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불교경전에서는 불탑을 조성할 때 층수의 홀수와 짝수의 제한을 두지 않았다.
〈십이인연경〉에 의하면, ‘여덟 부류에 속하면 탑을 세울 수 있나니 첫째는 여래(如來), 둘째는 보살(菩薩), 셋째는 연각(緣覺), 넷째는 아라한(阿羅漢), 다섯째는 아나함(阿那含), 여섯째는 사다함(斯陀含), 일곱째는 수다원(須陀洹), 여덟째는 전륜왕(轉輪王)이다. 전륜왕 이하의 부류는 탑을 세우되 하나의 노반(露槃:層)만 둘 수 있으며, 친견은 하되 예배를 할 필요는 없나니 성탑(聖塔)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과(初果)는 2노반(二露槃:二層), 이과(二果)는 3노반(三露槃), 삼과(三果)는 4노반(四露槃), 사과(四果)는 5노반(五露槃), 연각(緣覺)은 6노반(六露槃), 보살(菩薩)은 7노반(七露槃), 여래(如來)는 8노반(八露槃:八層)을 둔다. 8노반 이상이면 모두 불탑(佛塔)이다’라는 경설이 있다. 이에 따르면 초과(須陀洹), 삼과(阿那含), 연각(緣覺), 여래(如來) 등의 탑은 모두 짝수에 속하는 셈이다.
이처럼 불교경전의 내용에 근거한 짝수 층인 10층의 불탑이 우리나라에서는 조성되어 현존하고 있다. 국보 제86호인 ‘경천사지10층석탑’과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10층탑’ 조계사 세존사리10층탑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1층 역사의 길에 복원되어 있는 경천사지 10층석탑〈사진1〉에 대하여 먼저 알아보자. 이 불탑은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에 개성 부소산 자락의 경천사에 조성되었던 10층탑이다. 이탑의 건립 연유에 대해서는 현재 1층 탑신석 창방 부분에 남아 있는 명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명문에 의하면, ‘대화엄경천사에서 원나라 황제와 태자전하의 만만세, 황후폐하의 천추만세 등을 축원합니다. 비가 순하게 내리고, 부처님의 태양은 더욱 빛을 발하고, 법륜이 항상 전하기를 축원합니다.… 지정8년 무자년 3월’이라는 내용이 음각되어있다. 즉, 원나라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국태민안하여 불법이 성하여 수복을 이루기를 발원하고 있으며, 대시주는 강융(姜融)과 고용봉(高龍鳳)이며, 대화주는 성공(省空)스님, 시주는 육이(六怡)스님이 담당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예종12년인 1117년에 숙종의 기제사를 경천사에서 봉행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절의 창건은 탑의 조성보다 최소한 230년이 앞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탑이 조성되던 고려의 사회적 상황은 원나라와 부마관계를 맺고 심한 내정간섭을 받던 시기였다. 특히 친원세력들이 득세를 하였는데, 출세를 위해 자청하여 원의 환관이 되어 당대에 권세를 누린 이들이 적지 않았다. 대시주의 하나인 고용봉(?~1362)도 원의 환관이 되어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간 기자오(奇子敖)의 딸을 원순제의 황후로 등극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최근에 모 방송국에서 ‘기황후’라는 사극을 방영하였는데, 극중의 고용보가 바로 고용봉과 동일 인물인 것이다. 이러한 고용봉은 원나라와 관련된 많은 사찰에 불사를 후원하였지만, 원나라 황실의 후광을 믿고 ‘횡포가 심하여 못하는 짓이 없을 정도이다!’ 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원성이 높았다. 결국에는 해인사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지만 그 동안의 죄질이 너무 심하다 하여 공민왕 때 처형당하게 된다.
한편 대시주의 또 다른 인물로 명문에 기록되어 있는 강융(?~1349)은 본래 관노(官奴)출신으로 충선왕과 충렬왕의 왕위쟁탈전 때 충선왕의 측근으로 큰 공을 세워 부원군으로 봉해질 만큼 실세를 누리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딸을 원나라 승상 탈탈(脫脫)의 애첩이 되게 하여 더욱 권세를 누볐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강융은 경천사를 탈탈의 원찰로 삼고, 원나라에서 장인을 데려다 이 탑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친원세력에 의하여 조성된 이 10층탑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고려의 불교문화와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조형성을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뛰어난 경천사10층탑은 일제치하에서 비운의 운명을 시작하게 된다. 1902년 동경제국대학공과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1867~1935)는 일본 정부의 명을 받고 우리나라 전역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1904년에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경천사는 황량하게 폐사되었고 오직 석탑 1기만〈사진4〉 남아 있다고 하였다. 보고서 발표 후 3년이 지난 1907년 순종의 결혼식에 일본 특사로 참석한 궁내대신 다나까 미스야끼(田中光顯:1848~1939)는 당시 서울에서 골동품상을 경영하던 일본인 ‘곤도사고로(近藤佐五郞)’에게 이 불탑을 일본으로 무단반출을 지시하였다.
더구나 일본에 도착한 탑의 부재들은 바로 조립되지 못하고 제실박물관 한쪽에 포장도 풀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불탑반출에 대한 부당성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한 사람은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 교육사업의 근대화를 위해 파견된 헐버트(1863~1949)와 영국인 베셀(1872~1909)이 각각 월간지 ‘코리아리뷰’와 ‘대한매일신보’등에서 현장을 방문하고 약탈사실을 폭로하였다. 그 결과 일본 내에서도 다나까 미쓰야끼의 비판여론이 커지고, 국제적인 거센 반환 요구에 힘입어 현해탄을 건넌지 11년이 지난 1918년 11월 15일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로 반환된 이 불탑은 무분별한 해체와 운반과정에서 심하게 훼손되어 복원되지 못하고 경복궁 회랑에 옮겨져 부재가 방치되는 비운의 운명을 다시 맞게 되었다. 그러다 1960년 당시 국립박물관 학예관 이었던 임화봉(임천:1908~1965)선생의 노력으로 경복궁 전통공예관 앞뜰에 복원 될 수 있었다.〈사진5〉
이 때 결실된 부재들은 시멘트 몰탈로 복원되고 중앙의 적심부는 작은 자갈을 섞은 시멘트 몰탈 등으로 채워졌다. 1962년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어 고려시대의 위용을 되찾는가 싶었는데, 시멘트 몰탈이 풍화가 심해지고 비둘기들의 배설물 등으로 인하여 환경오염에 노출되어 대책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1995년 4월에 이 불탑은 또다시 해체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의 주관으로 풍화된 시멘트 몰탈의 제거와 결실된 부분의 복원, 오염물 세척 등의 정밀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2005년 8월 9일에 국립중앙박물관의 현재의 위치에서 재조립되어 낙성식을 봉행하게 되었다.
다음호에는 계속해서 조선시대에 조성된 ‘원각사지10층석탑’과 최근에 조성된 조계사 대웅전 앞 ‘세존사리10층탑’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