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종호 스님 (동국대 불교대학장)

▲ 종호 스님은 … 1974년 해인승가대학 강원을 졸업한 종호 스님은 1986년 동국대 불교대학 선학과를 졸업한 후 1988년 동대학원 선학과 졸업, 1994년 동대학원 선학과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및 불교대학원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본래열반 무루지혜의 상태

오늘 법회 주제는 ‘생활 속에서의 수행’입니다.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연결시켜 수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수행을 말씀드리기 전에 이론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경전이나 조사 어록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우리의 본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보적경이나 능가경에서는 “일체중생은 본래의 열반이며 무루지성 본래구족”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능가경에서는 일체중생이 아닌 일체제법이 본래의 열반이라고 합니다. 차이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일체중생 본래열반’은 모든 생명체는 본래 열반 상태에 있다는 뜻이며 ‘일체제법 본래열반’은 생명체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 즉 무생명체를 포함해 본래 열반의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루지성 본래구족’은 어떤 의미일까요? 한없는 지혜, 무루의 지혜가 본래 완전히 구족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풀이하자면 모든 중생은 본래 열반의 상태에 있으며 한없는 지혜가 원래 구족되어있는 존재입니다. 어록에서는 우리가 본래 태양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태양이 단지 구름에 가려져 있는 것뿐입니다. 본디 태양처럼 밝고 환해서 조금의 어둠도 없는 완전한 존재이지만 번뇌 미망이라는 구름에 덮여 태양의 밝음이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중생신중의 금강불성입니다. 중생은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으로 덮여 있어 밝은 태양이 드러나지 못하는 소위 중생으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본래 자신이 갇혀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잘 믿지 않습니다. 이유인 즉은 구름의 두께가 워낙 두터워서 구름이 있다는 것조차 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본래 부처이며 한없는 지혜가 갖추어진 존재라는 것은 불성이라고도 합니다. 불성은 초기 경전부터 후대 조사 어록에 이르기까지 일관하여 흐르고 있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저는 불성을 여래장, 진성, 자성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열반경에서는 “연기가 곧 법이며, 또 불(佛)"이라고 하며, 잡아함경에는 "법을 아는 자 나를 보고, 나를 아는 자 법을 본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불성이 제일이며 열반이고 중도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불성이 바로 인간 본래의 면목이라는 것인데, 먼저 존재의 형태로 말할 수 있습니다. 불성은 어느 문자나 어느 형상으로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된 적도 없으며(無始),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항상(恒常)합니다. 즉 불성은 모든 일체 번뇌의 뒤덮임과 쌓임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체 모든 주생은 이러한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원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본래 원하는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흑운(黑雲)에 가려있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또 한없는 모든 공덕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무량(無量)하다 할 수 있습니다. 공덕이라는 것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 한계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으로, 쓸수록 바닥이 나는 유위(無爲)한 것과는 다릅니다. 또한 구경청정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받을 때 그 사람 마음에 어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내재돼 있다면 청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었을 때 진정한 선이 집적이 됩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성이나 지혜는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것,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으며 샘이 없는, 그야말로 한없는 공덕과 지혜로 갖춰져 있는 것이 불성이며 자성, 여래장입니다. 이것을 여러분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래가 여래의 지혜를 가지고 여래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생이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본래 부처였기 때문에 부처 안에 들어있는 지혜를 드러내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부처가 다시 부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여래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일문천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를 제대로 들으면 모든 것을 전부다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 아마 여러분은 그런 것들이 어쩌면 연결이 되어 있을 수도 있고 어느날 문득 나도 모르게 정말로 섬광처럼 내 몸을 스치고 가면서 그런 느낌이 올 수 있지 않나.

 

불성 체득의 두 가지 방법론

불성의 체득은 ‘수행’입니다. 오늘날 간화선·위빠사나·명상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간화선은 전통적으로 고려시대 보조 지눌 스님에 의해 발전된 수행법이며, 위빠사나는 80년대 한국에 들어와 유행한 수행법, 명상은 2000년대 무렵부터 급속히 확산된 방법입니다. 이 수행법들은 지향하는 목표는 같을지라도 방법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으나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묵조선이 있습니다. 묵조선은 중국에서 많이 행해집니다. 또 다른 형태로서의 지관선은 불교의 모든 경전 이론과 수행체계를 정리를 해서 수행으로 만들어낸 방법으로 아주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며 핵심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일단 이런 수행법들을 정리해 보면 대체적으로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직입이라고 해서 곧바로 들어가는 방법, 또 하나는 단계적이며 우회적으로 수행의 역량을 높이는 방법입니다. 명상이나 위빠사나는 점차적으로 해 나가는 우회적인 성향을 더 강하게 띈다면 간화선·묵조선은 곧바로 근본에 도달하는 직입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묵조선은 간화선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부처로서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는 것을 지향하는 반면 간화선은 화두의 타파를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할 것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한편 지관선은 직입과 우회적인 방법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완전한 존재임을 자각할 것

다음은 수행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수행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발심입니다. 어록에서는 발무상보리심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진실로 내가 이 공부를 해야겠다는 발심이 있을 때 공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필요성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절이나 기도를 할 때도 간절한 필요성과 있어야 진정한 발심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간화선에서는 어린아이가 엄마 생각하는 것처럼 혹은 목이 타들어갈 때 물을 찾는 것처럼 간절함과 긴급함,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흔히 말뚝신심이라고 하지요. 그것 또한 간절함에서 비롯됩니다. 근기로 얘기를 하자면 상근기일 때 가능한 것이며, 하근기일 경우에도 간절하고도 절박한 마음을 내었을 때 그 순간 그 사람도 상근기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을 보고 발심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부처님 가르침, 자기 자신의 변화, 세상의 변화 등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습니다. 어떤 계기로든 강한 발심이 있을 때에 수행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얼마만큼 간절하고 긴박하게 발심하고 있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선지식입니다. 선지식은 세상에 많고도 많지만 만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능가경에서는 부처님이 보살들을 이끌어줘야 그 보살들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은 중생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중생이 무언가를 해보려고 해봐야 안목과 역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선지식은 대단한 영향이 있습니다. 공덕이라는 것은 일체 무량의 공덕이지만 선지식의 힘, 즉 법력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지식에게는 무형의 기운이 있습니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어서오너라, 비구여”라고 말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아라한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얼토당토 않는 말 같지만 이해를 해보면 부처님에게는 중생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그 기운, 공덕이 있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내 정신적 육체적 구조가 그 힘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직입 수행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무한한 복덕을 갖춘 존재이니 그 본성에 바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묵조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본래 부처님이니 좌선수행을 통해 그것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본증자각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중생의 모습이고 세상에는 많은 고통이 있으니 그런 것들을 조금씩 제거해서 행복으로 가까이 이르겠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번뇌를 제거할 필요 없이 본래 내 참 모습을 발견해 그것에 일치해 살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을까요? 내 자신이 본래 근심걱정 없는 완전히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자각하고 믿고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한 치의 의심도 없어야 합니다. 내 안에 무한 공덕이 갖춰져 있고 복혜가 충만한 존재라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활 속의 수행입니다. 생활 속에서 수행은 부정적인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털어내고 바꿔야할 것이 없습니다. 인생에 불행과 슬픔은 없고 오로지 나는 행복한 존재라는 것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이것을 수행하면 내 몸에 좋은 기운이 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기분이 좋으면 행동도 가벼워집니다. 불성을 깨우는 것을 현실 속에서 실천해 해보니 실제로 생활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이 직입의 수행을 조금 변화시켜서 ‘나는 본래 완벽한 존재’라는 것에 사로잡혀보는 것도 좋은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좋은 영향이 다른 사람에게도 미칩니다. 과학적으로도 좋은 호르몬과 뇌파가 발생되어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미칠 수 있습니다. 5분 간 좋은 생각은 6시간 동안 좋은 호르몬이 생성된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화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5분 간 나쁜 생각을 하고 화를 내면 6시간 동안 부정적인 기운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니 ‘나는 행복한 존재’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내 몸만의 변화가 아니라 상대에게도 긍정적인 기운이 전달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을 하면서 한 두 사람이 집중하게 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참선에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스스로 변하십시오. 불성이 드러난 존재가 최고로 행복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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