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 스님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실천하셨다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는데

온힘을 바쳐 진심을 다하셨다

 

▲ 광덕 스님의 진영을 제작하기에 앞서 스님의 독경하시는 모습을 먼저 그려 붙여 놓았다. 스님의 독경 소리는 진영 작업을 하는 내내 내 마음 속으로 파고들었다.

십여 년 전, 나는 범어사 진영각에 모실 광덕·지효 스님의 진영을 의뢰받아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그림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범어사를 찾았다. 그러나 내가 도착했을 때 진영각은 신축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그림은 찾을 수 없었다. 서운한 마음에 진영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던 찰나,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박물관 학예사는 두 스님의 진영이 박물관에 없다며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허탈했다. 범어사는 용성 스님과 동산 스님을 중심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기라성 같은 선승을 배출한 기백 있는 문중이 아니던가. 나는 범어사 문중의 위대한 스님들을 그렸다는 자부심도 컸다. 그리고 근현대사의 큰 스님들을 모시는 일을 어느 절에서도 시도하지 않았기에, 내심 범어사의 생명력 있는 법맥을 기대하고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여지없이 깨졌다.

나는 광덕 스님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대학생 때부터 대불련 활동을 통해 스님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직접 몸으로 확인했다. 불교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천착해 들어갔던 시대를 아는 분이었다. 스님께서 열정을 쏟았던 월간 〈불광〉도 현실의 삶을 긍정화 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 대학과 군 생활 그리고 교사시절에 이르기까지 〈불광〉지는 나의 또 다른 삶이었고 희망이었다. 나아가 마음의 창이었고 한량없이 정신적 자유를 누리게 하였다.

1999년 2월, 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시대의 사표가 되었던 스님을 잃은 슬픔이 컸다. 그리고 또 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광덕 스님이 나의 기억 속에 불쑥 등장하셨다. 2000년대 초 성철, 관응, 일타 스님 등 선화 작업을 진행 하던 중 우연히 스님의 다비식 장면을 사진으로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그분의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무척 당황스러웠다. 익히 보아온 그 잘 생기고 온화하며 맑은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얼굴과 몸이 맞지 않은, 전혀 다른 모습의 사진이 사용된 것이다. 얼굴은 스님인데 몸은 아니었다. 거듭 바라보니 성철 스님의 몸에 얼굴만 광덕 스님으로 조합한 모습이었다. 생전에 성철 스님께서 광덕 스님을 아끼셨고 실력을 인정해 준 사이라 하지만 광덕 스님은 광덕 스님인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진을 보고 슬픔이 밀려왔다. 무례함에 화가 나기도 했다. 광덕 스님의 영정사진은 나에게 슬픔과 어두운 그림자를 진하게 남겼다.

또 몇 해가 지났을까. 어느 날 불광사 주지이신 지정 스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광덕 스님 초상화에 대해 상의할 일이 있으니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스님께서는 광덕 스님 초상화를 정통성 있는 그림으로 모시고자 하여 불화 인간문화재이신 석정 스님께 소개를 부탁했더니 대뜸 “좋은 화가가 한명 있는데 그 화백이 한다고 허락하면 믿어도 될 것이다”며 나를 적극 추천했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굴과 몸이 맞지 않았던 광덕 스님의 영정사진을 떠올렸다. 그래서 스님의 부탁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스님다운 모습의 사진 자료와 스님과 비슷한 체구를 가진 스님을 모델로 세워 스님을 추상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나는 최선과 정성을 다해 진영작업을 하겠다고 했고 지정 스님께서도 내가 원하는 대로 돕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곧장 불광사를 찾았다. 절에 도착하자마자 대웅전에 들러 예의를 갖춘 뒤 주위를 둘러보니 광덕 스님의 진영이 이미 그려 있는 게 아닌가? 진영이 있음에도 또 모신다는 것은 진영을 의뢰한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진영을 그린 작가가 작품이 회수당하거나 거절당했을 경우 그 작가가 감내해야 할 절망감을 생각해 보니 마음이 아파왔다. 그래서 나는 지정 스님께 진영을 다시 그려야 하는 이유를 물었고, 만약 그려야 한다면 이미 그린 분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스님께서 “범어사 진영각에 스님의 존영을 보내야 한다. 진영은 스님의 외모보다 스님의 어진 이미지가 잘 표현 되어야 한다. 전통성이 있는 방식으로 그리되 가장 단순한 형식이 필요하다. 스님의 삶이 그렇듯 깨끗한 스님의 이미지가 드러난 그림을 그려 달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광덕 스님의 영정 사진을 보고 스님께 가졌던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던 터라 스님의 삶과 생활에 대해 주지 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는 그림을 넘어 우리시대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아직까지 스님의 정신이 유효한지 스님께서 다시 현현한다면 어떤 일을 계속 하실 것인지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런 후 나는 집에 돌아와 광덕 스님을 회상해 보았다. 스님은 철저히 계율을 지킨 분이다. 대각사에 계실 때 종로 거리에서 도량석을 하신 분이셨다. 스님은 평생 책을 읽고 쓰며 지혜를 위한 공부에 평생을 바치셨다. 〈불광〉지에 실린 대부분의 글은 스님의 손을 거친 글이다. 스님께서는 도서 편찬 간행 사업도 활발히 진행했다.

부처도 깨닫기 전에 내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 했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지혜를 구하려 했듯, 스님은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실천하셨다. 불교가 더 이상 시대에 뒤 떨어진 종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또 부처의 법을 널리 펼치는데 온힘을 바쳐 진심을 다하셨다. 포교의 중요성을 실천하셨다.

또 스님은 잘 생긴 수려한 외모, 맑고 청아한 눈빛, 밝은 안색 등을 특기로 매우 격조가 있으신 분이었다. 스님의 이목구비는 반듯했다. 항상 웃으셨고 미소를 머금으셨다. 음성은 맑고 청아 했으며 낮았다.

내가 기억하는 스님은 이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입적하시기 전의 모습을 보니 많이 달랐다. 나는 스님께서 많이 아프셨다는 짐작을 했다. 병약했고 몸도 균형이 부족해 보였다. 병 때문에 여러 번 병원 신세를 진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고 공부에 매진하다 몸이 쇠약해지신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포항에 계실 때 참선에 몰두했던 일이 생각났다. 이 때의 생활이 스님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놓친 것이 있다. 죽음까지 불사하며 공부에 매진했다는 점이다. 이런 분이 얼마나 되던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끝단까지 밀고 간 숭고한 의지의 정신. 나는 불현 듯 스님을 다시 만나보고 싶어졌다.

 

▲ 모든 사물은 각각의 존재 방식이 있다. 무꽃은 그 뿌리가 땅 속에 있을 때만 피는 게 아니다. 썩은 무에도 봄은 있다. 스님께서는 차별이 없는 삶을 실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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