없이 사랑하고 부처님도 조건 없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조건 없는 사랑은 바로 조건이 없기 때문에 자비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침 종성(鍾聲)의 뜻을 마음에 새기면서 여러분의 마음들이 모두 그렇게 해 나갈 수 있는 마음이라면 참, 앞으로 이 나라뿐만 아니라 여러분 가정에도 화목한 꽃이, 인꽃이 필 것입니다. 그리고 꼭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선악이 없다고 하시는 이유

질문 『법구경』을 보니까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비난만을 받는 사람도 칭찬만을 듣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으리라.”라고 쓰여 있던데요, 정말 그러한지요?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이 기본적인 사회 윤리인데 어찌 선도 악도 없다고 하시는지요?

답변 이거 봐요. 악과 선이 어찌 없겠소? 동시에 모두들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마음이란 놈이 도둑질도 시키고 좋은 일도 시키죠. 그러니 좋은 일 하는 사람이 좋은 일만 하는 게 아니고 악한 짓 하는 사람이 악한 짓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나타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찰나찰나 화해서, 착하던 사람도 앞에 딱 닥치면 어쩔 수 없이 나쁜 짓을 하게 되고, 또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딱 닥치면 좋은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러니까 좋은 일 하는 사람, 나쁜 일 하는 사람, 이것을 참선에서는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찰나찰나 바뀌니까 말입니다. 어떤 것을 나쁘다고 하고 어떤 것을 좋다고 하겠느냐. 마음을 바로 쓸 때는 이렇게 되고, 또 나쁜 상황이 앞에 딱 닥치면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옛날에 한 강도가 어느 수풀 속을 지나가는데 어떤 여인이 어린애를 안고 업고 걸리면서 엉엉 울고 가더랍니다. 밥도 못 먹였는지 “엄마, 밥 줘! 밥 줘!” 하고 울고 가는데, 참혹해서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강도가 아닌 척하고선 “어린애가 배고프다 그러는데 먹을 게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먹을 것도 없거니와 남편도 붙잡혀 가서 영 오지 않고, 그렇게 되니까 집이라고 있던 오막살이도 뺏기고 어디로 갈 데도 없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돈을 뺏어서 전대를 해 가지고 있던 거와 먹을 거 좀 훔쳐 뒀던 거를, 전대 돈은 가서 오막살이라도 하나 장만해서 먹고 살라고 주고, 자기 먹으려고 집어 온 거는 그 애들을 주고 그렇게 좋은 일을 하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허허허 웃으면서 ‘도둑질을 하는 놈 위에 또 나는 놈이 있구나.’ 아니, 얼마나 그것이 기가 막힌 말입니까?

또 한 가지 요거, 잠깐만 얘기하죠. 우리 신도가 집이 없어서 남이 금방 지어 놓은 집을 빌려서, “팔릴 때까지 들어가 살아라.” 그래서 들어갔답니다. 집은 좋지만 그냥 자기는 보따리 보따리 해서 다락에다 넣고선, 내일 아침에 애들 학교 갈 때에 먹일 것도 없고 차비 줄 것도 없으니 엄마가 그냥 속상하니까 부글부글 속을 끓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그 집이 좋으니까 도둑이 들어왔더랍니다. 하하하…, 뛰어넘어와 가지곤 다락을 통해서 방에 들어오려고 다락에 뛰어 올라갔는데, 거기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보따리 보따리만 있고 속을 풀어 보니까 헌 누더기, 이불 나부랭이, 살림 나부랭이 뭐, 이런 거거든요. 다락에서 도둑이 가만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안에서 “아이, 내일 아침에 애들 밥은 어떡하며, 차비는 어떡하면 좋은가?” 하고 타령소리가 들리거든요. 그러면서 하는 소리가 ‘주인공, 당신만이 이 애들을 학교를 보낼 수 있고 당신만이 먹일 수 있겠다.’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이 도둑이 들을 때에 ‘주인공은 뭐고?’ 허허허…. 주인공은 뭔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에 당장 어린애를 보내지도 못하고 먹이지도 못한다는 소리에 그만 이 도둑이 가슴이 좀 안됐다 이겁니다. 그래서 도둑질을 첫 번째, 두 번째 해 가지고 와서 세 번째 들렀는데, 그 도둑질해 온 거를 다락문을 가만히 열고 거기다 내놓고서는 다락문을 또 타고 나가면서 하는 소리가 “어이구 참, 기가 막혀. 이것은 도둑질하러 들어왔다가 되뺏기고 가네.” 이러더랍니다. 그러니 도둑놈이 어찌 도둑놈만이겠느냐 이겁니다.

그 사람이 이튿날 아침에 와서 깔깔 웃으면서 “스님! 주인공이 이렇게도 살리는 수가 있습니까?” 하는 겁니다. 세상에 도둑이 도둑질한 걸 갖다 줘서 애를 무난히 학교에 보내고 쌀 한 가마니 사고 또 연탄 사고 애들 등록금도 주고 이랬다는 겁니다. 이럴 수가 있느냐 하니까 “그러게 도둑놈을 도둑놈으로 보지 마라. 음? 모두가, 그저 죄가 뭐가 죄겠어? 다 모르는 게 죄고 순간순간 나오는 대로, 업식에서 나오는 대로 하는 거지. 그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야. 그리고 그 환경에 닥치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도 많아. 그러니까 외려 더 불쌍하지. 뭐 나쁘고 좋고가 따로따로 있겠느냐?” 이랬습니다. 그러니까 악과 선은 없습니다.

 

입력된 것이 잘 지워지지 않는데

질문 항시 둘 아닌 도리를 되새기고자 애쓰면서 무언의 대화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는 중에 특히 ‘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면 그것도 내 속에서 나온 습인 줄 알고 슬며시 놓아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습니다만, 어떤 때는 격한 감정이 솟구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자신도 모르게 저 잘난 소리를 마구 늘어놓다가 한순간에 나도 모르게 ‘어이쿠!’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스님께서는 늘 되입력하는 도리를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만 이렇게 먼저 입력된 것이 잘 지워지지 않는 경우는, 말하자면 습이 워낙 중한 까닭인지요? 아니면 되입력하는 마음의 힘이 약한 때문인지요? 놓고 또 놓는다고 하면서 되나오고 되나오니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그건 입력이 안 됐기 때문에 되나오고 그러죠. 그것이 말입니다, 자기한테 자기가 자꾸 따지는 버릇을 갖는다면 습입니다, 그게. 자기한테만 따지는 게 아니라 상대방한테도 따지죠, 일일이. 그게 왜냐하면요,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몸속에 자기가 다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과거는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속에 전부 들어 있습니다. 들어 있는데 거기서 솔솔, 그저 이때 한 거는 이때 나오고 저때 한 거는 저때 나오고, 그냥 입력된 대로 순서대로 착착 나옵니다. 이거 거짓말 아닙니다. 착착 나오는데 그 나오는 의식들이 수가 없습니다. 그 의식들이 입력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게 자꾸자꾸 거기서 나오는 대로 나오는 그것만 알지, 그것이 잘되고 잘못되는 거를 모르는 중생들입니다, 이게 업식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대로, 그놈도 거기서 나온 거, 그놈도 거기서 나온 거, 그놈도 거기서 나온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 어느 수좌가 동짓날 큰 솥에다 팥죽을 쑤는데 팥죽이 부글부글 끓어서 팥죽 방울이 수없이 나오거든요. 수없이 나오니까 퍼뜩 그 생각을 한 겁니다. ‘아, 우리 몸뚱이 속에 있는 팥죽 방울이 이렇게 나오는구나. 그러니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되겠구나. 방울대로 따로따로 있는 줄 알고 했는데 아이고, 한 팥죽 솥에서 나오는구나!’ 하고요. 이제 아시겠죠? 한 팥죽 솥에서 방울이 나오는 거지 팥죽 솥이 따로 있어서 방울이 나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요것도 문수 요것도….” 자기 법이란 얘기죠. 법신! “요것도 법신 요것도 법신!” 하고는 주걱으로 때렸단 말입니다. “이것도 문수 저것도 문수!” 하고 그저 때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가 스스로 익는다면 벌써 팥죽은 다 익었으니까, 열기가 더 오르지도 않고 더 내리지도 않고 아주 평상시처럼 따뜻하게만 하고 가거든요. 그러니까 팥죽 방울이 올라오지 않죠. 모두가 하나가 돼 버렸으니까, 그냥 모두가 팥죽이 돼 버렸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듯이 모든 것을, 거기서 어떠한 뿔따구가 나오든지, 또 자기에게 누가 되게끔 생각이 나오든지, 또 집안 식구들한테 짜증이 나든지, 또 자식이 잘못해서 속이 상하든지, 모든 것을 거기다가 그냥…. 그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그것도 거기서 나오는 거, 자식의 일이든지 뭐든지 다 거기다가 맡겨 놓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나오는 걸 거기다가 맡겨 놓을 때, 동시에 “흥, 이렇게 나오는 거라면 돌아서 잘 나오게도 할 수 있잖아!” 하는 생각이 아주 필연적으로 따라다니지 않습니까? ‘안되는 일도 거기서 나오는 거라면 되게 할 수 있는 일도 거기서 나올 수 있잖아?’ 하고 돌려놓는 겁니다.

속에서 이렇게 뿔따구가 날 때, 아니 불이 일어나게끔 나올 때 ‘불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도 바로 거기 아닌가?’ 이럴 때는 아주 선선하게 이 마음이 곧바로 화해 가지고는 아주 좋게 나옵니다. 즐겁게 나옵니다. 웃음도 깔깔대고 웃다가 ‘아이고, 이거 안됐잖아?’ 하는 생각을 하면 웃음이 뚝 멎죠? 허허허…. 그렇게만 하신다면 모든 게 아주 더함도 덜함도 없는 잘 익은 팥죽이 돼서 맛있게 맛을 볼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라는데

질문 저의 친구 중에 불교를 오랫동안 신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친구가 있어서 제가 어려운 일에 직면해서 고충을 토로했더니,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모든 액난이 소멸되고 원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진다고 관세음보살 염불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종교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하나님한테 기도하는 것과 관세음보살님께 염을 하는 것이 어떻게 다를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답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오고 나서야 상대가 있는 것을 알지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상대가 있고 세상이 있고 가정이 있고 이런 것을 알겠습니까? 먼저 여러분이 이 세상에 형성이 돼 있기 때문에 부처도 있고 상대도 있고 세상도 있고 우주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대 성인들, 부처님으로부터 조사들이 모두 말씀하시기를 “못났든 잘났든 너 먼저 알아라.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는 거지 네 나무가 딴 나무를 믿어 봤자 에너지가 이쪽으로 오지 않느니라.” 하셨습니다. 지금 말로 통역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 무제가 그렇게 부처님을 믿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달마 대사가 공덕이 하나도 없다고 했으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금 기독교나 가톨릭교나 불교나 전부 기복이에요. 자기를 쑥 빼고 타의에서 찾거든요. ‘주여!’ 하는 것도 (가슴을 짚으시며) 여기에 자기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주처가 있는 거를 알아야 될 텐데 자기를 쑥 빼놓고 바깥으로 ‘주여!’ 하고, 부처님을 믿는 사람도 역시 자기를 쑥 빼놓고 ‘부처님!’ 한단 말입니다. 아니, 자기가 있기 때문에 부처도 있고 부처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있는 거지 자기가 없는데 무슨 부처가 있고 세상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항상 타의에다 바라면서 해 달라 그러고 형상과 이름만 믿고 이 부처님 이름 부르고 저 부처님 이름 부르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뭐, 별 부처님 이름을 다 부르고 그런다면 공덕이 될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공덕이 없느냐? 지금 이 세상 사는 나의 마음과 과거로부터 수억겁을 살아오면서 진화를 시키고 형성시킨 장본인이자 주인인 자기 참뿌리와 통신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참뿌리는 싹이 나오게 합니다. 그래서 자기 몸뚱이를 형성시켰죠. 자기 몸뚱이를 형성시켜서 자기가 이끌고 다닙니다. 때로는 보디가드가 되고 때로는 안에서 일어나는 걸 대치를 해 주고 모두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참(眞)자기와 가(假)자기가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차와 운전수가 콤비이듯이, 나무들과 뿌리가 콤비이듯이 사람도 자기 영혼의 근본 뿌리와 몸이 콤비입니다. 그러니 못났든 잘났든 자기 뿌리를 믿어야지 그 나무가 딴 데 형상을 믿고 딴 데 이름을 믿고 딴 데 이름을 부르고 아무리 외치고 기도를 해 봤자 그건 공덕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통신이 되지를 않아요. 부처님의 통신은 자기의 근본 주처인 그 뿌리라고 하는, 주인공이라고 하는 거기서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들이고 내는 자리도 거기요 통신하게 되는 것도 거깁니다.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같이 직결이 돼서 통신이 되는 것도 거깁니다.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이 세상 만물만생하고도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광대무변한 내 주처인 자신의 뿌리를 그렇게 무시하고 형상이나 이름을 믿고 찾는다면 자기는 언제까지나 이 중세계의 생사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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