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감사편지 우수상-류소영의 <사랑하는 당신, 준협 씨>

내 삶을 바꾼 당신, 그리고 지금은
곧 태어날 아기의 아빠가 될 당신,
당신을 보면서 꿈을 꿉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당신에게 더 가까운 사람으로…

 

▲ 그림 강병호

당신, 어느덧 4월도 반이나 지났습니다. 해사하게 피어나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던 벚꽃도 어느덧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고 있습니다. 떨어지는 벚꽃을 보면, 누군가는 아쉬워하겠지만, 나는 막 피어나는 벚꽃보다도 더 반갑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과의 아름다운 추억 때문입니다.

학창시절, 윤리 교과서를 넘기다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이 멋있게 느껴져서, 종이에 적어 책상 앞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말을 머리로만 받아들였을 뿐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나 봅니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던 스물일곱 살 가을, 사법시험에 붙겠다는 꿈을 안고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갔습니다. 당신을 처음 만난 곳도 바로 그곳이었지요. 단지 멋지게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시험이었으니, 공부가 잘될 리 없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당신은 내게 좀 더 성실해지라고 충고했습니다.

성실이란 ‘온종일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이라고 여겼던 나는, 공부에 매달리기는커녕 고민이 있으면 들어 주고,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구해 주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나눠 주는 당신이 도리어 불성실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성실이란 ‘온종일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것-사람을 대할 때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 마음을 다하고,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는 것에 마음을 다하고, 책을 볼 때는 책을 보는 것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었다는 걸 말이에요. 그러니 당신 눈에는, 놀 때 공부 걱정을 하고 공부할 때 놀 궁리를 하며 마음만 바빴던 내가, 얼마나 불성실한 사람으로 보였을까요?

당신, 2012년 사법시험 1차 합격자 발표 날을 기억하나요? 그해는 당신과 내가 마지막으로 사법시험에 도전한 해였습니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 날, 명단에 당신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때 당신의 나이는 서른넷이었습니다.

내가 붙었다는 안도감보다는 당신이 떨어졌다는 막막함에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딱 하루만 울더니, 이튿날 벚꽃을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늦은 오후, 활짝 핀 벚꽃을 보러 여의도 윤중로에 찾아갔지만, 벚꽃은 이미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벚꽃을 보니 내 꿈마저 시들 것만 같았습니다. 붙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나는 이미 사법시험 2차를 포기하고 있었지요.

넉넉하지 않은 형편, 늦은 나이, 무엇보다도 아픈 목이 내 마음을 힘들게 했습니다. 하루 12시간을 공부해도 합격하기 어렵다는 시험인데, 목이 아파 의자에 한 시간 앉아있는 것조차 힘든 내가 과연 합격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가장 큰 착각은 자신이 무언가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처음부터 가진 건 없어. 그러니 버리면 돼. 버리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흩날려 떨어지는 벚꽃 아래서, 벚꽃보다 해사한 얼굴로 당신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난 몇 년 동안 성실히 살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사법시험을 그만두고 취업을 준비하겠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내게 남은 시험을 성실히 준비하라고 말했습니다. 돈, 명예, 건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나이가 많으면 많은 대로 목이 아프면 아픈 대로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다 보면, 그 결과가 꼭 합격이 아니어도 괜찮다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시들 것만 같았던 내 꿈이 다시 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당신은 알까요?

그 뒤, 돈이 없다고 걱정하는 것도, 나이가 많다고 푸념하는 것도, 건강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다 그만두었습니다.

나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마음먹었지요. 병원에 다니는 대신, 아침, 저녁으로 108배를 하면서 마음을 비워 나갔습니다. 목이 아픈 탓에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여유로웠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듬해 사법시험 2차를 치르고 돌아온 날, 당신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습니다. 시험을 잘 봐서도 못 봐서도 아니었습니다. 붙을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냈다는 기쁨, 이제 사법시험을 내려놓고 다른 길을 갈 수 있겠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당신과의 결혼을 서두르고 있을 무렵, 뜻밖에 사법시험에 최종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법시험에 붙고 나서도 내 삶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 삶은 사법시험에 붙고 나서가 아니라, 당신을 만나고 나서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오랜 연애 끝에 결혼까지 했는데 어떻게 변함없이 사이가 좋을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나는 활달하고 당신은 차분하니까, 혹시 당신이 많이 참고 사는 것은 아닌지 슬쩍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당신은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노여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자신의 잣대로 사람을 대하지 않으니 노여워할 일이 없고, 화난 사람을 대할 때도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노여워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남 흉도 보고, 남이 화내면 같이 화도 내고, 남에게 잘 보이려고 거짓말도 하면서 살던 나는, 당신을 만나고 나서 달라졌습니다.

당신 옆에서, 나 또한 다른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얼마나 평온한지 새삼 깨달아 갑니다. 당신의 넉넉한 성품 역시,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그래서 옳고 그름에 얽매이지 않는-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내 삶을 바꾼 당신, 그리고 지금은 곧 태어날 아기의 아빠가 될 당신, 나는 불교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다음 생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만, 당신을 보면서 꿈을 꿉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당신에 더 가까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렇게 억겁의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어 번뇌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곧 태어날 우리 아기 또한 당신을 닮아서 과거를 후회하지도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항상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한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습니다. 얽매이지 않기에 번뇌가 없고, ‘나’에게서 벗어나 남을 받아들일 줄 아는, 당신처럼 큰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습니다.

‘고집멸도’- 당신의 말간 얼굴을 보면서, 이제야 그 말을 조금씩 가슴으로 받아들입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에,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당신의 말간 얼굴은, 번뇌 없는 평온한 삶이 무엇인지 내게 가르쳐 줍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통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년 이맘때에는 당신이랑 나랑 아기랑 셋이, 떨어지는 벚꽃을 보러 여의도 윤중로에 가기로 해요! 그리고 그날까지 마음이 아프면 한 번 더 걷고, 몸이 아프면 한 번 더 웃으면서, 우리 각자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충실하기로 해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사랑합니다!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여보, 소영 올림

 

수상 소감
봄처럼 꽃피는 세상 되었으면

 

▲ 류소영

현대불교신문에서 감사편지를 공모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평소 주위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들이 많았는데, 누구보다도 제 옆에 있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이번 공모에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제 편지가 뽑힐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이미 편지를 남편에게 건네주었는데, 뜻밖의 당선 소식에 어리둥절하기만 합니다. 편지가 뽑힐 줄 알았다면, 남편이 깜짝 놀라도록 조금만 기다려 볼 것을 그랬나 봅니다.

글솜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제 편지가 뽑힌 까닭은, 심사하시는 분들께서 편지 안에 담긴 진심을 알아봐 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면을 빌어,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도록 좋은 기회를 마련해주신 현대불교신문사와 수효사 효림원 측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봄입니다. 따뜻한 봄 햇살처럼,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는 우리의 마음까지 활짝 피어나게 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공모를 통하여 매사에 서로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봄 같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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