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후)

집착을 놓고 자유로움을 찾는 것

물질적 욕망을 내려놓지만

자족, 검박, 만족하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 무소유일 것이다.

 

▲ ‘나무꾼 대선사’ 불교는 당신한테 있습니다. 당신한테 있는 불교를 찾으십시오

최근 많은 시간을 내 자신을 위해 투자했다. 혼자 명상에 잠긴 적이 많았다. 자기 삶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런 여유를 갖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단단함이 있다는 것이 힘이었다. 돌이켜보니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나의 삶과 인간을 이해하고 나아가 나를 통해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독한 시간이 자기와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자기 스스로 담론하고 덜어내면서 진취성을 잡아내는 시간이었다. 어쩌면 자유로움에 대한 동경은 스스로에게 체화 되도록 이끌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스님께서 남긴 글들을 읽으며 불현 듯 지나 온 경험의 잔상이 떠나지 않았다. 농사철이다. 농부는 모를 심기 위해 흙을 갈아엎고 물을 댄다. 논바닥을 고르게 하기 위해 써레질을 하고 한편으로 논물이 새 나가는 구멍을 메우며 논둑을 다듬는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마친 후 아버지께서는 논 가까이에 있는 대나무를 낫으로 툭툭 거칠게 쳐 준비를 마친 논에 세운다. 그리고 대통 속에 물을 채우고 논 주변에 개울가에 핀 찔레꽃 가지를 잘라 꽂아 놓았다. 어느 때에는 삐비 꽃을 꽂아두기도 했다. 대통은 천연 꽃병이었다. 나는 이런 행위에 대해 물어 보지는 않았다. 그저 농사를 짓기 위해 준비가 끝난 논에 대한 정갈함과 생명의 아름다움 그리고 희망을 표시한 것으로 생각했다. 다르게는 길섶을 지나는 사람에게 화심을 전달하자는 의도도 있다고 추정할 뿐이었다. 모두가 생활의 건강함이요 아름다움이다. 생활 현장에서 느끼는 일상의 맑고 투명한 마음들이다.

나는 이 일상적인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농사 준비를 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이런 행위를 보았고 느꼈을 뿐이었다.

어느 해인가 아버지께서는 이런 연례행사에 대해 말씀하셨다.

“자기가 소유하고 일을 하는 공간에 대한 공경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다.”

아, 자기 공간에 대한 존심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참 아름다웠고 경건했다.

나는 법정스님의 글들을 읽으며 이런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자기가 인식한 것, 좋다고 생각한 것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 이미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편견이다.

속세란 자기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상대가 있지만 오욕칠정의 파도 속에서 울고 웃는 것이 아닌가? 같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소유로 만들어 버리는 현실이 학교이고 삶의 교과서이다.

집착을 놓고 자유로움을 찾는 것, 물질적 욕망을 내려놓지만 자족, 검박, 만족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무소유 일 것이다.

무소유, 불교적으로 보면 성립하기 어렵다. 부처는 한쪽으로 치우쳐 말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불교는 어떤 것도 인정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정 스님께서는 무소유라 했다.

법정 스님은 충분히 가질 수 있었으나 갖지 않았고 높아질 수 있었으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은일했다. 안으로는 마음의 여유를 얻고 고고함을 지켰다. 삶은 깨끗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자존심과 정신의 자유를 만족시켜 주며 누리게 했다. 스님은 버리고 떠났지만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스님은 맑게 살면서 맑음을 찬양했다. 더러운 것을 지적하며 더럽게 사는 것을 쳐 내는 역할을 했다.

자신의 삶과 유리되지 않고 갇혀있는 자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그러면서 안으로는 공고해지나 밖으로는 한없이 경계를 허무는 자유자재의 삶은 자기 수행의 결과일 것이다. 그것이 자기 향상이고 희망이며 긍정이다.

나는 스님의 말씀을 덮으면서 우리 시대에 스님과 같은 대선사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 여전히 법정 스님의 정신은 유효하다. 나의 이런 희망이 나무꾼 대선사를 그리게 했다.

내가 만난 나무꾼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였다. 칭찬과 고마움도, 원망도 추켜세움도 없고 자연을 낮추어 보지도 않았다. 때 되면 밥 먹고 시간되면 산에 나무하러 간다. 이런 생활이 편하고 바랄 것이 없다. 시비나 고저장단도 없다. 자기 본분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고뇌나 번뇌가 없다. 삶이 그렇듯 그저 죽음에 대해서도 충실할 것이다. 그림자를 벗 삼아 무정한 사물과도 교유하는 삶, 세상 어느 곳이나 모두가 도량이고 수행처이다. 대 해탈이고 윤회이고 자유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대선사가 있다.

 

▲ ‘관음’ 풍경은 고양이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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